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5 - 행복해지고 싶어.(4)
그렇게 한참이고 말싸움을 했다.
나도 그렇고 여신의 사념? 기억? 어쨌든 여신도 고상한 말투는 집어치우고 아주 개처럼 싸웠다.
아무리 기억 덩어리라도 지치기는 하는지 헉헉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내 혼에 섞인 인간의 기억.
마나 같은 것이 일절 없는 세계의 인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와 말싸움을 하면 할수록 체력을 회복하고 강해지는 능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면 효과는 두 배.
"나와 다르게 가슴이 작은 것도 그렇구나. 설마 가슴의 크기에 대해서 무언가 열등감이라도 있는 게냐? 확실히, 가슴 크기 만큼은 내 어머니와 전혀 닮지 않았지."
'...너!'
"그 납작한 가슴 만큼이나 속도 좁아서는 겨우 한 두번 뒤통수를 맞았다고 이 지랄 저 지랄 하는 꼴이라니..."
'...'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억울해서라도 가만히 못 있겠어. 돌아가는 즉시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주마."
추측이지만, 여신은 나에게 사랑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싶었다.
그러니까 싫어하는 짓을 계속 하는 수밖에.
잔뜩 사랑해줘서 항복을 받을 때까지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다고 제가 당신에게 굴복하게 될지!'
히스테릭한 목소리 끝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까지 귓가에 맴도는 여신의 숨결.
나이답지 않게 입술을 비죽 내밀고서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내려다 봤다.
혹시 네가 말한 거니?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설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천사 같은 아이가 그런 험한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아가. 우리 아가는 엄마 좋지?"
"..."
자그마한 몸을 들어올려 꼭 안으니 뜨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마신이라도 아이 때는 성인보다 체온이 더 높구나.
아무래도 포대기 비슷한 이불에 하루 종일 감싸여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좋지 않은 꿈에 행복한 현실이라.
깨어 있는 모습도 천사 같았지만, 자고 있을 때의 모습은 뭐랄까... 완전 대천사?
"마왕님, 깨어나셨습니까?"
"그래."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메이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엄청나게 부지런하구나.
최근 들어 듣는 이야기로는 왕성 내에서 엄청나게 평이 좋다고 했지.
다른 시녀들이 하는 일을 거뜬히 해내고, 인사도 잘 받아주고, 예의도 바르다고 했었나.
지금까지 본 마족들과는 꽤 다른 것 같다나 뭐라나.
"아기는 아직 소식이 없으십니까?"
"아직은 태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구나. 그래도 별 탈 없이 자라는 것 같아서 다행이지만."
볼록 튀어나온 배를 슬슬 쓰다듬었다.
이번에 몇 번째 아이였더라.
잠시 가늠하려고 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서 포기했다.
얼마나 낳았다고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한 걸까.
뭐, 가물가물하다기보다는 최근 들어 여러가지 기억들이 마구 쏟아진 탓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요즘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그래서, 친해진 인간은 있느냐?"
"친하다의 기준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지만ㅡ 인사를 하면 받아주는 정도라면 몇몇 있는 것 같습니다."
마족이라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꺼려지는건 있는 것 같지만 말입니다.
그래, 그렇구나.
인사를 하면 받아주는 사람이 있구나.
새삼스럽지만 세상이 꽤 변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아이가 납치당하고 다시 돌아온 뒤부터 시선이 조금 바뀌었지.
원래도 다른 사람들을 자주 마주치는 편은 아니었지만, 마주친다면 도망치거나 표정을 찡그리기 일쑤였는데 최근 들어서는 인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메이아 씨, 혹시 여기 계ㅡ"
"지금은 마왕님을 모시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넵! 죄송합니닷!!"
문이 열리며 인간 하나의 고개가 빼꼼 튀어나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확실히, 따로 말해주지 않으면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지.
솔직히 메이아라면 화라도 낼 줄 알았는데, 그러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내가 생각한 반응은 '감히 마왕님이 계시는 곳에 함부로 발을 디디다니!' 같은 거였는데.
"나는 딱히 상관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해뒀다.
내 방에는 내 지인들만 드나들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와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슬슬 다른 사람들과 안면을 익힐 때도 되지 않았나 싶기도 했으니까.
...정말이지, 다들 너무 과보호 한다니까.
"...다른 인간들도 보고 싶구나."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다.
매일 보던 사람들만 봐서 질ㅡ 리지는 않았지만, 색다른 자극이 필요했다.
원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즐거움을 느끼는 법이니 말이지.
물론 내 입장에 대해서는 아주 잘 인지하고 있었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마음대로 밖을 돌아다녔다가는 못볼 꼴을 볼 터였다.
