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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39화 (239/342)

Chapter 239 -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4)

"...기억을 되찾는 약? 그건 갑자기 왜?"

한창 포션 연구를 하고 있던 와중에 아리엘이 찾아왔다.

기억을 되찾는 약을 만들 수 있냐고 묻는데, 아무래도 여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모양이었다.

설마 설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녀석 따위, 설득이 된다면 진득 되었을 터였다.

"왜, 설득이라도 해볼 생각이야?"

"...그래."

"강박이야, 그거. 적당히 고치도록 해."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모든 생명체를 이해하려들고, 용서하려는 그 본능.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평범한 모성애를 뛰어넘은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흡사 저주와도 같은 그런 것.

하지만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눈앞의 가련한 여자를 인정한 그 순간부터ㅡ 정확히는 엄마라고 부른 순간부터 그녀가 원하는 것들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아, 알겠어."

"고마워, 에밀리."

"대신."

마법사와 거래를 할 때는 언제나 등가교환의 법칙을 따르라고 했지.

비록 지금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지만,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 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주신 나의 정체성.

그리고, 절대 버릴 수 없는 유일한 것.

"쓰다듬어줘."

"그래."

스윽, 슥ㅡ

기다렸다는 듯이 뻗어진 손이 그대로 정수리를 꾹 눌렀다.

조금 힘을 준 것 같기도 했지만,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애정이 잔뜩 담겨서 그런지 오히려 기분이 좋을 정도였으니까.

"...앞으로는 허락 받지 않고 쓰다듬어도 돼."

"하지만 머리에 고깔 모자를ㅡ"

"벗겨도 되니까."

겨우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껏 쓰다듬지 못했단 말이야?

얼마나 내 눈치를 보고 있던 거야, 대체.

입술을 비죽 내밀며 한껏 실망한 티를 냈다.

아리엘에 대한 실망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었음에도 안절부절 못하는 저 모습이 상당히 귀여웠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나한테 오는 거다?"

"그래."

"절대 혼자 무리하지 말고."

"응."

슥슥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맡기니 점점 노곤노곤해졌다.

최근 들어서 편하게 잠을 잔 적이 있었나?

언제나 약재 특유의 냄새와 함께 눈을 붙이고는 했는데, 오늘 만큼은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가 코를 가득 채워댔다.

...좋네, 응.

"바로 만들어 줄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자고..."

"천천히 하려무나."

순식간에 쏟아지는 수마에 천천히 몸을 맡겼다.

부디 이 온기가 계속될 수 있기를.

과분하지만, 동시에 자그마한 소원이었다.

***

"..."

"흐으응..."

겨우 병을 열었을 뿐인데도 용케 냄새를 맡았구나.

물약의 향이 방 안으로 퍼져나가자, 품에 안긴 아이가 작은 울음 소리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아주렴, 금방 끝나니까.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키고는 손에 들린 약병을 내려다 봤다.

'이걸 먹으면, 기억이 돌아오는 걸까.'

에밀리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믿기가 힘들기는 했다.

수백, 혹은 수백만 개의 영혼이 뒤섞여 흐려진 기억이 겨우 이런 물약 하나로 돌아올 수 있다고?

가장 최근의 기억은 기계 문명이 발달한 세계의 것이다 보니 조금 불신하게 되는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뭐, 천재 마법사님이 만드신 물약이니까 믿고 마실 수 있겠지.

"흐읍ㅡ"

꼴깍, 꼴깍.

"...딱히 무언가 떠오르거나 하지는 않는데."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가, 입 안에 남아있는 쓴 맛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떠오르는건 그저 지금의 기억 뿐ㅡ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아리엘이란다.'

ㅡ인게, 맞나?

'...미안하구나, 너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우윽..."

'...그런 표정 짓지 마렴. 어쩔 수 없었단다. 신께서 원치 않으셨으니까, 어쩔 수가ㅡ'

"어머, 니?"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지만 조금 더 성숙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나를 보며 웃고, 행복해 하고, 그리고 울던.

단편적인 기억이었지만, 그것 만으로도 내 영혼은 빠른 속도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게, 내 기억이야.'

원래의 나ㅡ 마왕이 가지고 있었던 기억.

영원히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그런 기억.

천천히 숨을 고르며 몸을 웅크렸다.

지금은 기억을 더 떠올리는 것보다 어머니의 얼굴을 곱씹고 싶었다.

어머니, 어머니, 나의 어머니.

"...정말, 그때는 왜 그랬던 거냐."

"흐으응..."

괜히 품 안의 아이를 탓했다.

아이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잃는다는 기억을 떠올리니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어째서 어머니의 아이들을ㅡ 내 형제자매들을 죽인 거야.

