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7 -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2)
이 안에 아기가 들어있다고?
괜히 신기해서 천천히 배를 쓰다듬었다.
혹시의 혹시라도 엘리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라도 한 건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 엘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이번에는 어떤 아기가 태어날까."
딱히 감이 잡히는게 없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늦게 자라는지도 모르겠고.
부디 건강하게만 태어나기를 바라며 아랫배를 꼭 끌어안았다.
감이었지만, 뭔가 이번 아기는 특별한 아기가 태어날 것만 같았다.
"마왕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메이아는 언제나와 같은 표저이었다.
완벽하게 보이기 위한 무표정. 그리고 단정한 차림의 메이드복까지.
움직이는 것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스커트의 끝단을 조금 잘라냈는데, 조금씩 보이는 새하얀 발목이 그녀의 매력을 한껏 더해주었다.
최근 들어서 휴가도 쓰는 것 같고, 굳이 내 옆에 붙어있으려고 하지를 않아서 조금 정도는 안심하고 있었다.
"...마왕님."
"그래."
"이제야 체감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왕님께서 용사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본 뒤에서야 깨닫게 되더군요."
보고 있었구나.
별로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특히 아서가 진창 취한 모습은 더더욱.
그래도, 그것을 계기로 인식이 바뀌었다면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것을 인지하는게 바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첫 걸음이었으니까.
"최근 들어서 사미르라는 아이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있습니다."
"사미르?"
"이곳에서 일하는 시녀 중 하나입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녀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분명 인간이겠지.
처음에는 말도 섞기 싫어 했었는데, 장족의 발전이로구나.
"그래서, 인간들은 어떤 것 같지?"
"...저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렇겠지.
원래 인간과 마족들은 하나였고, 둘로 분리되어진 존재들이었으니까.
공통점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지금은 비록 사이가 매우 안 좋은 상태였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간극을 극복해낼 수 있을 터였다.
"마왕님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건 아니다만."
아니, 처음에는 분명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처음이라는 기준을 아서와 처음 만났을 때로 생각한다면, 나는 분명 모르고 있던 것이 맞았다.
그럼에도 직접 인간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에 의의를 둬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잘도 죽이지 않고 버텼구나, 나.
"뱃속에는, 아기가 있는 겁니까?"
"그래."
잠시 대화의 흐름이 끊기자, 메이아가 주제를 바꿨다.
아기에 대한 건 잘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줄 알았는데, 또 그건 아닌가 보구나.
메이아의 눈동자에는 흥미가 가득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어린아이의 그것과 닮아 있어서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뭐, 딱히 외면할 생각은 없었지만서도.
"...한 번, 만져봐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아직 겉으로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내 배에 손을 대고 싶은 모양이었다.
딱히 안될 것도 없었기에 배를 내밀자, 조심스러운 손길에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왔다.
마치 손대면 깨져버릴 유리 공예품 같은 것을 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정도로 연약하다는게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서도.
"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정작 아기를 품고 있는 나는 잘 모르겠다만."
메이아의 손 끝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온기가 참 마음에 들었다.
엘리도 마족에 가깝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딱 맞는 온기는 아니었지.
마치 할리벨을 떠올리게 하는 온기라고나 할까ㅡ
...그래, 할리벨.
다시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마왕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메이아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한 걱정을 끼칠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만끽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
"무언가 이상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렇겠지?"
"진정하세요, 아리엘 씨."
정상이라는 진단을 내려줬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엘 씨는 거의 매일 같이 나를 찾아오셨다.
아기에게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혹시 있는데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시면서도 왜 자신은 아기가 있는 것을 느낄 수 없는 것인지 불안해 하셨다.
산모라면 자신이 품고 있는 아기를 가장 잘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렇게 말했더랬지.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다름 아닌 아리엘 씨의 몸 상태에요."
"내 몸 상태? 나는 멀쩡하다만..."
원래부터 몸이 약하셔서 스스로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깨닫지 못하시는 걸까.
아니면 아기에 대한 걱정이 너무 앞서서?
며칠간 보지 못했을 뿐인데도 아리엘 씨의 얼굴은 꽤나 초췌해진 채였다.
그것이 겨우 피로나 걱정 때문이 아니라는 것 쯤은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어요."
"..."