주로 내쪽이 위험해지는 쪽으로.
"원하신다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응?"
"지금 바로라도 가능하니 부디 편히 말씀 해주시길."
"...그래."
가능하다고? 진짜로?
메이아가 허튼 말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설마하니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있다니ㅡ
진짜, 가능해?
반색하며 메이아를 바라보며 뭔가 잔뜩 아픈 듯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여온다.
가능하다는 뜻이구나.
"그러면, 지금 바로 나가자꾸나!"
내 신변에 대한 위협 정도는 메이아가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터였다.
애초에 일반인들의 능력으로 뿔 달린 마족에게 승리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음, 생각 해보니까 이 정도면 그냥 나갈 수 있던게 아니었을까.
솔직히 에반젤린도 나가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기도 했고.
"음, 그나저나 나는 뿔이 없어서 괜찮지만ㅡ"
메이아는 뿔이 있지, 응.
엄청 커다랗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봤을 때 '아, 이 녀석 마족이다.' 정도는 충분히 알아볼 정도였다.
아니, 카츄샤로 어떻게 가려본다면 가려질지도?
메이아의 머리 위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ㅡ
"이러면 조금 괜찮아 보이는구나."
"...감사합니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나를 보며 조금 당황했는지 메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튼, 따로 준비 해야할게 있을지 모르겠네.
아이를 돌보는 건 랴뇨리나 미코 정도면 충분할 테고.
'아니다, 그냥 데리고 나갈까?'
언제나 방 안에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경험을 해야 마족이나 인간들을 향한 증오가 사라지겠지.
그게 말처럼 쉬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슬쩍 들어올렸다.
따로 준비해야 할 건 없으니까.
"가자, 메이아."
"알겠습니다, 마왕님."
부디, 즐거운 외출이 될 수 있기를.
***
북부의 마을은 뭔가 바바리안이나 바이킹 같은 사람들이 잔뜩 있을 줄 았았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평범한 사람들과 평범한 마을.
도끼를 팔거나 그러지는 않는구나.
아니면 무언가 여러모로 위협용으로 사용할 법한 연장이라던지.
"그런데, 뭔가 시선이 조금 몰라는구나."
"...불편하시다면 말을 해둘까요?"
"아니,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야 있겠느냐."
마을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검정색 머리카락은 생소해서?
어쩌면 임산부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우스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외모로 아이를 가졌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 테니 말이다.
"큼큼, 저기ㅡ"
"네, 네네! 말씀하세요!"
"과일은 얼마 정도 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일부러 말투를 바꿔서 물었다.
평상시에 쓰던 말투를 쓰면 뭔가 부담을 줄 것 같아서 그랬는데, 아무래도 메이아에게 부담인 듯 싶었다.
뭔가 엄청난걸 목격했다는 듯한 표정이랄까.
...그렇게 충격적이었어?
어색하게 웃으며 과일을 가리키니, 가게 주인이 허둥거리며 천천히 안내를 하기 시작했다.
"ㅡ그리고, 사과는 동화 열 닢이면 됩니다. 아무래도 북부라서 그런지 과일이 귀해서요."
"동화 열 닢이라..."
어라, 지금 생각하면 돈을 써본 적이 없구나.
수중에 돈이 있기는 했지만, 정작 뭘 사거나 한 기억이 없었다.
돈 같은 경우에도 엘리가 비상금이라며 억지로 쥐여준 거긴 하지만...
"3개 부탁드려요."
"넵!"
뭔가 기합이 바짝 들어간 가게 주인에게 돈을 건네고는 사과 세 개를 받아들었다.
"자, 드세요."
"...저 말씀이십니까?"
"네."
내 존댓말이 너무 어색하다는 듯 삐걱거리는 메이아에 살풋 웃어보였다.
귀여운 면도 있구나.
내가 저번에 에반젤린의 일반인 말투를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는 듯 싶었다.
아무튼, 사과를 받아든 메이아의 손길이 엄청나게 조심스러웠다.
뭔가 소중한 보물을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겨우 사과일 뿐인데 너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안녕히 계세요, 또 올게요."
"드, 들어가세요!"
친절하구나, 정말이지.
일상적인 친절에 조금이지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참으로 친절하구나. 내가 마족인걸 알아도 이 정도로 친절하다면 좋으련만."
"분명 그렇게 될 날이 올겁니다. 반드시."
그저 말뿐이라도 힘이 됐다.
아니, 메이아라면 분명 그렇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되면 좋겠네, 메이아."
방긋 웃으며 말하니 잠시 눈을 크게 뜬 메이아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소로 화답해줬다.
평화로운 한 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