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0 - 아리엘.(3)
에밀리가 혼자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이 경우라면 서고에서 린과 함께 대화를 나누거나 책을 읽거나 했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오늘은, 린이 아이를 돌보는 차례였으니까.
내가 아리엘에게 신경 쓰고 있는 사이 에밀리, 린, 미코 세 사람이 번갈아가며 아이를 돌봤는데, 하필 오늘이 딱 린이 아이를 돌보는 날이었다.
"에밀리!!!"
"...아, 흐... 늦었, 잖아..."
붉은색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것들이 전부 자그마한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양이었다.
대체, 대체 누가.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야?
"아가, 정신 차리려무나. 아가, 아가!"
"아리엘 씨, 지금은 일단 세계수로 옮기는게 우선이에요. 어서!"
"...그래."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를 껴안아, 그대로 달음박질을 쳤다.
살아있어.
아직 죽은게 아니야.
숨을 쉬고 있으니까, 아직 끝난게 아니야!
연약한 몸뚱이가 내는 속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어서, 어서, 어서!
'제발, 제발 늦지 않게 해주세요...'
하늘 위에 누군가가 있다면, 설령 지하 밑에 쳐박혀 있다고 하더라도 이대로 끝나게 두어서는 안 됐다.
지금까지의 불행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또 있을 수가 있다고?
거짓말 하지마.
숨이 차올라서 목이 조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레이나!!"
"마마?"
겨우겨우 세계수 밑에 도착해서는 소리 높에 레이나를 불러댔다.
세계수의 곁을 떠나지 않는 레이나답게 내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모습을 드러냈지만ㅡ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에밀리가, 에밀리가 이렇게..."
"...일단, 이쪽으로."
피투성이가 된 에밀리를 본 레이나가 짐짓 심각해진 얼굴로 자리를 안내했다.
세계수의 중앙.
그곳에 뚫려있는 자그마한 구멍.
어른은 몰라도 아이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분명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조금은 진정하세요, 네?"
"...그래."
심호흡, 심호흡, 심호흡.
하아, 흐으, 후우...
외모적인 것 중에서 색으로만 따지자면 에밀리는 린과 꽤나 닮아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금 전의 광경을 상상하면 상상할수록ㅡ
"우윽..."
내 손으로 린을 찌른 그 순간이 떠올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분명 용서받고, 전부 잊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아아, 그래.
잊은게 아니라 떠올리지 않고 있던 거였지.
이러면 아이를 혼자 둔 내 잘못인 것 같잖아.
"아리엘 씨."
"엘리."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창백하신데..."
괜찮다,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괜찮지 않았으니까.
몸이 으슬으슬 떨려올 정도로 오한이 들었음에도, 엘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에밀리잖아.
네 동료이자 친구인 에밀리ㅡ
'아니,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자. 엘리는 그저, 부상 입은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런 것일 뿐이니까.'
갑작스러운 상황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냥 미쳐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원래 미쳐있었는데 덮어두었던 것이 튀어나온 걸지도 모르지.
세계수의 안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생명이 내 숨통을 잔뜩 움켜쥐어 왔다.
'내 손으로 죽인다면, 에밀리는 다시 살아날 수 있어.'
혹여 잘못되기 전에 내 손으로 죽인다면 분명ㅡ
"아리엘 씨."
"..."
"잘못된 선택은 하지 마세요. 더 이상 아리엘 씨의 손을 더럽히지 않으셔도 되니까요."
천천히 뻗어진 손이 그대로 내 손을 움켜쥐었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부드러운 손길.
덜덜 경련하던 손이 엘리의 온기에 맞춰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래, 아이를 죽이는 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니까.
"범인은, 찾았나?"
"..."
허울 뿐인 질문이기는 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대충 예상이 가기는 했으니까.
엘리야, 그 아이가 분명 에밀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다음 즉시 복수하러 간 것이겠지.
하필이면, 린이 없는 순간에.
"종종그런 생각이 들고는 하더구나."
"..."
"전부 다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모두가 나를 거치는 순간 망가져 버린다.
물론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을 때도 있었지만,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마왕과 마족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되어버려서 가볍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가벼워질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 보니 더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 대체 언제일까.
