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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56화 (256/342)

Chapter 256 - 희망.(2)

"아리엘, 괜찮아? 왜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어, 응? 으응, 미안해, 아서."

"너 답지 않네."

옆에서 들려오는 아서의 목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더라.

손에 들려있는 이삭을 훅, 하고 휘두르자 그 끄트머리에 달려 있던 낱알들이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저것들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나중에는 분명 잎사귀를 피워내겠지.

"돌아가자."

"그래."

언제나와 같은 일상이었다.

언제나와 같은 일상.

언제나와 같이 아서와 함께하는 일상ㅡ

그러니까, 언제부터였더라.

'나의 귀여운 마왕님, 당신에게는 아직 고통이 부족하신 것 같네요.'

"...어라."

방금,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었나?

잠시 뒤를 돌아봤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살랑살랑 흘러가는 황금비 바다만이 그곳에 있을 뿐이였지.

그런 나를 의뭉스럽게 바라보는 아서의 시선이 조금 따가워, 살짝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어야만 해.

아무것도 아니어야, 지금 이 행복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을 테니까.

더 이상은ㅡ

'아프고 싶지 않아.'

고통받고 싶지 않아.

그저, 행복하고 싶어.

마왕도, 마족도, 인간도, 마신도ㅡ 그 무엇도 알지 못하는 상태로 계속해서, 계속해서 지내고 싶어.

그냥 아리엘로써.

"그렇군."

"..."

"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억하게 된 건가?"

"...당신."

아서가 있던 자리에 나타난 검은 여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칠흑과도 같은 머리카락에, 황금빛의 보리수를 닮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

단순히 그녀의 등장으로도 놀랄 수 있었지만, 스스로가 더더욱 놀란건 그녀를 마주함과 동시에 느껴진 동질감 때문이었다.

처음 보는게 분명한데도 느껴지는 이 떨림은 대체...

"수 많은 세계를 경험하면서, 조금씩 기억이 덧씌워진 것이로구나. 어쩌면 되찾은 걸지도 모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요, 대체?"

한 걸음 다가오는 마왕에 마찬가지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아니, 잠깐. 마왕이라고?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이?

하지만 머리 위에 뿔이 달리거나, 등 뒤에 날개가 달리거나, 꼬리가 달리지도 않았잖아.

그런데 나는 왜 이 사람을 마왕이라고 생각했지?

"아리엘."

"..."

"아가."

"...다가오지 마세요."

여기서 끝낼 수는 없었다.

무엇을?

머릿속에서 계속, 계속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만, 그만, 그만!

나를 괴롭히지마.

나는 여기에 있고 싶어.

깨어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나는ㅡ

"아가."

"..."

"아가."

"...네."

하지만 그 간절한 목소리에, 그리고 애뜻한 눈빛에 더 이상 물러설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내가 겁먹은 모습을 보며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다 끝났어."

다 끝났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건, 그 말을 듣고 처음 떠올린 감정이 절망이 아닌 안도라는 것이었다.

어째서 안도했을까.

분명 다 끝이라고 한다면, 이제 영원히 고통받을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일 텐데 대체 왜ㅡ

"마신을 쓰러뜨렸단다."

"에?"

나지막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데요?!

마치 물을 뿌려놓은 수채화처럼 순식간에 흐려지는 풍경에 입을 뻐끔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어두워져, 마치 물 속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릴 뿐이었지.

***

"...아리엘, 괜찮아?"

"그래."

갑자기 깨어난 내 모습에, 걱정이 가득 담긴 아서의 눈길이 내려꽂혔다.

악몽을 꿔서 깬게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절대 악몽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분 좋다고 한다면 기분 좋은 꿈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

"...어쩌면, 태몽일지도 모르겠구나."

"태몽?"

"그래, 태몽. 솔직히 말하자면 이 아이도 슬슬 깨어날 때가 되지 않았느냐."

이제 완전히 불러온 배를 슥슥 쓰다듬으며 싱긋 웃어보였다.

뱃속에 아이가 들어차 있어서 움직이는게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제외한다면 딱히 어딘가가 아프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느낌이 좋아.

이번 아이는 특히 더 느낌이 좋아.

"이름은 뭘로 지을까?"

"...아리엘 2세?"

"푸하, 방금건 조금 웃겼어."

큭큭 웃으며 내 정수리를 쓰다듬는 아서에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그만큼 느낌이 좋다는 뜻이야, 이 바보야.

한 편의 로맨스 코미디물을 찍고 있는 우리들이 눈꼴 시렵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만 아니었다면 분명 이런 대화를 몇분이고 더 나누었을 터였다.

정말이지, 나를 너무 좋아한다니까.

"왜 그렇게 봐? 딱히 너 때문에 있는 건 아니거든?"

"당연히 아리엘 때문에 여기 있는 건 알고 있어, 에밀리. 그런데 설마 서고의 관리를 전부 린에게 내팽겨치고 온 건 아니지?"