어째서?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했다가는, 여신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릴 테니까.

"...일단은, 여기까지 떠올려야겠구나."

한 번에 전부 떠올리기에는 슬픔과 그리움의 정도가 너무 컸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일 줄 알았는데.

심장을 칼로 난도질한 듯한 감각에 눈물이 잔뜩 맺혔다.

어느새 뿌옇게 변한 시야에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내자 팔 부분이 순식간에 축축해졌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무리 일부분이라고 해도 기억을 떠올렸음에도 아이를 증오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니, 오히려 일부분만 떠올린게 오히려 행운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용서를 심장에 새길 수 있었으니까.

"부디, 내 기억이 전부 돌아와도 이 아이를 용서할 수 있기를..."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누구에게 비는 건지 모를 기도를 해댔다.

분명 용서하지 않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할 텐데 말이다.

***

"엄마."

요즘 들어서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찾아가 봤는데 또 이런 모습이었다.

잔뜩 상처 받아서, 울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자고 있는데도 이런 얼굴이라는 건 분명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이겠지.

"울지마."

찡그리고 있는 아리엘의 얼굴을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케이에게 있어서 아리엘이란 그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비록 아서를 빼앗겼다고는 해도, 그녀는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신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져야만 해.

그러니까ㅡ

"그러니까."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한 번 잠이 들면 거의 깨지 않는 아리엘의 특성상, 무슨 짓을 하더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눈을 감고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언젠가의 기억ㅡ 마족들의 목을 잘라내던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품 안의 날붙이를 꺼내들었다.

"문제의 원인을 없앤다면, 원래대로 행복해질 수 있겠지."

눈앞의 아기가 여신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만약 아리엘이 이 아기를 죽인다면 다시금 그녀의 몸에 잉태해서 태어나게 되겠지.

그러니까, 내가 죽이는 거야.

'설사 평생 원망 받는다고 해도, 내가 하는 수밖에 없어.'

다른 사람들은 절대 아리엘이 싫어할 법한 일을 하지 않을 터였다.

아무리 그 상대가 여신이라고 해도 절대 손을 쓰지 않겠지.

그녀에게 필요한 건 결단을 내릴 사람이었다.

아무도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니 결국에는 내 차례까지 와버렸지만.

"...엄마."

하지만, 그 한 마디.

잠꼬대처럼 흘러나온 그 한 마디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리엘ㅡ 마왕에게 있어서 마신이란 엄마 같은 존재일까?

단순히 그 생각 하나가 내 몸에 망설임이 깃들게 만들었다.

"...이래서야, 나도 똑같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날붙이를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기왕 온 김에 같이 자고 갈까.

잠시 머뭇거리다가도, 알맞게 비어있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는 그대로 몸을 파묻었다.

너는 조금 옆으로 가지 그래?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를 옆쪽으로 주욱 밀어내고는 그대로 아리엘의 품에 안겼다.

"...저걸 죽이는 건,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참는 거야, 알겠어?

슬쩍 다가가서는 가느다란 눈썹 위에 입맞춤을 했다.

이 엄마를 어떻게 하면 좋아.

딸이 이렇게나 걱정하게 만들면 어떻게 하자는 건데?

'설마 여신조차 제 아이로 받아들일 줄이야...'

성격이 좋아도 너무 좋은거 아닐까, 정말이지.

이런 사람이 지금껏 마왕이라는 자리에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아리엘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말을 했는지 알 것 같다고나 할까.

...물론 지금이 아니라 한참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이제 악몽 같은 건 꾸지 않아도 좋아, 엄마."

눈썹 위에서 떨어진 입술이 이번에는 이마를 쿡 찍어눌렀다.

악몽아, 악몽아, 날아가라.

이제 충분히 괴롭혔으니까, 더 이상은 우리 엄마에게 다가오지마.

그렇지 않으면 내가ㅡ

"ㅡ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서늘한 시선이 아기를 향했다.

빌어먹을 정도로 아리엘을 닮은 외형에 분하지만 이가 득득 갈렸다.

차라리 나였다면.

차라리 내가 그 정도로 아리엘을 닮았더라면.

"그러니까 처신 잘 해."

조금이라도 잘못했다가는 그 자그마한 머리통이 더 이상 몸통에 달려있지 못하게 될 테니까.

제 처지도 모르고 곤히 잠든 아기를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사실 네가 제 분수도 모르고 날뛰어줬으면 좋겠어.

기억을 되찾는 순간 아리엘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혐오해서 결국ㅡ

그 누구에게도 동정 받지 못한 채, 미움만 받으며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언제가 될지 모르는 그 날까지, 잘 자렴."

소리 없이 뻗어진 손가락이 그대로 아기의 볼을 찔렀다.

당연하게도, 아기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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