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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12화 (212/342)

Chapter 212 - 사랑 받는다는 것.(5)

"...또야?"

"..."

"이제는 놀랍지도 않네, 진심으로."

에밀리의 타박에 조금 움츠러들었다.

미아가 나를 칼로 찌른 그날부터 에밀리는 내가 아이를 낳는 걸 별로 내켜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다치는 걸 걱정할 정도가 되다니, 좋아애도 되는 거겠지?

"하아... 그나저나, 이거나 봐."

"...이게 뭐ㅡ"

[남편과 아이들을 만나러 갈게요.]

누가 쓴 쪽지인지 정도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미아.

내가 낳은 드워프 아이.

기억을 되찾은 이상 아이라고 불러도 될지는 의문이었지만서도.

"...잘 갔을까? 북부는 엄청 추우니까 분명 준비를 단단히 하고 가야할 텐데ㅡ"

"그 애 걱정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이제 어쩔 셈인데? 앞으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전부 그 애 같으면? 혹은 그보다 더 심하면?"

"..."

"앞으로 몇이나 더 낳을 예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너를 죽일 녀석들을 낳고 있는거나 다름 없다고. 알아?"

알고 있어.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지.

에밀리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이건 꼭 그녀만의 걱정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낳는 것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도와주고 싶지만, 지금의 나는 저어기 마을을 싸돌아다니는 쥐새끼보다 쓸모가 없어서 말이야."

"...에밀리."

"언제나 아서가 지켜줄 수는 없어. 얼마 전 같은 경우에도 네 멋대로 아이에게 향했다가 당한 거잖아?"

아서는 아서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다.

바로니스 국왕이 남겨둔 잔당들이나 마족에 관련된 장소들을 전부 파괴하는 것.

이 세계에서 마족이라는 흔적을 없애야 훗날 도움이 된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확실히, 마족을 소환하는 방법 따위가 이 세계에 돌아다니면 분명 또 다른 혼란이 찾아올 테니까.

"그리고 너, 네가 낳은 아기에게라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버릇 좀 고쳐. 찌르면 찌르는 대로 다 찔려주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면 어쩌려고? 스승님은? 엘리는? 아서는? 그리고, 나는?"

"...미안, 정말 미안하구나..."

"아이가 너를 찌른 충격 때문에 아서와 몸을 섞은 건 이해를 하겠는데 말이지, 최소한의 경각심은 가지라는 이야기야."

마치 어른에게 잔뜩 혼나는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어라, 이렇게 듣고 보니 나 엄청나게 잘못했구나.

그러네, 응.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지.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그럴지도.'

스스로에 대한 자기 객관화 정도는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문제라고 한다면 그걸 쉽사리 고칠 수가 없다는 것이었지.

이계에서 온 존재의 혼이 몽땅 섞인 반푼이 마왕.

아이를 낳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몸뚱이.

정신은 여신에게 잔뜩 주물러져 과장을 조금 보태 정신병자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너는 네 가치를 몰라."

"...마왕이니까."

"마왕이 아니더라도! 진짜, 답답해서 무슨 말을 못하겠네! 마왕이라면 마왕답게 오만한 말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 처음 만났을 때 말고는 단 한 번 도 마왕 같지가 않잖아, 너!"

"그때는 그냥 연기ㅡ"

"연기 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지내! 그게 평소 모습인 것 마냥 지내라고! 너는 자존감을 조금 키울 필요가 있다니까?!"

에밀리가 화가 많은 아이기는 했지만, 최근 들어서 이 정도까지 화를 낸 적은 없었는데...

역시 내가 잘못ㅡ

아니, 여기서 또 자책하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어쩌면 평생 내 얼굴을 안 보고 살겠다며 화를 낼지도...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또 뭐?!"

"그, 으응... 자존감은 어떻게 키우는 거지?"

"하..."

한숨 뒤에 무어라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를테면 씨발, 이라던지. 병신도 아니고, 라던지.

아무리 그래도 면전에 대고 욕을 하는 건 조금 상처인데.

딱히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겠지만서도.

"너, 너... 아니다. 일단 나가."

"...응."

"진짜 얘를 어떻게 하면 좋아..."

신경질적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 에밀리가 반대쪽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당장 나가라는 듯한 제스처에 슬쩍 몸을 일으키자 그 자그마한 입에서 다시 한번 한숨이 터져나왔다.

미안.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사과를 끝으로, 에밀리의 방에서 빠져나왔다.

***

"레이나."

"응, 마마."

"...엄마랑 잠시 산책 갈까?"

내 옆에서 손장난을 치고 있는 아이에게 물었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던 레이나가 내 표정이 변하는 걸 보더니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방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었더라.

잘 모르겠네.

"마마랑 산책~ 마마랑 산책~"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팔을 흔드는 엘프 아이.

