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0 - 행복, 사랑, 그리고.(3)
분홍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동자.
얼핏 보면 두 사람은 친자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닮아있었다.
린의 머리에 있는 뿔만 아니었다면 분명 착각했겠지.
뭐, 사실 친자매처럼 지내고 있기는 했다.
두 사람 모두 에반젤린이 맡긴 서고에 상주하며 서로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건 뭐고 저건 뭐다.
린이 죽기 전ㅡ 용사 일행에 에밀리가 합류하기 전에는 서로 저렇게 지냈겠지.
"아리엘, 뭘 그리 멍하니 있는 거야? 이리 와."
"..."
그러다가 슬쩍 고개를 돌린 에밀리가 그대로 손을 쭉 뻗었다.
솔직히 당분간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부른다면 당연히 갈 수밖에 없겠지.
자그마한 손이 참 기꺼워, 최대한 힘을 줘서 꼭 잡았다.
에밀리가 아파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내 연약한 힘이 에밀리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앞으로는 이 근처에서 지내.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네가 좋아하는 여왕을 만나는 것도 이곳이 제일 빠르니까."
"...그렇니?"
"읏, 애 취급하지 말래도 계속 이러네..."
애 취급을 하는게 아니라 애정을 담아주는 거야.
이런 핑계를 대는 것도 있고, 에밀리도 말만 그렇게 하지 딱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좋으면서 저런다니까, 정말이지.
에밀리는 일종의ㅡ 뭐랄까 츤데레? 아무튼 그런 것이었다.
틱틱거린다기보다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 마음과는 반대되는 말을 한다는게 맞겠지만.
"어머니, 사실 에밀리도 좋아하고 있어요."
"스승님?!"
"부모님이 주는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하면서 자란 아이니, 분명 어색해서 그런 거겠죠."
"..."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마법사의 그것이었다.
에밀리의 치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밝히는구나.
물론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기에 딱히 놀라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서도.
"...그러는 스승님도ㅡ"
"어머니, 안아주세요."
"그래."
에밀리가 무어라 반박하려고 했지만, 린이 먼저 나에게 손을 뻗는 것이 먼저였다.
기꺼이 그래야지.
안아달라는 요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우리 린이 안아달라고 하는데 당연히 안아줘야지.
"스승님?!"
"저는 부모님께 사랑을 받고 자라지를 못해서, 어머니께 받는 사랑이 소중하답니다."
"..."
뭔가 자랑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외형 그대로의 행동을 보는 것 같아서 귀엽다고나 할까.
언제나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린이 이런 아이 같은 말을 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래, 나도 네가 주는 사랑이 참 소중하단다.
내 품에 몸을 파묻은 린의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나, 나도..."
"그래, 이리 오렴."
"저,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그냥 스승님도 그러시니까 그런 거지..."
"알고 있단다."
이게 바로 양손의 꽃이라는 걸까.
벚꽃 색의 머리카락이 둘이니, 어떻게 보자면 진짜 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
아직 봄은 아니었지만, 세계수의 근처에 가면 봄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따뜻했다.
그런 의미에서 에밀리와 린은 나에게 있어서 봄의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저건ㅡ"
"에밀리."
"...저 애는, 계속 저렇게 둘 거야?"
"뭐, 책을 읽고 있지 않느냐."
미코의 꼬리 다음으로 반응을 보인건 바로 그림책이었다.
과연 글자를 읽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을 보며 멍하니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 아이도 같이 안아들고 싶었지만 이미 품이 꽉 차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게 조금 안타까운 부분이었다.
에밀리나 린 중 한 명은 조금 양보했으면 좋겠다만ㅡ 양보할 리가 없겠지, 둘 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잠을 잘 안 자는 것 같던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그렇게 보이니?"
"응, 그렇게 보여. 눈 밑만 봐도 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안 잤다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겠는데?"
에밀리가 말했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말대로 나는 요 며칠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신의 장난인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악몽을 꾸고 있었으니까.
어떤 꿈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내가 자신의 손으로 린을 죽이는 꿈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꿈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되새긴다고 하는게 옳겠지.
"조금이라도 자. 악몽을 쫒는 향을 피워줄 테니까."
"마음만 받으마."
"마음만 받지 말고, 일단 자. 악몽을 꾸는 것 같으면 바로 깨워줄 테니까."
에밀리가 가져다 둔건지는 몰라도, 서고 안에는 침대가 있었다.
확실히 따로 방을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고에 잠자리를 두는 편이 더 좋겠지.
에밀리는 책 속에 파묻혀 자는 것을 좋아할 듯한 인상이니까 말이다.
조금 깐깐한 사서 같은 느낌?
외형이 어려서 조금 그런 느낌이 덜하기는 했지만서도.
"...그러면, 조금만 눈 좀 붙이마."
