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0 -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5)
"..."
"배고프니?"
"..."
"왜 이럴까..."
조금 자란 아이는 슬슬 유녀 쯤에 접어들고 있었다.
안타까운 점이라고 한다면 내 말에 거의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점일까.
주변에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건 일상이었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아니,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러고 보니, 뿔이 나지 않았지.'
여신도 어디까지나 마족들의 신인 이상 머리에 뿔이 자라날 법도 했는데, 지금껏 자라나지 않았다.
애초에 마족들의 아기를 본 적이 없어서 태어날 때부터 뿔이 있는지 혹은 신체가 성장하며 자라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약간의 기억이 돌아오기는 했지만 많은 것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저 강렬한 감정 몇 개 정도만 가슴 속에 파묻고 있을 뿐이었지.
"아가, 이리 오렴."
내 부름에도 답하지 않는 아이에게 손을 뻗어 그대로 안아들었다.
설마 나를 싫어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정작 안아들면 품 안으로 파고드는걸 보니 딱히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이 아이도 나처럼 천천히 기억을 되찾고 있는 건가.
그런 강렬한 기억들을 정리하고 있느라, 주변에 신경도 못 쓰고 있다던지.
"...너무 급하게 떠올리지 않아도 된단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과거의 기억에 현재가 파묻히지 않도록, 부디.
여신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몸이 잘게 떨려왔다.
공포와 증오, 그리고 분노.
아직 이 감정들을 능숙하게 잠재울 수는 없었지만, 충동적으로 몸이 움직이지 않게 억제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마왕님,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고맙구나."
메이아가 표정 관리를 잘 할 줄 아는 마족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솔직히 마족에게 있어서 마신이란 원수에 가까웠으니까.
트레이 위에 식사를 담아 들어오는 상대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요즘은 잘 지내고 있느냐?"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꼬박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메이아에 손사래를 쳤다.
그 정도까지 고마워 할 필요는 없는데.
정작 나는 메이아 단 한 명만ㅡ 그것도 내 힘이 아닌 에반젤린의 힘 덕분에 겨우 시녀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직 감사 인사는 이르다고 생각해.
아직,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최근 들어서 인간들이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꽤 달라졌더군요."
"그래?"
"아무래도 엘리 님의 덕분이 큰 것 같습니다."
또 한 가지 변화가 있다면, 메이아가 엘리에게 존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일까.
엘리가 용사 일행의 성녀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존칭을 쓰는 건 분명 그녀가 마족과 유사한 육체를 얻었기 때문일 터였다.
내 곁에 있는 성녀이자 마족.
심지어 엘리는 마족들의 인식 개선을 위해서 잠도 제대로 자지 않을 정도로 노력하고 있었으니 더더욱 신뢰가 갈 법도 했다.
"엘리 님은 마족과 인간이 성공적으로 동화된 증인이시라 그런지 다른 인간들이 그나마 쉽게 믿어주는 것 같더군요."
"아무래도 성녀이기도 했으니까 말이지..."
그래도, 북부 한정이기는 해도 마족들의 인식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다행인 이야기였다.
마족들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과연 진정으로 용서를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냥 증오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터였다.
그런 인간들을 보고 배웠기에 마신이 눈앞에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걸까.
지금 보면 그냥 나를 닮아서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서도.
"마신이 걱정이십니까?"
"...그래."
"그래도 지금이 기회이지 않습니까. 마신은 어머니라는 존재가 있어본 적이 없을 테니, 지금 버릇을 들여놓는다면 마왕님을 쉽게 놓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지만 말이지...
음식이 눈앞에 있는데도 눈짓조차 하지 않는다.
신은 원래 음식을 먹지 않던가?
아니, 그런 것 치고는 아기였을 때는 내 젖을 먹었더랬다.
그러면 뭘까.
혹시 문제라도 있는 건 아닐까.
'겨우 마족의 몸으로 신을 잉태해서?'
여신이 마족들을 창조한 건 그렇다고 치지만, 필멸자가 신을 잉태하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쓰럽네.
멍하니 내 품에 안겨있는 아이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아직 뭔가를 먹지 않아서 이상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조금만 더 지켜보도록 하자.
엘리도 딱히 이상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아, 그래. 동화책이라도 읽어 줄까?"
어렸을 때부터 조기 교육을 하는게 중요하다고 했으니까 말이지.
에밀리한테 가서 받아오는 편이 좋으려나.
들리는 이야기로는 얼마 전에 에반젤린에게 서고의 관리를 맡겨졌다고 들었다.
음, 왕궁 서고에도 동화책이 있을런지는 또 모르겠네.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부디 말씀 해주시길."
"그래."
