Chapter 209 - 사랑 받는다는 것.(2)
"마마, 이 애 이름은 뭐야?"
"...글쎄."
이름을 짓는다면 지을 수 있겠지만, 과연 나에게 자격이 있을까.
씁씁한 얼굴로 내 젖을 물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름이 뭐니.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드워프에게 이름을 들어두는 편이 더 좋았으려나.
"모르겠으면, 마마가 지으면 되는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이름을 짓게 된다면, 나중에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나를 혐오하게 되는거 아닐까?
자신을 죽인 마족들의 왕이 지어준 이름 따위를 그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뭐, 그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라고 불 수 있겠지.
매일마다 아가라고만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미아? 아니, 너무 흔한 이름이려나..."
작명 센스는 완전 꽝인데.
짓는다고 해도 게임 등장인물 이름 정도를 똑같이 따라하는 정도가 전부였고.
막상 지으려고 하니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는게 가장 큰 문제였다.
역시 사람은 책을 읽으면서 살아야 해.
머릿속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름 하나조차도 마음대로 지어줄 수가 없었다.
"...일단은, 미아라고 부르자."
어차피 진짜 이름이 있으니 나중에 기억을 되찾으면 그때 그 이름으로 불러주면 되겠지.
***
"엄마, 이것 봐!"
"그게 뭐ㅡ 꺄흣?!"
뭐랄까, 태어나기 전부터 내 배를 뻥뻥 차댄 활발함이 어디로 사라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걷기 시작해서 주변을 아장아장 걷, 아니 뛰기 시작할 무렵에는 아주 난리였다.
어디서 그렇게 물건이나 다른 것들을 가지고 오는지, 방 안에 잡동사니들이 잔뜩 쌓일 지경이었다.
...분명 고양이는 따로 있는데.
"그, 그, 그거 당장 버리렴!"
"응? 왜? 귀여운데..."
"히, 히약... 가, 가까이 내밀지 말아줘... 흣..."
문제라고 한다면 아이라서 그런가 말 그대로 온갖 물건들을 가지고 온다는 것이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ㅡ 미아의 손에 들려있는 검은색의 무언가.
보자마자 팔뚝이 소름이 돋아나고, 원초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
'징그러워, 징그러워, 징그러워...'
더듬이가 까딱인다.
동시에 잔뜩 기름진 등딱지가 반으로 갈라져서는 그 안에서 날개가 튀어나와ㅡ
부우우웅ㅡ
"꺄아아아아앗?!!?!??!!"
초인적인 반응속도로 도망쳤다.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아를 두고는 형편 없이 뛰어다녔다.
싫어, 싫어, 싫어!
바퀴벌레 따위, 싫단 말이야!
"엄마, 이거 무서워?"
"무, 무서운게 아니라... 응, 싫은 거야."
결국에는 아이의 등에 숨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고개를 슬쩍 내밀자, 내가 앉아있던 위치에 거대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더듬이를 까딱이고 있었다.
마치 나를 놀리는 듯한 모양새에 화가 치솟았지만, 저건 감히 내가 손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달까, 아무튼...
"미, 미아. 혹시 저것 좀, 밖으로 내보내줄 수 있니?"
"응! 알겠어!"
아이에게 그런 걸 시킨다는 것부터 부모 실격일지도 몰랐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너무 혐오스러운걸 어떻게 해!
반쯤 울먹이는 상태로 아이가 바퀴벌레를 집어드는 모습을 바라봤다.
저걸 맨 손으로 잡다니, 얼마나 강심장인 거야.
'저게 내 몸에 닿는다고 생각하면ㅡ'
겨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비죽 흘러나왔다.
침대보 빨아버릴 거야.
분명 그 번들번들한 기름이 잔뜩 묻었을 거라고.
응, 무조건 그럴 거니까.
"밖으로 내보냈어!"
"그, 그러면 엄마랑 씻으러 갈래? 방금 그거 지지니까, 응?"
"지지야?"
"엄청 지지야! 세상에서 가장 지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아들었다.
바퀴벌레를 만진 손이 내 어깨에 닿았지만, 어차피 씻으면 그만이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래,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지금부터 차차 배워나가면 되는 거야.
모르는 것들을 알려주면ㅡ
'...알려주면 뭐, 바뀌기라도 해?'
어차피 기억을 되찾으면 전부 알게 될 것들인데, 지금의 내가 알려줘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전부 다 위선에 불과했다.
마족들의 손에 희생되었던 존재들을 데리고 하는 일종의 가족 놀이.
그건 그저 자기 만족으로 가득 차버린, 오직 허무함만이 남을 뿐인 쓸모없는 행위였으니까.
"...미아."
"응, 엄마."
"엄마가, 잘못 했어. 엄마가 잘못 했으니까, 제발 엄마 미워하지 말아줘..."
"...엄마?"
기억을 되찾으면 아이 때의 기억이 있는 걸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용서를 빌어야 했다.
