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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59화 (259/342)

Chapter 259 - 아리엘.(2)

다른 사람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

만약 그것이 3인칭이었으면 조금 덜 생생했을까.

제 3자의 입장으로, 지독한 연극을 보는 느낌으로 봤다면 덜 원망했을까.

욱씬거리는 아랫배를 움켜쥐며, 엘리야가 수면 아래로 제 입을 집어넣었다.

'사려, 사려져... 이제, 지짜, 쥬거버려어...'

다른 누군가가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건, 그 기억 속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를ㅡ 아리엘을 억지로 범하며 더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용사.

아니, 아서.

눈을 꾹 감고는 수면 아래로 들어가, 딱 열까지 세어낸 다음 다시금 고개를 수면 위로 치켜올린다.

"푸흐, 흐아..."

환상통이라고 치부하기에는 흔적이 남았고, 진짜 겪은 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먼 일.

퉁퉁 불어있는 아랫배를 슬쩍 손으로 쓸어내리니 알싸한 고통이 느껴졌다.

겨우 기억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직접 겪은 당사자는 얼마나 더 고통스러웠을까.

시선을 돌려 아리엘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로, 그 안에는 짙은 미안함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리엘 씨."

"...그래."

"안 되겠어요."

결심은 빨랐다.

결단은 신속했다.

결론은, 내려졌다.

잔뜩 지쳤음에도 눈에는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건 하나의 선언과 마찬가지였다.

증오하는 것이 힘들어 용서를 택한 그녀를 위한 하나의 추모와도 같았다.

"저는, 아서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아요."

"..."

"그 더럽고 비열한 짓거리들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를 않아요... 저는, 저는 당신이 어떻게 그 녀석을 용서했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아요."

반쯤 우는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도 싫잖아.

내가 싫은 만큼, 당신은 더 싫었을 거잖아.

하지만 그런 자신의 외침에도 아리엘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울지 못해 웃는 느낌의 미소.

전부 다 알고 있음에도 애써 외면하려는, 그런 처참한 미소.

"아직도 아프시잖아요."

"..."

아직도 고통스럽겠지.

아직도 무섭겠지.

그래서 그렇게 아이들에게 집착하고, 마족들이 죽인 인간들을 전부 낳겠다고 하는 것이겠지.

감정이 격해지면 격해질수록 내가 잊고 있었던ㅡ 아니, 가지지 못했던 기억들이 차츰차츰 떠오르기 시작했다.

지금은 분명 깨어있는데도 점점 선명해져, 그와 동시에 분노 또한 엉망으로ㅡ

엉망으로.

"그 자식을, 죽여버리고 싶어요."

"...엘리야!"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욕탕의 벽을 통해 작은 진동이 퍼져나갔다.

있는 힘껏 휘두른 주먹에는 깊은 상처가 새겨져,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해.

몸을 타고 흐르는 고통을 잊어버리기에는, 한참이고ㅡ

"제발, 제발 그만..."

"..."

"나는, 나는 괜찮으니까 제발 이제 그만 둬다오..."

"싫어요."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지금의 정신으로는 그 누가 말해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작게 실소를 토해내며 코앞까지 다가온 아리엘 씨를 꼭 껴안았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동시에 말랐고, 흉터가 많았다.

"예쁜 몸인데, 이렇게나 흉터가..."

"...그건."

전부 그 녀석이 한 짓이겠지. 그리고 그 동료들과 함께.

천천히 손을 뻗어, 몸에 그려진 화상 자국을 쓸어내렸다.

아팠겠지?

그리고 비명을 질렀겠지?

살려달라고 울고, 외쳐서야 겨우 그만두고서는 그녀를 비웃었을 터였다.

아아, 그래.

분명 그랬을 거야.

"대체 용사라는게 뭐라고. 마왕이란게 뭐라고 이런 짓을 한 걸까요."

"그냥, 그 때의 우리는 서로 엇나가 있었을 뿐이니까."

"겨우 엇나갔다는 말로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아리엘 씨."

미쳐있었다, 라고 보는 편이 옳겠지.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미쳐있던 걸까.

나와 마을 사람들을 위한 복수 때문에?

아니면 마왕을 향한 증오심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지금까지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추모 때문이었나?

"..."

아리엘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가장 불편한 사실을 꽁꽁 감추려는 피해자처럼, 그렇게.

분명 내가 놓치고 있는게 있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서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한 건가요?"

"그건! 그건..."

한 순간이지만 상대의 황금빛 눈동자에 망설임이 어렸다.

아서를 변호하고 싶다는 마음과, 다른 무언가를 감추고 싶다는 마음이 충돌한 끝에 일어난 망설임.