꾸벅 고개를 숙인 메이아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처음에는 먹는 것을 누군가가 본다는 사실이 엄청 부담스러웠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것 또한 전부 나를 위한 일이라는걸 깨달았달까...
아니면 그저 마왕으로서의 기억이 돌아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
원래라면 자그마한 방 하나만 가지고 있었을 터였는데.
엄청나게 넓은 도서관을 둘러보며 작게 감탄을 내뱉었다.
왕궁의 지하에 이런 곳도 있었구나.
솔직히 북부의 왕국이라고 한다면 조금 싸움꾼 느낌이 강해서 책 같은 걸 이 정도로 많이 쌓아놓을 줄은 몰랐다.
"어서와, 뭔가 찾으러 온 거라도 있어?"
"에밀리."
언제나와 같이 커다란 고깔 모자를 쓴 에밀리가 옆 책장 뒤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손에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는데, 옆쪽에 책으로 만들어진 탑이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책을 읽는 것이 푹 빠진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에반젤린에게 서고 같은 곳이 있는지 물어볼 걸 그랬네.
"혹시 아이들이 읽을 만한 동화책 같은게 있을까?"
"동화책? 일곱 쌍둥이들이 동화책을 읽을 시기는 지났고ㅡ 혹시, 여신에게 읽어주려는 거야?"
"응."
내 대답을 들은 에밀리의 표정이 이상한 걸 본다는 듯한 것으로 바뀌었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는 듯한 얼굴.
그야, 엄마니까.
조금 바보 같은 이유기는 했지만, 이렇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는 걸.
"알려주고 싶거든."
"...뭘?"
"엄마라는게, 어떤 존재인지."
마신은 어머니에게서 자신과 닮은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내 형제와 자매들을 전부 죽였더랬다.
그때의 나는, 마왕은 그 사실에 분노 했었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이성을 거의 잃어버릴 정도였더랬다.
그렇기에 마신에게 복수 했고, 복수 당했다.
하지만 정확한 잘잘못을 따지기에는 내가 너무 변해버렸다.
상황도 많이 변했고, 또 여신도 변했지.
"하아, 정말이지... 알아서 해."
"고맙구나."
"...뭐만 하면 고맙다 고맙다. 너무 사소한 것에까지 고마워 하는거 아니야?"
"그렇지만, 고마운 걸 어떻게 하느냐."
뭐가 있는지도 보지 않고 책을 슥슥 뽑아서 건네주는데, 그 무심한 행동 하나가 어찌나 달콤하던지.
'아이를 위한 옛날 이야기'라고 써져 있는 제목의 커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심술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도 않는구나.
그래, 어떻게 보자면 동생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
...마신이자 여신이 동생이라니 조금 웃기기는 했지만.
"아, 맞다."
"응?"
"충고 하나 해주자면, 당분간은 조심하는게 좋아."
조심하라니, 무엇을 말하는 걸까.
"마족들에 대한 인식은 확실히 예전보다 나아졌지만, 그만큼 증오하는 자들의 분노 또한 더 깊어졌어."
"...그래."
"때가 이르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이 가장 조심해야할 때야."
네가 죽거나 다친다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아?
에밀리가 속삭였다.
아서는 물론이고 엘리, 특히 그 아이라면 분명 미친듯이 날뛸 텐데.
하필이면 마족의 신체를 가지게 되어서 날뛰는 순간 기껏 쌓아두었던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게 될 터였다.
그런 건 나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바라지 않는 결말이겠지.
그렇게 된다면 지금까지 어떻게든 기워왔던 상처가 터지다 못해 또 다른 비극으로 마무리 될 터였다.
"충고, 잘 새겨두마."
마지막으로 에밀리의 정수리를 쓰다듬고는 그대로 서고 밖으로 나왔다.
조심해라, 조심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뭔가 보인다던지 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그런 말을 들어도 말이지, 뭘 어떻게 조심해야 할지를 모르겠는걸.
느껴지는 건 그저 언제나와 같은 북부 특유의 한기 뿐이었다.
"잘 있었니?"
"..."
"자, 책 읽어줄 테니 이리 오렴."
손을 뻗어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래, 갑자기 말을 하거나 반응을 하면 그건 그것대로 놀란 테니까 말이지.
조심스럽게 아이를 들어올려 무릎 위에 앉히고는 천천히 책을 펼쳤다.
"와아..."
예쁜 그림들 밑에 적혀있는 커다란 글씨들.
아무래도 아이들이 따라 읽으라고 글자를 이렇게 크게 써놓은 듯 싶었다.
이 아이가 따라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계속 읽다 보면 언젠가는 따라 읽을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옛날 옛적에, 정말 아름다운 공주님이 살고 있었답니다ㅡ"
그때가 온다면 부디, 어머니와 딸로 남아있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