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6 - 의미.(4)
"혹시, 토끼 수인으로 변하는 포션도 만들 수 있나?"
"...가능은 한데, 왜?"
에밀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래도 질문 속에 담긴 내 의도를 순식간에 읽어낸 듯 싶었다.
역시 마법사라서 그런지 눈치 하나도 참 마법사 같구나.
속으로 작게 감탄했다.
어쩌면 그냥 내쪽이 너무 티나게 물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토끼 수인으로 변한다면 아이들을 더 빨리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가능은 하겠지만, 재료에 토끼 수인의 털이 필요해. 그런데 토끼 수인들은 북부에서 살지 않지."
"...안 된다는 뜻이구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엄청나게 간절한 것도 아니었고, 간절하다고 해도 있지도 안흔 재료를 구해서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쓸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고.
주르륵ㅡ
"...야."
"...응,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 빨리 눕기나 해, 멍청아!"
전조도 없이 흘러내리는 양수에 조금이지만 당황했다.
배가 아프다거나 그런 것도 없이 갑자기 파수를 하다니ㅡ
설마, 조산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침대에 누우면 더러워져ㅡ"
"침대는 나중에 치우면 되니까 조용히 하고 눕기나 해!"
"으, 으응..."
무거운 몸을 움직여 어떻게든 침대 위로 올라섰다.
나를 부축하느라 낑낑거리는 에밀리의 모습이 귀여워 살풋 웃어보이니 엄청나게 날카로운 눈빛을 잔뜩 받아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모습조차 엄청나게 귀여웠지만.
"괜찮아?"
"아직은 괜찮구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크게 아프지도 않고."
물론 그렇다고 아기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기는 착실하게 내 뱃속에서 나오기 위해 힘을 내고 있었으니까.
그걸 도와주기 위해서 조금 힘을 주자 십 년 동안 묵혀있던 체증이 내려가듯이 주륵, 하고 무언가가 주욱 흘러내렸다.
"태어났다."
"...진짜구나."
아기는 작았다.
내가 봤던 그 어떤 아기보다 더.
자그마한 에밀리보다도 훨씬 작은 아기의 모습에 심장이 쾅쾅 뛰었다.
정말 조산이면 어떻게 하지?
아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라면?
"흐, 흐앙... 흐으응..."
"...다행이다."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자그마한 울음 소리에 가까스로 안심할 수 있었다.
소리가 조금 작기는 했지만, 건강하게 태어났구나.
탯줄을 통해 전해지는 아이의 심장 박동에 직전까지 차올랐던 울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정말, 다행이다.
"그나저나, 토끼 수인이네."
"..."
"말 하자마자 태어나다니,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건 그렇구나."
예상되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은 추측에 불과했다.
괜히 말해서 다른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고.
내 품에 아기를 안겨주는 에밀리에 슬쩍 옷을 벗어내렸다.
세상에 드러나는 탐스런 젖가슴을 입에 물리자, 미약한 힘이 최대한의 노력으로 내 젖을 빨아대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작은데도, 힘내고 있구나.'
랴뇨리나 벨과는 다르게 길다란 귀.
슬쩍 손을 뻗어 만져보니, 고양이의 것과는 또 다른 보들보들함이 느껴졌다.
다 같은 귀인데도 감촉 만큼은 확실하게 다르구나.
어쩌면 그냥 아기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 그래도 재료가 다 갖춰지기는 했네."
"...그렇구나."
"일단 만들어 보기는 할 건데, 너무 기대하지는 말도록 해. 기대하다가 배신당하면 더 서러운 법이니까."
그건 에밀리의 이야기인 걸까.
아니, 어쩌면 만약에라도 본인이 실패할 것에 대한 보험일지도 모르겠다.
에밀리는 아무래도 완벽주의자적인 면모가 강하니까 말이지.
절대 자신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지이 않으려고 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자."
"? 응?"
"갓 태어난 수인들은 체온 조절을 마음대로 못 하니까, 특히 더 신경 쓰는 편이 좋아. 특히 아기는 감기에 걸리면 큰일나거든."
에밀리가 던져준 천을 둥들게 말아 아기를 감쌌다.
생각보다 아기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구나.
설마 언젠가 린이 태어날 때를 대비해서 미리 공부한 건 아니겠지?
"몸이 안 좋으면 여기서 쉬다 가도 되고, 아니면 잘난 네 용사님한테 가도 돼."
"...여기에 조금만 있다가 가마."
아무리 수월하게 낳았다고는 하나, 출산은 어디까지나 출산이었다.
몸이 허하다고나 할까, 다리에 힘이 잘 안들어간다고나 할까.
최대한으로 고개를 돌리는 에밀리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역시 변했어.
"고마워, 에밀리."
"...뭐라는 거야, 정말."
"그러니까 이제는 내 용서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해."
정수리 쓰다듬자 에밀리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근 들어서 아이가 방 안에만 틀어박힌 이유가 뭐였을까.
