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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55화 (255/342)

Chapter 255 - 희망.(1)

이번 아이는 느낌이 좋았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까 어감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느낌이 좋았다.

세계수가 한층 더 성장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숨을 쉬는 것이 꽤나 편해졌다.

아이가 뱃속에 들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가볍다고나 할까.

"부디 건강하게만 태어나다오."

볼록 튀어나온 배를 슥슥 쓰다듬었다.

언제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확실히 건강이 제일인 것 같았다.

내가 몸이 불편해서 그런가 더더욱 그런 감이 있었고.

"아리엘."

"여보."

"..."

그리고 한 가지 더 깨달은 사실이 있다면, 아서를 놀릴 때는 '여보'라고 부르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다는 점이었다.

부끄러워 한다고 할지, 부담스러워 한다고 할지.

싱긋 웃으며 그를 맞이하자, 아서 또한 미소로 화답해줬다.

요즘 들어 마음에 드는 점이 있다면 아서가 나와 함께 최대한 같이 있으려고 한다느 점일까.

"뭔가 느꼈어?"

"그냥, 뭔가 이번에는 느낌이 좋아서."

"...나와 같구나."

생각보다 더 마음이 잘 맞았다.

대체 어떤 아이가 태어나려고 하기에 나와 아서를 이렇게나 들뜨게 하는 걸까.

할리벨? 은 아서가 기뻐할 만한 접점이 없고...

어쩌면 그냥 그런 특성을 가진 아이가 뱃속에 들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마마, 이것 좀 드셔보세요."

"고맙구나, 레이나."

세계수는 이제 말 그대로 세계수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난 상태였다.

엄청나게 크구나.

손을 뻗어 세계수를 슬쩍 만지니 딱딱한 껍질의 감촉이 느껴졌다.

언제나 도와줘서 고맙구나.

음, 반말을 사용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뱃속에서 태어난건 맞으니까.

[별 말씀을요.]

"...어라?"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잘못 들었겠지.

귓가에 아른거리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빙긋 미소지었다.

엘프인 레이나도 못 듣는 소리를 내가 들을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레이나가 건네는 과일을 받아들고는 천천히 그 감촉을 느꼈다.

"녹색 사과구나."

"네."

아삭, 하는 소리와 함께 새콤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맛있다.

세계수의 근처에서 난 과일이라 그런지 엄청나게 맛있었다.

내 빈약한 표현력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나 할까.

"...옛날 일이 떠오르는구나."

"옛날 일이요?"

고개를 갸웃하는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앙증맞게 비죽 튀어나온 귀가 파닥파닥 흔들렸다.

마치 강아지가 주인을 반기는 것 같은 모습이어서, 괜히 더 손을 열심히 움직였다.

귀여워, 귀여워.

레이나는 여전히 내가 말한 '옛날 일'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 같았다.

"...그냥, 엘리가 사준 사과의 맛이 떠올려서 그랬단다."

녹색 사과.

그걸 보면서 네 얼굴을 떠올리고는 했었지.

그리고 네 무덤 위에ㅡ

...읏.

"마마?"

"...미안하구나. 조금 나쁜 생각을 해버려서."

걱정이 가득 담긴 녹색 눈동자를 살짝 피해냈다.

상대가 용서를 하고, 지금은 다시 살아났다고 해도 그 모든 것들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잊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잊는다고 전부 끝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건 이제 그만두자.

"엘리가 예전에 녹색 사과를 사줬던 적이 있었거든."

"그걸 보면서 저를 떠올렸었어요?"

"그래."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눈치 빠른 레이나니까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이 감정을 끝까지 가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아이들에 집중하자.

지나간건 지나간 걸로.

그렇게 떠나보내는 편이 좋을 테니까.

"아, 맞다. 아기에게 축복을 걸어드릴게요."

"축복?"

"물론 세계수 님의 기운을 빌리는 것이기는 하지만요."

아이가 살짝 손을 뻗자, 뱃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슬슬 스며들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몸으로 느낄 수는 있으니까ㅡ

으응, 뭔가 겨울철에 핫팻을 옷 안쪽으로 집어넣는 것 같은 느낌.

축복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친근한 무언가였다.

"으응, 고맙구나."

"어떤 느낌이야?"

"따뜻한 뭔가가 뱃속으로 들어온 느낌?"

이렇게 말해도 아서는 이해하지 못하려나.

음, 이러면 느껴질지도.

손을 뻗어서 아서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바로 내 배 위에 손을 올리자 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따뜻한 뭔가가 들어왔다는게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

툭.

"!"

"...움직였다."