또 악몽을 꿀지도 몰랐지만, 에밀리와 린이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편히 잘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품 안에 안겨 있는 아이들을 내려두고 옆의 침대에 가서 누우니, 지금까지 제대로 자지 못했기에 생겨난 피로가 마구잡이로 몰려왔다.
조금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자.
. . .
"왜 저를 죽였어요?"
역시나.
피투성이가 된 채로 나를 올려다 보는 린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치 진짜 같이 생생한 모습.
아니, 진짜 있었던 일이 튀어나오는 거니까 진짜라고 할 수도 있으려나.
내 칼에 찔린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핏줄기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당신 같은게 내 어머니를 자칭하다가,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네요."
차라리 격한 감정 변화를 보여줬더라면.
그랬더라면 '저건 내가 알던 린이 아니야.' 같은 생각으로 도피할 수 있었겠지만ㅡ
이 빌어먹을 악몽은 저런 사소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재현을 시켜두었다.
담담하게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를 말하는 것 같은 말투.
"미안, 하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사과 뿐이었다.
과연 사죄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아니, 전혀.
아무리 눈앞에 있는 것이 악몽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 상대가 린이라고 한다면 나는 무조건 사죄해야만 했다.
그것이 나의 죄니까.
설사 내 몸 안에 칼날이 들어온다고 해도ㅡ
"어머니."
"...린?"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
눈앞의 린과 같지만, 훨씬 더 생기 있고 상냥한 음성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돌리니, 어두운 공간 속에 말끔한 차림의 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시도해볼걸 그랬네요."
"설마ㅡ"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린은 인간과 몽마의 혼혈.
그러니, 다른 존재의 꿈에 간섭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 내 생각이 맞다는 듯 싱긋 웃어보일 때면 깊은 안도감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만.
"지금은 뿔이 있으니까요. 비록 가까이 있어야만 가능한 간섭이지만ㅡ 저도 어디까지나 몽마니까."
"이렇게 도움을 받는구나."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니 부담 가지지 말아주세요. 저 때문에 생긴 악몽잖아요."
린은 이 악몽의 이유를 자기 자신에게 돌렸다.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했다.
대체 왜? 어째서?
너를 죽인 건 나였다.
그저 나의 욕심 때문에 그렇게 했다.
그런데 대체 왜ㅡ
"어머니가 저를 죽인 이유는, 저의 욕심 때문이었으니까요."
"..."
"저의 욕심으로 제 목숨을 연장하던 장신구로 약을 만들었고, 그것으로 인해 죽음에 가까워졌죠."
"..."
"그런 저의 죽음을 견딜 수 없어서, 어머니는 저를 죽이게 되신 거였고."
천천히 손이 뻗어졌다.
이번의 손은 피투성이가 아닌, 말끔한 채였다.
내 가슴 위에 얹어진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분명 꿈일 텐데 너무도 생생해서, 심장이 쾅쾅 뛰어댔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었어요."
"린."
"제가 걱정한 건 저의 죽음이 아닌, 저를 본인의 손으로 죽였을 때 겪으실 슬픔."
절망. 후회. 비탄.
그리고, 그것들로 인한 자살.
"어머니는 그것들을 전부 이겨내고, 결국 저를 다시 되살리셨잖아요?"
"...린."
"그것 만으로도 어머니는 더 이상 저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사과할 필요도, 후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답니다."
내 손을 집어올린 린이, 천천히 제 가슴 위로 내 손바닥을 꾹 가져다 댔다.
콩닥, 콩닥, 콩닥ㅡ
어린아이 특유의 조금 빠른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척추를 관통했다.
꿈인데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생명의 고동.
눈앞에 있는 것이 진짜라고 일러주는 가장 확실한 신호였다.
"저는 여기에 있어요."
말갛게 웃어보이는 린에, 결국 울음을 참지 못했다.
울면 안 되는데.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하는데, 정말이지ㅡ
'몹쓸 어른이네, 나도.'
결국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린의 품에 안겨 엉엉 우는 수밖에 없었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슬픔을 전부 쏟아내, 바닥으로 흘려보냈다.
린은 살아있어.
내 눈앞에, 멀쩡히 살아있어.
그러니까 조금은, 조금 정도는 안심해도 되는 걸까.
아주 조금만 잊어도 되는 걸까ㅡ
"잊어도 좋아요. 어머니가 겪은 그 일이, 다시금 스스로의 마음을 상처입히지 않게."
"..."
"당신이 상처 입으면, 제가 슬프니까."
툭, 하고 내 눈동자에서 떨어진 눈물이 린의 눈가를 적셨다.
그대로 눈꼬리를 타고 내려가는 물방울을 보니, 마치 린 또한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자식을 슬프게 만들 수는 없지.
눈물을 멈추고는 오히려 웃었다.
깨끗한 미소가 린의 눈동자에 담기는 것을 보며,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