일부러 나를 피하려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건?
나는 그 이유를 전부 알고 있었다.
그 눈빛, 그 행동, 그 모습 하나하나까지 전부.
눈치채지 못한다면 부모 실격이겠지, 분명.
"...바보 아니야? 어느 누가 잘못한 사람한테 '내 용서를 받아줘.'라고 말하는 건데?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서..."
에밀리는 변했다.
어쩌면 케이나 아서보다 훨씬 더 많이.
언제나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분위기는 상당히 무뎌져 약간의 뭉툭함만 남기고 있었고, 나를 향한 분노는 약간 뜨거울 정도의 관심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물론 전부 잊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없었던 일로 하자는 뜻이 아니야, 에밀리."
"..."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사랑하며 지내자는 뜻이지."
"...바보."
그리고 그 사랑은 바로 나의 용서와, 그 용서를 받아들이는 에밀리의 행동으로 인해 시작될 터였다.
잊는 것은 그저 일시적인 도피일 뿐이지만, 받아들이고 용서를 하는 건 완전한 극복을 의미했으니까.
아이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면 가져도 좋았다.
그것으로 인해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상관 없었다.
"나는 이미 에밀리라는 아이를 사랑하게 되어서, 바보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렇지가 않은데."
"..."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 해주지는 않는 법이었지만, 때때로 사랑은 아무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해결 해주기도 하는 법이었다.
용사 일행의 천재 마법사와 마왕.
가해자가 된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위에 있던 피해자.
다른 이들이 본다면 미련하다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멍청하다고, 어떻게 저런 것을 용서할 수 있냐고 욕할지도 모르지.
"그래도, 이런 바보라면 괜찮지 않아?"
"...읏. 정말, 이지..."
자존심으로 뭉쳐 고개를 뻣뻣히 들고 있던 에밀리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제 발끝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혹은 과거를 떠올리는 것 같기도 한 아이의 모습에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어린 아이 특유의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 전체에 느껴져서 기분 좋았다.
"...나까지, 바보로 만들 생각이야?"
그리고 마침내 고개를 들어올린 에밀리의 눈가에는 자그맣게 눈물이 맺혀있었다.
언젠가 봤던 광기에 찬 눈물이 아닌, 순수하게 기쁨으로 들어찬 눈물이.
과연 저것에 담긴게 사랑일까 싶기도 했지만, 내가 스스로를 믿고 있는 이상 저건 사랑이었다.
응, 분명 그렇지.
"사랑한단다, 에밀리."
"...나도."
아이를 품에 안자, 자그마한 팔이 뻗어져 그대로 내 허리를 둘렀다.
길이가 충분하지 않아 완전히 두르지는 못했지만, 온기 정도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전해질 정도였다.
"엄마."
"..."
"엄마, 라고 불러도 돼?"
그녀의 상처일지도 모르는 그 두 글자.
마족에게 가족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건 스승이자 부모인 린 밖에 없었을 터였다.
린이 죽을 때까지 따라왔던 에밀리가 나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건, 분명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
"...물론이지."
그 사실을 떠올리고 보니 괜히 울 것만 같아서, 있는 힘껏 아이의 몸을 껴안았다.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을까.
그녀의 행동들을 정당화 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에밀리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떠올리며 슬퍼할 뿐이었지.
"엄, 마... 흑. 엄마, 엄마아아, 엄마아아아아......"
"그래. 엄마 여기 있어, 에밀리. 엄마 여기 있어..."
에밀리는 펑펑 울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아니, 갓 태어난 아기보다 훨씬 많이 울었다.
어쩌면 그녀에게 필요한 건 복수나 강력한 마법 능력보다 옆에서 자신과 함께 있을 가족이었을지도 몰랐다.
연신 엄마를 부르짖는 에밀리에 괜히 눈물이 찔끔거려, 눈을 꾹 감았다.
***
"...킁, 다른 녀석들한테는 비밀이야."
"물론이지."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겨우 눈물을 그친 에밀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우리 둘이 만든 평생의 비밀로 삼자.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며 새끼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엮어냈다
약속하고, 도장까지.
약간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게 참 귀여웠다.
'이제야 진짜 가족이 됐구나.'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외모란 가족이 되는 데에 별로 필요 없는 조건이었다.
닮지 않으면 어떤가.
서로가 진심으로 사랑하면 됐지.
젖에서 입을 뗀 아이를 품에 안고 둥가둥가 흔들자 자그맣게 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옳지, 옳지.
"아무튼, 그 토끼 수인화 포션은 너무 걱정하지마. 반드시 만들어 보일 테니까. 그, 그, 그으ㅡ
"..."
"...엄마."
쭈뼛쭈뼛 한 마디 보태는 에밀리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결국 참지 못하고 아이의 얼굴에 마구 뽀뽀를 해버리고 말았다.
싫다고 하면서도 밀어내지 않는 모습이 너무 예뻤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