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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20화 (220/342)

Chapter 220 - 토끼의 유혹.(4)

"...대체 얼마나 격하게 한 건데? 아주 뱃가죽이 걸레짝이 됐잖아."

"아하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나 할까..."

아서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온 에밀리가 내 상태를 보더니 잔뜩 타박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 심하기는 해.

울상을 지으며 배에 손을 가져다 대자, 알싸한 고통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앞으로는 내가 움직이던지 해야지, 응.

"일단 약이라도 발라줄 테니까, 머뭇거리지 말고 빨리 세계수로 가봐."

"...고맙구나."

내 배 위로 조심스럽게 약을 펴 발라주는 에밀리에 싱긋 미소지었다.

간지럽네.

어째 몸이 작아지니 더 간지럼을 잘 타게 된 것만 같았다.

푸흐흐, 웃다가도 구석에 쭈그러져 있는 아서의 뒷모습을 보니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아서."

"..."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렇게 있지 말고 나 좀 세계수로 옮겨주지 않을래?"

아무래도 처음의 그때를 떠올렸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직까지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있구나, 아서.

잊으라고 강요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안 좋은 기억은 스스로가 잊는 편이 가장 좋을 테니까.

"다음부터 조심하면 되는 거야, 아서. 응? 자, 나 봐야지."

네 발로 기듯이 움직여 다가가서는 아서의 옷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처럼 구는지 모르겠네.

그렇게 몇 번이고 옷을 잡아당긴 끝에서 고개를 들어올리는 아서에게 환히 웃어보였다.

봐, 이번에는 안 울고 있잖아?

"아리엘,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마."

"..."

미안하다는 건 상대에게 사과를 할 떄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서에게 듣고 싶은 건 사과의 말이 아니었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아서는 나에게 잘못한게 없었으니까.

"사랑한다고 말해줘."

"..."

"어서."

"사랑해, 아리엘."

짧은 여섯 글자에 만족감을 느끼고는 손을 뻗어 아서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었다.

그래, 그래.

나도 사랑하니까, 아서.

쪽ㅡ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

"응, 덕분에."

아서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안아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듬직하던 몸이었는지, 크기가 작아져서 그런지 훨씬 더 듬직해 보였다.

물론 그걸 지켜보고 있는 에밀리의 표정은 점점 썩어가고 있었지만.

"너는 대체 저 녀석의 어디가 좋다고 그러는 거야?"

"전부 다."

불퉁거리며 내뱉는 말에 간단하게 답해줬다.

장점은 물론 단점 하나하나까지 전부 다 좋아해.

나를 보며 웃어주는 미소가, 그 상냥함이, 그리고 내가 관련된 일에는 언제나 안절부절 못하는 것까지 전부 다.

"세계수로 갈게, 아리엘."

"큼, 그래."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로 안겨있는 자세 때문에 배가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아주 죽을 맛 까지는 아니었다.

뭐, 이마저도 세계수로 가면 전부 해결될 일이었지만.

"마마~"

"레이나."

"...레이나 씨."

다시 만난 레이나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에게 마마~ 라고 부르기까지.

아서가 바로 앞에 있어도 딱히 개의치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정작 불편해 하는 건 아서였지만서도.

"세계수가 상당히 자랐구나."

"엘프들에게 있어서 세계수를 돌보는 건 가장 기본적인 일이거든."

레이나가 손을 대기 이전과 이후의 세계수를 비교하자면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가 났다.

분명 작은 묘목 정도의 크기였는데, 지금은 나무 같은 느낌이 난다고나 할까.

역시 숲의 요정 다운 능력이구나.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가지를 살랑살랑 흔드는데, 그 움직임에 맞춰서 따끔거리던 배가 천천히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머리에 귀가 자랐네?"

"...그래. 토끼 수인이 되는 포션을 마셨거든."

"크기도 엄청 작아졌고."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레이나에 아서의 팔을 두드려 자세를 낮추라고 일러줬다.

천천히 높이가 낮아지고, 내 귀가 자그마한 손에 붙잡힐 무렵에는 레이나의 시선이 내 배쪽을 향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었구나.

"..."

"이건 그, 뭐랄까... 불가항력이었단다."

어째서 변명은 내가 해야 하는 걸까.

아서와 내 배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레이나의 눈빛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차갑게 변해가기만 했다.

마치 인간 이하의 쓰레기를 바라보는 것 같달까.

아니, 확실하게 인간 이하의 쓰레기를 바라보고 있는게 맞았다.

"...죄송합니다, 레이나 씨."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건데? 사과를 하려면 마마한테 해야지."

"..."

잔뜩 타박하는 것 이외에도, 레이나의 말투를 듣는 것 자체가 아서에게 있어서는 꽤나 고역인 듯 싶었다.

확실히, 다시 태어나기 전의 레이나는 언제나 딱딱한 말투를 썼으니까 말이지.

