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13화 (213/342)

Chapter 213 - 의미.(1)

"학교를 만들 거에요."

"학교?"

"네, 학교요."

내 손을 붙잡은 엘리가 싱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학교라니, 무슨 학교?

설마 남녀 사이의 관계를 좋게 해준다던지 그런ㅡ

"지금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아리엘 씨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학교요."

엘리가 말하는 건 그거였다.

세상은 여전히 마족을ㅡ 특히 마왕을 혐오하고 있었기에 그 인식을 바꾸기 위한 교육을 할 것이라고.

지금까지 내가 무슨 일을 해왔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 모든 것들을 널리 알릴 생각인 듯 싶었다.

"...그, 저... 너무 부끄럽지 않느냐."

여러모로 부끄러운 일들이 엄청 많았는데.

차마 다 기억이 다 나지 않을 정도의 분량이었다.

만약 그 전부를 널리 알린다면 수치사를 할지도 몰랐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질 텐데ㅡ"

"저는 아리엘 씨가 그런 취급 받는 꼴은 더 이상 못 봐요."

나를 너무 많이 생각해주는 나머지, 다른 이들의 시선에 너무 민감했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전부 포기했다는 느낌이라 별로 신경도 안 쓰고 있었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런게 문제가 아니었다.

"에반젤린이 허락을 해줄지가 문제구나."

"에반젤린 여왕의 허락만 맡아오면, 아리엘 씨도 허락 해주시는 건가요?"

"...뭐, 그런 걸로 하자꾸나."

설마 승낙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

지금까지 피를 흘리며 싸워왔던 적이 마냥 나쁜 존재들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분명 그 혼란이 엄청날 테니까.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엘리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응, 그건 내가 절대로 못 보지.'

애초에 에반젤린이 허락해줄 일도 없겠지만.

***

"허락하마."

하지만 인생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깔끔할 정도로 흔쾌히 승낙한 에반젤린이,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고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웃긴 얼굴을 하고 있구나, 나.

"어째서? 그런 걸 가르쳐봤자 다른 인간들에게 혼란만 가져올 뿐일 텐데."

어쩌면 정치적으로 위험해질지도 몰랐다.

마왕이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데, 그곳에 있던 여왕이 갑작스럽게 이런 결정을 내린다?

최악의 경우에는 반란 같은게 일어날 가능성도 마냥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가장 좋은 건 그런 교육 자체를 시작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지? 이 내가 허락하겠다고 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정치적 입장이라는게ㅡ"

"힘을 숭상하는 마족들의 왕이었던 것 치고는 꽤 정치에 얽매여 있구나."

마치 코웃음을 치듯이 흥, 하고 소리를 울린 에반젤린이 제 옆에 놓여있던 검을 집어들었다.

스릉, 하는 소리와 함께 뽑혀지는 칼날에 빛이 반사되어 날카로운 예기를 뿜어냈다.

"어떻게 보자면 북부 또한 마족들과 별 다를 바는 없지.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그 권력 앞에, 나머지 모두는 그저 따른다."

그것이 북부의 전부다.

뽑아냈던 칼날을 다시금 검집 안에 집어넣은 에반젤린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조금 전의 코웃음은 자신을 걱정하는 나에게 한 것이 아니라, 정치 같은 같잖은 것에 하는 코웃음인 듯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친우의 일이니까, 돕는 건 당연하지."

"친우, 라니..."

친구라고? 나랑 에반젤린이?

최근 들어서 자주 만나기도 하고, 대화도 많이 하기는 했지만ㅡ

"왜, 싫은가? 북부에서는 본인의 마음에 드는 자를 친우로 삼고는 하는데, 마족들은 다른 모양이군."

"아, 아니! 그건 아니다만..."

"그러면, 내가 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가?"

"그건 더더욱 아니다! 그냥, 그냥ㅡ"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건 더더욱 싫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던지 하는게 아니야.

그냥, 뭐랄까...

"부, 부끄러워서... 읏..."

"...푸핫."

결국 참지 못한 에반젤린이 커다란 웃음을 토해냈다.

아하하하하! 하고 방 안을 가득 채우는 소리에 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기, 그 정도면 됐으니까 이제 그만 웃어도 되지 않을까?

분명 방 안에 단 둘이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이미 부끄러웠지만, 아무튼.

"겨우 그런 걸로 부끄러워하면 어떻게 할 셈이냐. 푸흐, 언제나 생각하지만, 너는 마왕이라는 직함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구나."

"...어떤 점에서?"

"머리부터 발 끝까지. 특히 이렇게 귀엽다는 점에서."

귀엽다니, 뭐가.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에반젤린이 손을 슥 뻗어서는 내 뺨을 쿡 집었다.

마치 귀여운 동물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주로 고양이 수인 아이들을 만질 때의 손길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마왕은 이런데 마족들은 하나 같이 그 꼴이라니, 쯧쯧..."