용서를 빌고 또 빌어서, 기억을 되찾았을 때 덜 미움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내가 받게 될 상처가 줄어들지도 모르지.
"울지마. 미아는 전부 다 용서하니까, 울지마."
"...고마워."
아이들은 부모가 울면 따라 운다고 했는데, 미아는 어른스러워도 너무 어른스러웠다.
평소에는 엄청 아이 같다가도 가끔씩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 정말 이 나이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성숙했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는 자그마한 손길에 가슴이 뜨끈거렸다.
"...그보다 미아. 그 손, 바퀴벌레 만진 손 아니니?"
"아."
아니, 괜찮아. 그럴 수 있지.
조금 전보다 걸음을 빠르게 해서 서둘러 욕실에 도착했다.
씻어, 씻어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깨끗하게 씻어야 해!
"미아, 만세하자. 만세~"
"만세~"
미아의 옷을 벗기고, 내 옷을 벗었다.
조금 쌀쌀하기는 했지만, 욕실 안쪽은 따뜻한 물로 채워져 있었으니 감기에 걸릴 일은 없을 터였다.
그렇게 다시 뛰어다니기 시작하려는 아이의 손을 잡아 욕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응? 씻으러 온 건가?"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상대가 피식피식 웃음을 토해냈다.
어째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볼 때마다 웃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려나.
...기분 탓이 아닌가?
"에반젤린."
"어서 오거라.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같이 씼는 사람이 있다면 더 좋겠지."
시중을 드는 사람도 없이 탕에 혼자 몸을 담그고 있다는게 참 에반젤린다웠다.
누군가가 자신의 일을 대신하는걸 싫어하는 성격에, 북부의 전사들 중 가장 강인한 힘을 지니기까지.
만약 에반젤린이 마왕이었다면 아서가 지지 않았을까.
"...나보다는 네가 마왕이었던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구나."
"아서라, 그랬다가는 대륙이 박살이 났을 걸."
짖궃은 농담을 하며 나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든다.
분명 가까이 오라는 듯한 제스쳐를 하고 있는데도 딱히 아랫사람을 다루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고맙구나, 네 덕분에 식량 걱정이 줄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계수 덕분이지만, 네가 심은 것이니까."
"딱히 감사를 받으려고 한 일은ㅡ"
"그렇기에 더더욱 감사 받아야 마땅하지."
별 다른 목적 없이 행한 선행이야말로 진심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싱긋 웃으며 말하는 에반젤린에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이렇게 보니 반쯤 확신할 수 있었다.
만약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의 후속작이 있었다면 그곳에서의 주인공은 아서가 아니라 에반젤린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말 뿐인 감사는 조금 초라하지.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범위 내해서 하나 정도는 들어주마."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진심으로."
애초에 레이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심은 것이었고, 어떻게 보자면 북부의 환경을 어지럽히는 결과가 되기까지 했으니까.
에반젤린이나 다른 사람들이 좋아해줬기에 망정이지, 만약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면 다른 곳으로 옮겨갈 각오까지 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결국 이 모든 건 내 덕분이 아닌, 이런 나조차 받아들인 에반젤린의 수완이라고 봐야겠지.
"그러면, 혹시 지금 말해도 되나?"
"얼마든지. 부담 가지지 말고 말해보거라."
"...저, 그으..."
조금은 머뭇거렸다.
겨우 이런 것에 자기가 내건 보상을 소모했다고 화내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큰 건 받을 수 없어.
마왕이라는 직함을 단 존재를 북부에 머물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은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잠시만이라도 딱딱한 말투가 아니라, 부드러운 말투로 말해줄 수 있겠나?"
"예를 들자면?"
"예, 예를 들자면... 그으... 이렇게, 라던지? 그, 미안..."
정작 나도 딱딱한 말투를 풀어내리니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역시 사람마다 편한 말투가 있는 법이구나.
에반젤린과 나는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귀족적인 말투를 사용하는게ㅡ
"이렇게 하면 돼?"
"에."
이렇게 쉽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투를 바꾸는데, 어찌나 갑작스럽던지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심지어 표정도 똑같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환청을 들어다는게 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네가 말하고 너무 놀라는거 아닐까 싶은데. 왜, 이런 말투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으, 응? 아니, 그게 아니라ㅡ 윽, 죄송합니다."
괴리감이 장난 아니었다.
분명 평소와 같은 에반젤린인데, 말투만 다르니까 엄청나게 기괴하다고나 할까...
곧바로 사과했다.
에반젤린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저 하하 웃을 뿐이었지만서도.
"네가 원한다면 계속 이 말투를 사용해줄 수도 있는데, 어때?"
"내, 내가 잘못했으니까 한 번만 용서해다오..."
"얼마든지."
휴우, 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하마터면 에반젤린의 캐릭터를 완전히 망가뜨릴 뻔 했네.
역시 에반젤린은 귀족적인 말투가 가장 잘 어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