"...아기만 태어나면 다시 돌아갈 거야."

히죽히죽 웃어대는 아서에 에밀리가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내가 아이를 낳을 때마다 다들 걱정이구나.

특히 저번에 여신을 낳았을 때는 다들 엄청 심각했었더랬지.

그때의 내 상태가 어땠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충분히 떠올랐으니까.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역시 에밀리 밖에 없어."

"...걱정은 다른 녀석들도 다 하고 있을걸? 티를 안 내서 그렇지."

투덜거리는 듯한 목소리 안에는 나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게 진짜 가족이라는 느낌이겠지.

특유의 따스함이 느껴지는 일상.

모두가 물 흘러가듯이 살아가고, 다치지 않고, 싸우지 않는 그런ㅡ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

"자, 잠깐만요!"

내 주변을 꽉 채우는 목소리들과 함께 부들부들한 털뭉치들이 잔뜩 달라붙었다.

고양이들과 여우 하나.

미코는 이제 아이들을 말리는걸 포기했는지 저 멀리에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귀도 꼬리도 축 늘어진게 참 안쓰러워 보이네.

좋아, 다가오면 마구 쓰다듬어 주도록 할까.

"에이잇! 대체 왜 나만 보면 그렇게 쓰다듬으려고 하는 게냐!"

"귀여워서?"

"그으ㅡ 아니, 그것보다는! 이 녀석이나 조금 치워보거라! 오늘 아침부터 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황금빛의 탐스러운 꼬리가 내 앞으로 주욱 내밀어지자, 그 꼬리에 꼭 달라붙어 있는 아이가 눈에 띄었다.

미코의 꼬리가 참 마음에 들어나 보구나.

뱃속의 아기가 커지면서 아이를 맡길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 다음으로 좋아하는 미코가 좋을 것 같아서 맡겨놓았는데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어서 다행이야.

물론 매일마다 보기는 했지만서도.

"자자, 너무 소란 피우지 마세요. 계속 시끄럽게 굴다가는 세계수 님이 떽, 할지도 모른다구요?"

레이나의 말과 함께 세계수의 가지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뭔가 레이나가 말하니까 거짓말 같지가 않은데.

세계수가 혼을 내는 건 가지로 후려친다는 뜻일까?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은 느낌이었다.

뭐, 아이들에게는 잘 먹혔는지 주변이 조용해졌지만서도.

"그나저나, 괜찮으시겠어요? 아이를 낳는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드려도."

"...나는 다른 아이들이 놀라는게 더 걱정인데 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딱히 놀라거나 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마마."

그렇구나.

응, 그렇네.

조금 더 묵직해진 배에 잠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뭔가 복부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 같은게, 아무래도 곧 있으면 파수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달까ㅡ

"읏..."

"아리엘, 조심해서 눕자."

"...이제는 별로 당황하지 않는구나."

익숙한 손길로 나를 눕히는 아서에 절로 기특함이 차올랐다.

이걸로 아서도 베테랑 아빠인 건가! 같은 느낌으로.

아무튼, 그렇게 자리를 잡고 눕자 그런 내 곁으로 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았다.

구경거리로 삼기에는 별로 좋은 광경이 아닐 텐데.

'...이렇게 되니까 조금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아기를 낳아본 적은 있었지만, 이정도까지 많은 사람들은 또 처음이었다.

너무 뚫어져라 바라보지만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무언가 커다랗고 부드러워보이는 천을 펼쳐내는 에밀리라던지, 아기를 받을 준비를 하는 레이나라던지ㅡ

"아우으..."

"아리엘?"

"아,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진지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진지해질 수가 없었다.

뭘까, 이 수치심은.

원래 이 정도로 부끄러워 하지는 않았는데 대체 왜?

뭔가 뱃속의 아기와 하나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 겉으로는 태연하면서 부끄러움을 잘 탄단 말이지.

'...어라.'

방금, 뭐라고?

"흣?!"

하지만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배를 짓누르는 것 같은 압박과 함께 파수가 시작되고, 동시에 옆에 내빌어져 있는 아서의 손을 꽉 붙잡았다.

나온다.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축축한 양수의 느낌이 너무도 선명했다.

"...아파?"

"으응, 크게 아프지는 않구나. 으윽..."

반사적으로 배에 힘을 꽉 쭸다.

정신이 붙어있을 때 있는 힘껏 힘을 줘야 아기도 나도 안전할 수 있겠지.

이 정도 고통 정도는 크게 아프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다니, 뭔가 출산 마스터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출산 마스터라니, 조금 어감이 이상한걸.

"흐, 으으으읏...!!"

"조금만, 조금만 더!"

내 다리 아래에서 열심히 응원하는 에밀리의 목소리에 더더욱 힘을 줬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ㅡ

"흐아아아아앙!!"

"...흐으, 흐아, 흐으......"

드디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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