"아무래도 아빠가 반가운 모양이구나."

아이의 태동.

힘이 조금 약한 것을 보니 그렇게까지 활발한 아이는 아닌 듯 싶었다.

...음, 아닌가? 발길질을 했으니까 활발한 편인 걸까?

후후 웃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이번에는, 예감이 상당히 좋았다.

***

"안냐하세여, 마앙님!"

"으, 으응 그래..."

슬쩍 눈치를 주자, 메이아가 어깨를 움츠렸다.

엄청나게 작아.

크기로만 따지면 에밀리는 커녕 린의 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게 아닐까.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쭈그려 앉았다.

뱃속의 아기 때문에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쭈그려 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왕님이 아니라, 아리엘이라고 불러주려무나."

"아리엘!"

"그래."

마족 아이는 아니었다.

인간의 아이.

옆에서 속삭이는 메이아의 말에 따르면, 근처에서 길을 잃은 인간 아이라고 했다.

인간 아이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있나?

음, 하고 바라보다가 해맑은 미소 한 번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내가 낳은 아이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구나.'

제일 비슷한 느낌을 찾아보라면 마키나 정도.

아이 특유의 순수함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그, 엉니라고 불러도 대여? 마마가 이쁜 사람은 다 엉니라고 해써요!"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하려무나."

마족과 인간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지금은 힘들지도 모르지만, 아이들과 함께 바꿔나간다면 분명 좋아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조막만한 손을 슬쩍 잡아들며 그 위에 슬며시 입을 맞췄다.

잘 부탁해, 아가.

부디 우리들과 잘 지내다오.

"카나!"

"마마!"

저 멀리에서 뛰어오는 모습을 보며 어째서 아이가 여기에 있는지 납득했다.

입고 있는 옷ㅡ 사용인의 옷을 보면 아무래도 이곳에서 일하는 인간의 딸아이인 듯 싶었다.

점점 다가올수록 표정이 굳어지는데, 조금이지만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괜히 미안하구나.

"죄, 죄송합니다! 저희 아이가 무언가 실례되는 일이라도ㅡ"

"괜찮으니까 너무 당황하지 말거라. 어떠한 실례도 되지 않았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다행히 메이아에게로 시선이 가지는 않았다.

만약 메이아에게 시선이 갔다면 내 정체가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겠지.

...어딘가의 높으신 분 취급을 받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왕이라며 혐오 받는 쪽이 더 나으려나.

뒤로 조금씩 물러서는 메이아의 팔을 붙잡고는 멈춰 세웠다.

"도망치지 말거라. 그게 나를 위한 배려라면 더더욱."

"...네, 마왕님."

"...마왕?"

미움을 사서 받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내가 마왕이라는ㅡ 마왕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 중 마족을 증오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증오를 받아들일 터였다.

인간들이 마족을, 마족들이 인간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그날까지.

고개를 숙인 채가 아닌 내 눈을 바라보는 상대에 시선을 피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당신이, 마왕인가요?"

"...그래."

몰래 마른침을 삼켰다.

티가 났으려나?

아니면, 안 났으려나.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고동색 시선에 절로 고개를 떨굴 것만 같았다.

언제였더라.

이렇게 처음 보는 인간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설령 뺨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견뎌야 해.'

나름의 각오는 마쳤다.

아니, 각오를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도망치고도 남았을 터였다.

이제 남은 건 그 한 마디.

나를 향해 쏟아질 뾰족한 한 마디ㅡ

"참, 마왕 같지 않으신 분이네요."

"...아."

"당신 같은 사람이 사람을 해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나는ㅡ"

ㅡ내가, 마왕이야.

전부 내가 잘못한 일이야.

너희들이 고통 받게 된 건, 전부 여신과의 악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너무 미움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

"세상에는 상처를 증오로 덮어내는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상대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상처를 증오로 덮어내지 않은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가자, 카나."

"응, 마마!"

그 말을 끝으로, 여인과 아이는 떠나갔다.

나는 내 가슴께를 꾹 붙잡은 채로 한참 동안 눈물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믿음이 부족했던건 나였을지도 모르겠네.

분명 울 것 같았는데, 입으로는 행복한 미소가 터져나왔다.

...조금, 좋은 기분이었다.

"마왕님."

"...메이아."

"...아무래도, 제가 지금까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메이아의 목소리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 해준다는 형편 좋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필요한건 증오를 받아들일 준비가 아닌 마족들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을까.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네. "

마주잡았던 손의 감촉을 되새기며 발걸음을 돌렸다.

언젠가는 서로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자그마한 바램이었다.

어쩌면 곧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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