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1 - 행복, 사랑, 그리고.(4)
린이 태어난 이후로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일이 많아졌다.
그동안 최대한 잊고 지냈다고는 해도, 무의식 중에 내가 린을 죽였다는 사실이 커다랗게 남아 있었던 것 같았다.
동시에 몸 상태도 훨씬 나아졌고.
더불어서 악몽을 꾸는 경우도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정확히 말하자면ㅡ
"이번에야 말로ㅡ"
"저리 꺼지세요, 쓰레기 같은 신."
"큭!"
내 꿈 속에 들어오는 여신을 린이 쫒아내주고 있다는게 맞겠지만.
한낱 필멸자가 감히 신을 막아?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도망치는데, 그만큼 추한 모습이 또 없었다.
저런 걸 보면서 계속 웃으면 안 되는데.
나중에 아이가 기억을 되찾았을때 내가 웃은 장면만 기억하면 어떻게 해.
"안녕히 주무셨어요."
"덕분에 잘 잤단다."
느릿느릿 말을 이어나가는 린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어째 악몽 쫒는 인형 같은 느낌이 되어버렸지만, 린은 그것보다 10억 배 정도는 좋았다.
일단 내 딸이라는 것에서부터 비교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지.
에밀리도 눈에 띄게 밝아진게, 린 한 명 덕분에 얼마나 많은 행복이 찾아온지 모르겠다.
똑똑.
"아리엘, 혹시 일어났어?"
"그래."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미는 아서에 눈을 깜빡였다.
내가 마음을 추스르는걸 기다리겠다며 요 며칠 동안 얼굴을 비추지 않던데, 아무래도 아서의 인내심이 먼저 바닥난 모양이었다.
걱정 가득한 표정과는 다르게 눈빛 만큼은 상상 이상으로 강렬했으니까 말이지.
뭐, 일단은... 그렇게 비 맞은 강아지처럼 있지 말고 들어오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네.
"몸은 이제 괜찮아?"
"그래. 훨씬 나아졌구나."
"마음은?"
"린 덕분에, 완전히 회복했다."
"그러면, 나는?"
"...너는ㅡ"
아서, 그렇지.
조금ㅡ 아주 조금 정도는 잊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아서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래,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아서가.
'...조금 양심 없는 생각이었나?'
속으로 쓴 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그 모습에 좋다며 달려드는 아서에 비죽 웃음이 튀어나왔다.
사람 모습을 한 강아지 같네.
주인이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나보다는 아서 쪽이겠지만서도.
...그런 취향은 아니지만.
"좋아진 모습 보니까 다행이네."
"나도 네가 웃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분 좋구나."
내가 아플 때의 아서는 언제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말이지.
아니면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거나.
그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더랬다.
"그러면, 화해의 키스?"
"화해라니, 싸운 적도 없지 않느냐."
"그러면, 사랑의 키스?"
"...느끼하기는, 푸흐."
하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아서의 체향과 온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린은 책에 시선을 보낸 채.
아무래도 나와 아서가 입술을 맞대는 장면 같은 건 별로 흥미가 없는 모양이었다.
"츄우ㅡ♥"
오랜만에 맞대는 입술은, 따뜻하다기보다는 뜨거웠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사랑의 열기.
온몸을 불사를듯 다가오는 애정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사랑해, 아서. 그 누구보다 사랑해.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그를 향한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참 로맨틱하다고 생각됐다.
"...신성한 도서관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데?!"
"에밀리."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ㅡ 내 것인지 아서의 것인지 모를 투명한 실을 슥, 하고 닦아냈다.
얼굴이 잔뜩 붉어진 채로 소리치는 에밀리는 누가 봐도 잔뜩 화난 것 같아 보였다.
그래, 일단은 진정하는 편이 좋겠지.
다른 아이들이 보고 있는데서 이상한 짓을 할 수는 없으니까.
물론 안에 든 건 알만큼 다 알고 있는 어른들이겠지만, 그래도.
"왜, 아리엘을 빼앗기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빠?"
"누, 누가!"
"그러면서 부정은 안 하고 있잖아, 에밀리."
"...아니, 거든!"
예전과 지금의 관계 변화 중 한 가지를 꼽자면 에밀리를 대하는 아서의 태도랄까.
언제나 에밀리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예전과는 다르게 지금의 아서는 에밀리에게 작은 장난을 치거나 할 정도가 되어 있었다.
설마 이게 진짜 성격이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아서가 다른 사람이 화내는 걸 보면서 심리적 쾌락을 얻는 그런 변태ㅡ 아니, 실례.
그런 쓰레기일 리가 없는데.
"그러면, 아리엘이랑 단 둘이 여행이라도 가야겠다. 한 10년 정도?"
"...안 돼.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야."
"엘리도 괜찮다고 했는데, 정상이 아니라는건 아리엘이 아프기를 바란다는 거야?"
"그, 그건! 그러니까! 평범한 마족들에 비해서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었어!"