그리고 아이의 걸음에 맞춰 느릿하게 걷는 임산부 마왕까지.

참 재미있는 조합이었다.

"레이나."

"...응, 마마."

"이제는 제대로 보러 가야지, 응?"

태어난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레이나는 세계수를 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려고 하지를 않았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그냥 보기 싫어서?

아니, 엘프가 세계수를 싫어할 리가 없잖아.

"...응."

침울한 표정과 함께,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니.

세계수를 보러 가는 거니까 더 좋아해도 되지 않아?

아이의 녹색 머리카락을 슬슬 쓸어내렸다.

부슬부슬함과 동시에 약간의 풀 내음이 나서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우와, 우와, 우와아아아!!"

"푸흣..."

세계수를 보면 더 침울해지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부 내 기우였다.

자그맣게 뿌리를 내린 묘목을 보며 눈을 빛낸 아이가 그대로 세계수를 향해 후다닥 달음박질을 쳤다.

손을 가슴 앞에 꼭 모으고는 귀를 위 아래로 흔들며 격하게 기쁨을 표한다.

조금 전까지의 표정이 거짓말이라는 듯 온몸으로 행복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리엘, 나와의 약속을 지켜줬구나!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이 은혜는 분명ㅡ"

"..."

"...아. 저, 그게... 으으응... 마마."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반사적으로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레이나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기억이 있었다는 것을.

오로지 나를 위해서 아이인 척 연기해줬다는 것을.

만약 태어난 순간 진짜 아기처럼 울음을 터뜨렸다면 들키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그랬다면ㅡ

'아니, 애초에 의미 없는 가정이야.'

언젠가 레이나가 기억을 되찾게 된다는 것 정도는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게 설마 태어난 직후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고마웠어, 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감사할게."

"...이건 그냥ㅡ 아니, 아니야. 속여서, 미안..."

말투는 바뀌지 않았다.

아마 이게 원래 말투였겠지.

확신은 할 수 없었지만.

"세계수를 보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서 보지 않으려고 한 거구나? 아니, 보러 왔다고 해도 분명 혼자만 보러 왔겠지."

"...응."

속이다니, 당치도 않았다.

덕분에 요 며칠 동안 진심으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내쪽이 감사 인사를 전하는게 맞겠지.

레이나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진짜 괜찮아, 레이나. 네가 그렇게 대해줘서, 진심으로 행복했어."

나를 보며 마마라고 부르고, 다리에 들러붙고, 칭얼거리고, 한 침대에 자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품에 안기고ㅡ

그 무엇 하나 해본 적 없는 경험들이었으니까.

마키나는 빼앗겼고, 케룸은 전해줬다.

린은 어른스러웠고, 에밀리는 나를 무서워했으며, 라일라는 나를 증오했지.

물론 그건 케이도 마찬가지였고.

"내 딸이 되어줬던 일은, 평생 잊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역할놀이 같은 관계도 이제 끝이 나겠지.

기억이 돌아온 이상, 레이나는 아리엘의 엘프 딸인 레이나가 아니라 그냥 엘프 레이나로 돌아갈 터였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되어줬던게 아니야."

무거워진 분위기 속,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얼굴은 지금껏 본 적 없을 정도로 형편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그 모습에 두근ㅡ 하고, 심장이 뛰었다.

"지금도, 나는 네 딸이야."

다시 한번, 심장이ㅡ

"그러니까 아리엘ㅡ 아니, 마마."

ㅡ뛰어서.

"안아줘. 숨이 막힐 정도로."

레이나가ㅡ 아이가ㅡ 내 딸이, 팔을 뻗었다.

얼마든지 기다려주겠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한참이고 팔을 뻗어댔다.

그런 딸아이의 모습을 눈에 담자, 머릿속에 남겨진 여신의 목소리가 나를 잔뜩 비웃어댔다.

'가족 놀이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당신 따위가?'

'앞으로 낳게 된 100만 명도 과연 이 아이처럼 당신과 가족 놀이를 해줄 것 같나요?'

'아니, 전혀.'

'당신은 마왕이니까, 절대 사랑 받지 못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야.

절대 아니야.

나는 너처럼 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 아이를 품에 안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어보일 거야.

행복한 미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테니까ㅡ

"으, 으하..."

"..."

"으, 흐, 흐아아아아아앙..."

비가 오잖아.

이렇게나 기쁜 날인데 대체 왜 비가 오는 걸까.

이런 날에는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그래야 했는데.

...혹시 기쁜 날이 아니었던 거야?

아니.

아니, 어쩌면ㅡ

"마마."

눈앞의 녹색 머리카락에 투둑, 하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구나.

나무는 물을 마시고 자라니까, 이 기쁜 날에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신거구나.

...응, 그렇네.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날일지도 모르겠어.

"...레이나."

사랑해.

그리고, 돌아와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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