"정당화 될 수는 없지만, 그들에게도 사정이ㅡ"

"그래, 그렇겠지. 이런 철부지 마왕을 보호하려면 그렇게 했었어야겠지. 암, 그렇고 말고."

그러니까 그런게 아니래도.

이제는 아주 철부지 어린애 취급이었다.

이렇게 보여도 너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았ㅡ

'어라.'

이럴 때는 나이를 어떻게 계산해야 하지?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기준으로 계산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나이로?

지금 내 상태를 말하자면 투명한 물 안에 온갖 색의 물감을 몽땅 섞어넣은 듯한 영혼이 몸뚱이에 들어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이럴 때는 가장 마지막에 넣은 색으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가장 처음의 투명한 물 상태일 때를 말해야 할까.

"확실히, 어릴지도 모르겠구나."

"음? 마족들은 외형보다 훨씬 더 오래 사는 종족이라고 들었다만? 그래, 마치 엘프처럼 말이다."

"그건 그렇지만ㅡ 나에게는 최근의 기억 밖에 없거든."

"..."

마왕이던 시절의 기억을 되찾고 싶냐고 묻는다면 언젠가는 되찾고 싶었다.

단지 지금이 아니라고 느낄 뿐.

혹시라도 내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애초에 그 과정이 쉽지도 않겠지만서도.

"기억을 살아온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래. 인간들 기준으로 한다면 18살 정도ㅡ"

"...용사를 죽여야겠군."

"뭣? 아니, 잠깐ㅡ"

에반젤린을 향해 손을 뻗어봤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다.

뭐야, 왜 이렇게 빠른 건데.

멍하니 에반젤린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5살때까지의 기억이 없어서 대충 18살 정도라고 한거였는데...'

물론 어디의 어떤 사람이 나이를 가늠할 때 5살때까지의 기억이 없다고 그 시간을 빼고 계산하냐며 묻는다면 할 말이 없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마왕으로 살아온 기억이 없다고 해도 일단 살기는 했으니까 최소 수백 년은 될 터였다.

그런데 말이지?

인간 기준으로 생각하면 수백 년은, 조금 문제가 있잖아.

"...범죄지, 범죄."

주로 내쪽이.

그야, 아서는 어떻게 봐도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데 내쪽은 인간 수명을 한참이고 뛰어넘은 수백 살이니까.

이전의 세계였다면 분명 세기의 도둑년이라고 욕을 먹으면서 죽을 때까지 화자되었을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자신에 비하며 아기ㅡ 아니, 정자 수준의 남자랑 결혼해서 애까지 숨풍숨품 낳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보다, 아서를 죽인다니 대체 무슨 뜻ㅡ"

쾅ㅡ!!!!!

"흑?!"

굉음이 울려퍼졌다.

뭔가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데, 아니지?

화들짝 놀란 나머지 히끅 히끅 딸꾹질이 났다.

그런데도 숨는게 아니라 고개를 내미는 걸 보면 나도 참 이상한 사람인 듯 싶었다.

"갑자기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에반젤린 여왕!"

"이런 뻔뻔한 남자 같으니! 범죄를 저지르고도 이렇게나 태연해?! 네놈이 그러고도 인간이더냐! 하, 용사 딱지 떼고 혀라도 깨물어라!"

"그러니까, 그게 무슨ㅡ"

에반젤린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벽이 터져나갔다.

부숴진다거나, 베어진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말 그래도 '터져나갔다.'

아서는 그런 미친 위력의 검을 어떻게든 피해내고 있었지만, 너무도 아슬아슬해서 곧 있으면 한계가 올 것만 같았다.

챙ㅡ!!

"그러니까, 이유라도 좀 설명 해주시죠! 이러시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에반젤린 여왕!"

"그걸 모른다는 점부터 네놈은 쓰레기다, 이 외도 같으니!"

칼부림이 일었다.

잘 막아내고 있었지만, 언제나 쓰던 여신 뿔로 만든 특제 성검이 아니라서 그런지 에반젤린의 검과 부딪힐 때마다 검신이 삐걱거리는게 여기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저러다가는 죽겠네.

물론 에반젤린이 진짜 죽이지는 않겠지만.

...안 죽이겠지?

"아리엘의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당연히 수백은ㅡ"

"열 여덟이다, 이 쓰레기 자식아!!"

"...뭐?"

당혹감이 가득 담긴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내가 있는 건 알고 있었구나.

에반젤린의 검격을 피하는 아서를 보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딱히 이런 걸 노리고 말한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니까!

주먹을 꼭 쥐고는 아서를 향해 파이팅 포즈를 해보였다.

'...그런데, 열여덟이 뭐가 어때서?'

묘하게 열여덟을 강조하는 에반젤린과 그 말에 당황한 아서의 모습에 순간 의문이 들었다.

열여덟이면 충분히 성인 아닌가?

아니, 애초에 이 게임 설정상 성인 취급 받는 나이가ㅡ

[이 게임의 모든 등장 인물은 19세 이상임을 알립니다.]

...이 망할 여신이 진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