아서가 무어라 말을 할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설마 내가 계속 곁에 있기를 바라는 걸까.
언젠가 내 안에 지팡이를 꽂아넣던 그 천재 마법사가 맞는 걸까, 정말이지.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변한다.
그 변화 속에서도 가장 극적인 것들 중 하나를 꼽는다면 분명 에밀리를 꼽을 수 있겠지.
"나, 나 버리고 안 갈거지?"
"...내가 너를 두고 어디를 가겠니, 응?"
이제는 반쯤 울기 직전의 표정이 되어버린 에밀리의 정수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울지 마려무나, 응? 원래 그렇게 잘 우는 아이가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옆에서 좋다고 키득거리는 아서의 옆구리를 쿡 찍어눌렀다.
애 울리기 직전으로 만들고는 뭐가 좋다고 웃어.
혀를 쯧쯧 차며 아서를 흘겨보다가 눈앞의 아이를 꼭 껴안았다.
"엄마..."
"그래, 그래. 어디 안 갈 테니까 울지 마렴."
애 취급 받는걸 싫어하는 에밀리였지만, 지금 만큼은 괜찮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가끔씩 아이처럼 굴 때가 있으니까 말이지.
아직 정신이 몸의 영향을 받는 것 같은 날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인 것 같았다.
린은 뭐, 워낙 어른스러운 아이라서 아이 같이 굴어도 그냥 어른이 애교를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마왕님, 식사를 준비 해왔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반 인간 반 마족인 린을 보며 메이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 했는데, 딱히 적대적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민하는 느낌이랄까.
마족과 인간 사이의 아이라면 분명 어느곳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갔을 거라며 고생 많이 했다며 다독여줄 정도였다.
역시 연장자라는 느낌.
일단은 내 쪽이 메이아보다 더 나이가 많을 것 같다는 추정이지만, 가지고 있는 기억은 옛날의 기억 조금과 18년 남짓한 추억 정도이니 일단은 훨씬 젊은 셈 치기로 했다.
"...예쁜 뿔이네요."
"감사합니다."
마족 같은 마족이 태어난 건 또 처음이기는 했다.
여신 같은 경우에는 나와 똑같이ㅡ 뿔도 날개도 꼬리도 없이 태어났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메이아는 유독 린을 볼 때마다 감정적으로 변하고는 했다.
마족의 아이가 인간들에게 계속해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증오를 가졌다고 했었지.
동시에 자신이 가진 아이를 강제로 빼앗기기까지 했으니까.
"...메이아 씨도, 아름다우세요."
말갛게 웃어보이는 미소에는 그 어떠한 사심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안에 담긴 것은 위로와 호의 뿐.
단지 그것 하나만으로도 얼음장 같은 무표정이 스르르 무너져 내릴 정도였다.
이 표정을 다른 인간들도 봐야 할 텐데.
그래야 마족들이 피와 살육을 즐기고, 제 아이까지 먹어치운다는 헛소문을 없애버릴 수 있을 터였다.
"어디를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지금은 나한테 집중하라구."
"미안하구나, 에밀리."
내 옷깃을 죽죽 잡아당기는 에밀리에 쓰게 웃었다.
오늘은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구나.
어쩌면 옆에 아서가 있어서 더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다.
에밀리는 똑똑했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서를 첫 번째에서 두 번째 순위로 만드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내 시선을 빼앗는다던지 하는 것들.
그 안에는 아서를 골려주겠다는 계산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매일마다 속고 있지만...'
아이의 어리광인데 대체 어떻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독차지 하겠다는 듯이 더더욱 품을 파고드는 에밀리를 꽉 껴안았다.
이렇게 되면 답답하게 만들어서 떨어지게 해야겠다.
물론 일부러 떨어뜨리려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
"..."
아서랑 단 둘이 있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아주 조금 정도는 있었으니까.
에밀리의 얼굴이 내 가슴에 묻혀 있는 틈을 타 시선을 마주하고는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 달래고 적당히 들어갈 테니까 미리 자리 잡아놓고 있어.
알겠어, 또 필요한 건?
최대한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곳으로. 길은 내가 알아서 찾으러 갈게.
응, 미리 준비하고 있을게.
"그러면 아리엘, 최대한 빨리와."
"...그럴 때는 천천히 오라는 말을 해야하지 않느냐? 보통 남자들은 아내 없이 혼자 있는걸 더 좋아할 텐데."
"나는 보통 남자가 아니잖아."
"그것도 그렇지."
단 한 마디에 순식간에 납득 해버렸다.
그랬지, 아서는 보통 남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특별한 남자잖아.
용사에, 잘생기고, 내 처음을 가져간ㅡ
원수 출신의 남편이었지.
'그래서 더 그런 걸지도.'
못해준 것 만큼, 못되게 군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에게 사랑을 주려고.
이미 다 용서한 입장에서는 너무 부담 가지지 않았으면 했지만, 사랑이라는 건 받아도 받아도 과하지 않은 것이라 무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냥 거절할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