"정확히 말하자면 흡수되고 있다는게 맞겠죠."
아리엘 씨가 아이를 낳으며 지금까지 이랬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전혀.
아기를 낳은 뒤 힘겨워하신 적은 있었지만, 아기를 가지는 도중에 생명력이 줄어드는 경우는 전혀 없었더랬다.
하물며 그 줄어든 생명력이 아기에게 향하는 건ㅡ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자, 엘리. 지금은 아리엘 씨에게 집중해.'
눈을 꾹 감고는, 다시금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불안하게 떨려오는 눈동자 너머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을 보니 조금이지만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아직은 그 무엇도 확정되지 않았어.
지금은 그저 추측일 뿐이잖아, 그렇지?
"일단은 되도록이면 세계수 근처에서 머물러 주세요. 세계수의 생명력이라면 분명 안전하게 아이를 낳으실 수 있을 테니까."
"...그래,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말한 김에 바래다 드릴게요. 어차피 레이나 씨를 만나러 갈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레이나? 레이나는 왜?"
사실 아리엘 씨와 함께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굳이 만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딱히 사이가 나쁘다거나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리엘 씨 앞에서면 어린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꽤 좋은 볼거리였고.
어린 모습의 엘프가 어린 아이처럼 행동한다라...
상상만 해도 귀여웠다.
"그냥, 안부 인사라도 할 겸 해서요. 그야, 레이나 씨와 저는 잘 만나지를 못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저택 내의 의무실이나 마을 쪽이 주 활동 범위인 자신과는 다르게 레이나 씨는 언제나 세계수에만 계셨으니까.
만약 세계수 근처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세계수가 흩뿌리는 봄 너머로 향하지는 않으셨더랬다.
하긴, 북부 특유의 한기는 엘프에게 있어서 상당히 꺼려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자, 가요."
"그래."
굳이 부축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그냥 내가 하고 싶었다.
아리엘 씨의 체온, 살결, 그리고 호흡까지.
그 모든 것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리엘 씨, 당신이라는 존재가 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라는 건 알고 계시나요?
그러니까 부디 아프지 말고 오래 오래 함께 있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마마!"
"레이나!"
피부를 찌르는 한기가 잦아들고, 몸에 봄이 스며드는 순간 마치 요정의 노랫소리와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싱그러운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
그 속에 든 건 몇백 년 산 엘프였지만, 그 찬란함이 어디론가 가는 건 아니었다.
지금 와서는 아리엘 씨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우군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으니까.
...분명 내가 더 오랫동안 같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도 오랜만이야."
"잘 지내셨어요, 레이나 씨?"
"응,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덕분에, 라니.
딱히 한 건 없었지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제가 하는 거라고는 가끔씩 몸을 봐주는 것 뿐인 걸요, 뭐."
그것마저도 띄엄띄엄이었지만.
"그 가끔이 고맙다는 거야, 엘리."
"...그렇게 말씀 해주시니 감사해요."
해맑게 웃어보이는 얼굴에서는 그 어떠한 적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에 레이나 씨가 나에게 적의를 보일 이유도 없겠지만, 단순히 그 사실 하나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그래, 내가 너무 삐뚫게 생각하고 있던 거였어.
누가 우선이냐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었다.
그냥 아리엘 씨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였는데.
"레이나 씨."
"응?"
"...후후."
탐스러운 정수리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원래라면 자신 쪽이 올려다 봤어야겠지만, 지금은 레이나 씨 쪽이 자신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손바닥 전체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입꼬리를 비죽 들어올리니, 레이나 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이런 표정도 지으실 줄 아시는구나, 레이나 씨.
"푸핫..."
"마마?"
"아리엘 씨?"
그러다가 잠시, 옆에서 들려온 웃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우리 둘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아리엘 씨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아리엘 씨는 겨우 이런 것으로도 충분하신 거야.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그저 본인의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만으로도 환하게 웃어보이는 사람인데, 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있던 걸까.
"두 사람 다, 고맙구나."
아리엘 씨가 마치 태양과도 같은 미소로 우리들을 바라봤다.
오늘의 햇빛은, 평소보다 훨씬 더 눈부셨다.
그럼에도 눈이 멀지 않은 건, 가장 소중한 것이 준 축복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