나는 바로 그것을 알고 싶었다.

너무 과한 간섭이라고 해도, 나는 그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래야만ㅡ

'내가 조금이라도 아서를 용서할 생각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그를 용서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서가 저지른 죄는 그 어떠한 변명이나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절대 용서받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그럼에도, 만에 하나라도 용서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만약 끝을 볼 때까지 자신이 용서하지 못하더라도, 자그마한 변명거리 하나 정도는 마련할 수 있다면.

그렇게 된다면, 내가 기억하고 겪었던 아서가 아주 약간 정도는 남아있었다며 안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말해줄 수 없겠구나."

"어째서인데요? 저는 지금, 아서를 변호할 기회를 주고 있는 거라구요?"

"마음은 고맙지만, 아서에게는 변호가 필요 없어. 그 또한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니까."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장님보다 더 시야가 좁아진다고 했던가.

눈 앞의 존재는 이미 아서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서 제 상처를 외면하고 있는 채였다.

봐,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형편 없이 떨려오는 몸을.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피부가 수십 배는 더 창백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또 다른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가 된 피해자가 아니라요?"

"..."

"아서는ㅡ 그 자식은, 쓰레기 새끼예요."

씹어 뱉듯이 토해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아서에 대해서 이 정도로 분노를 토해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전혀.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신이 겪었던 아서와 지금의 아서는 완전히 별개의 인물이라고 봐도 될 터였다.

그리고 그건 현재의 아서를 향한 더 큰 증오를 불태우는데 영향을 주게 되겠지.

반드시.

"당신이 용서해도, 저는 용서 못해요."

"..."

"당신은 나고, 나는 당신이니까. 같은 아리엘이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절대로 용서 못해요."

만약 자신의 최후가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그저 목이 허공을 날거나 사지가 찢겨 죽은 것이었다면 달랐을까.

그랬다면, 나는 아서가 벌인 짓들을 어렵게라도 용서할 수 있었을까?

전부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이미 사고가 난 뒤에 '아, 이랬더라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더더욱 의미 없는 생각이었다.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욱씬, 하고 팔이 아파왔다.

이번에는 골절.

헛웃음을 지으며 아리엘 씨를 바라보자,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가 경악을 머금고는 동그랗게 떠져있었다.

"이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에 정당성을 부여해줄 테니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지만,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모든 것은, 불쌍한 당신을 위해.

***

아이가 차라리 기억만 떠올렸다면 달랐을까.

아니, 분명 다르지 않았겠지.

아이의 몸에 내가 겪었던 일들이 새겨진 건 그저 부가적인 것에 불과할 뿐이었다.

엘리야가 아서를 믿고, 기다리고, 그리워했던 만큼 그 배신감도 컸겠지.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감정이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를 향한 증오로 반전될 정도로.

'...그 모든 것들이, 여신의 탓이었다고 말하지 못했어.'

변명을 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아서가 나를 강제로 범한 건, 전부 다 여신이 내린 저주 때문이었노라고.

그 저주 때문에 그런 짓들을 한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아서를 향한 분노나 증오가 다시금 발화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ㅡ

"...아가, 이리 오렴."

"..."

나와 닮은 아이를 품 안에 꼭 껴안았다.

만약 엘리야가 내 변명을 들어서, 만에 하나라도 그 증오의 화살을 여신에게로 돌리는 편이 더 나았을까?

그렇지만 이렇게 여신 또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 아이가 알게 된다면?

그 편이 훨씬 더 위험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또 다른 아이를 죽이려고 한다고?

그런 것 따위를 보느니 차라리 내가ㅡ

"윽..."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자. 진정, 진정하는 거야.'

나보다 조금 더 뜻한 체온을 가진 아이를 꼭 껴안아, 천천히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냥 붙잡을걸.

나에게서 멀어지는 그 아이를 붙잡은 다음 어떻게든 진정시켜야만 했었는데.

그 자그마한 몸에 새겨지는 흔적들을 눈에 담자마자 끔찍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아이를 붙잡을 겨를이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채.

"일단 메이아에게 말을 해두기는 했지만..."

심장이 쾅쾅, 하고 뛰었다.

무언가 사고라도 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다치기라도 했으면?

아무리 같은 존재라고는 해도ㅡ 아니, 오히려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이 됐다.

어떻게 보자면 피가 이어진 가족보다도 훨씬 더 가까운 아이였으니.

"아리엘 씨!"

"...엘리?"

그리고 그런 내 불안감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분명 이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을 텐데.

어째서, 나만, 이렇게ㅡ

이렇게나, 불행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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