아무래도 그때의 레이나와 지금의 레이나를 겹쳐보는 탓에 제대로 적응을 못하는 것만 같았다.

"이런 작은 몸의 때릴 곳이 대체 어디가 있다고..."

"때린게 아니라, 그..."

"...때린게 아니라고?"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서나 나나 서로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오해를 하고 있었구나.

어쩌면 가장 처음과 같이 아서가 나를 때렸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나에 대한 증오가 남아서 이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같은 느낌으로.

"...그, 아서의 물건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해서 말이지."

"...후엣."

더듬더듬 입을 열자, 레이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얼굴은 물론이고 목과 귀까지 새빨갛게 변해서는 귀를 위 아래로 파닥파닥 흔드는데, 방금 전까지 진지하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서는 잔뜩 당황한 얼굴이 되어버린 채였다.

뭔가 이런 쪽에 엄청나게 면역이 없구나.

그냥 내쪽이 너무 익숙해진 걸지도 모르겠지만.

"아, 아무튼! 때린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심하게 했으면 때린 거랑 다름 없어!"

"그건 그렇지."

"아리엘, 대체 누구 편이야?"

"나는 내 편이다."

아서의 말에 단호히 답했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야. 그냥 나 자신의 편일 뿐이지.

사실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줬다가는 반대쪽 사람이 삐져버릴 것 같아서 선택한 선택지기는 했다.

설마 둘 다 삐진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응, 분명 그렇지는 않겠지.

"자, 이리로 와."

"아서"

"...그래."

세계수 옆의 풀밭을 톡톡 내려치는 행동에 아서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멍하니 있지 말고 나 좀 내려줘.

슬쩍 내려가서 풀밭 위에 엉덩이를 대니, 싱그러운 향기가 코를 잔뜩 찔렀다.

거리가 조금 있는 곳은 겨울인데, 세계수 근처는 봄이라니.

아직 지낼 곳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그렇지 만약 집이 만들어진다면 이곳에서 지내고 싶을 정도였다.

"오두막이라도 지어서 살고 싶구나, 정말이지."

"조금만 더 능숙해지면 만들어줄게."

"...고맙구나."

레이나가 자신 있게 말했다.

확실히, 엘프와 세계수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슬쩍 머리를 움직여 레이나의 허벅지를 대고 눕자, 자그마한 손이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덩치가 작아져서 그런지 레이나의 손으로도 충분할 정도의 쓰다듬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는 작아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

어린아이 특유의 살결과 함께 숲 속의 내음이 잔뜩 맡아졌다.

어느새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아서도 내 배 부근을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어찌나 조심스럽게 움직이던지, 그 괴리감에 푸스스 웃어버렸다.

"우리, 더 행복해지자꾸나."

"...그래."

"응."

행복하지 못한 만큼, 혹은 그것보다 훨씬 많이.

그리고 최대한 오랫동안, 행복해지자.

***

한 가지 간과한게 있다면, 토끼 수인의 특징에 대해서 완전히 듣지 않은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에밀리가 한 말만 듣는게 아니라 현역 수인들에게도 물어볼 걸 그랬어.

고양이들이 토끼 아기를 돌본다고 데려갈때 물어보는 거였는데.

"으으음..."

"...어때? 괜찮나?"

내 배에 청진기를 대고는 작게 신음을 흘리는 엘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뱃속의 아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나 작은 배가 이토록 크게 부풀 정도면 답답하다며 뛰쳐나올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상태는 전부 좋은 것 같아요. 단지ㅡ"

"...단지?"

"숫자가 엄청 많아요."

엘리가 미묘한 표정으로 내 배를 바라봤다.

내 몸집, 혹은 내 몸집보다 커다랗게 변한 배는 과연 이 정도까지 커질 수 있까, 하는 정도까지 커져 있었다.

토끼 수인으로 몸뚱이로 다른 족족의 아이를ㅡ 아니, 아이들을 담고 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얼마나 되길래?"

"여섯에서 일곱 정도요."

"...여섯에서 일곱 정도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숫자에 비해 배의 크기가 엄청 작은 것 같은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배를 슥슥 쓰다듬었다.

혹시 무슨 이상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내 욕심 때문에 아기들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분명 버틸 수 없을 터였다.

"다들 심장은 건강하게 뛰고 있었어요. 여기서 더 커질지, 커지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건 다행이구나."

"하지만, 지금 문제는 아리엘 씨의 몸이에요. 아기들의 무게에 내장이 잔뜩 짓눌려서, 빨리 낳지 않는다면 몸이 잔뜩 망가질 테니까요."

확실히, 최근 들어서 몸이 엄청나게 아프기는 했었지.

이런 상태가 되었는데 아프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하기는 하겠지만서도.

하지만 그런 고통 정도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장점이자 특기가 바로 인내였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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