1년 뒤? 10년 뒤? 그것도 아니라면, 100년?
까마득한 미래까지 상상하기에는 내 기억의 총량이 너무나도 적었다.
"차라리 기억을 전부 되찾는다면, 더 편할지도 몰랐을 텐데."
마왕으로써 살아오던 기억이 있었더라면, 한참 후의 미래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넘어갈 수 있었을 터였다.
무릎을 꾹 껴안고는 그 위에 턱을 올려두었다.
이렇게나 우울할 때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숨을 들이쉴 때마다 검고 칙칙한 감정이 확확 불타올랐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슬퍼서 죽어버릴 것 같아.
"마마,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고맙구나, 레이나."
"저는 딱히 한게 없어요. 세계수 님이 전부 해주셨지."
레이나의 말대로, 에밀리의 표정은 처음보다 훨씬 더 좋아진 채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조금 전까지 숨을 참고 있었나, 한숨을 토해내니 폐 안으로 따뜻한 공기가 주욱 빨려들어갔다.
만약 에밀리가 잘못됐더라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
'전혀.'
분명 에밀리를 저렇게 만든 범인에게 증오를 쏟아내다가, 결국은 스스로를 상처입혔을 터였다.
오히려 여기까지 와버리면 차라리 에밀리를 저렇게 만든 사람이 엘리야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엘리야가 아니라면, 그 증오를 완전하게 풀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아이가 상처입은 만큼 그 댓가를ㅡ
"마마."
"...레이나."
하지만 그 눈동자와 마주치면 힘이 빠져버리고 만다.
생각해 아리엘.
지금 네가 가지게 된 것들을 생각해.
그것들을 가지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품에 안았는지 전부 떠올리란 말이야.
내가 지금 복수한다는 마음을 가진다면, 엘리야의 상황과 다를게 뭘까.
에밀리를 상처 입힌 존재를 향한 증오는, 아서를 향한 엘리야의 증오를 정당화 시킬 뿐이었다.
"일단, 엘리야를 찾아야할 것 같구나."
"세계수 님의 범위 내는 제가 전부 찾아낼 수 있어요."
발 밑에 자라있는 풀이 살랑거리며 내 다리를 톡톡 두드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마치 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처럼 역동적으로.
어라, 그러니까 이게ㅡ
"히얏?!"
"앗, 죄송해요!"
"까, 깜짝이야..."
순간이지만, 말투가 무너졌다.
이 세계가 소위 말하는 판타지ㅡ 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느낌의 움직임은 또 처음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풀이 이렇게나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보기 힘들지, 응.
미안하다는 듯 내 발목을 슥슥 쓰다듬는 풀에 천천히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너무 과하게 놀라서 미안하구나.
"세계수 근처에 있는 풀들은 전부 이런 느낌이니?"
"세계수 님의 손이자 발이라고 볼 수도 있죠."
그렇다면 저기 끄트머리, 북부의 찬 공기가 나오기 직전까지가 세계수의 범위라는 뜻이겠구나.
새삼스럽지만 세계수가 왜 세계수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세계수가 진짜 이 세계의 신이 아닐까?
여신처럼 시끄럽지도 않고, 시비를 걸지도 않고, 자비롭고,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고.
왜 엘프들이 세계수를 신으로 모시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어라."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
바람에 스쳐지나가듯 흘러나온 목소리에 다시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번에 들었던게 환청이 아니었나?
물론 목소리만 듣고 딱 떠오르는 얼굴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누구인지 알 것 같은 느낌.
음,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세계수 밖에 없잖아, 이건.
...세계수가 말을 한다는 건 들어본 적 없었지만서도.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거라, 알겠지?"
"네. 대신, 절대 혼자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엘리의 당부 아닌 당부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하려는 건, 혹시라도 벌어질 갈등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 범인이 엘리야라면 다른 이들이 엘리야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내 선에서 해결하는 편이 맞겠지.
"아니다. 그냥 제가 옆에서 같이 다닐게요."
"일이 있지 않느냐. 나 때문에 굳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필요는ㅡ"
"저한테 있어서는, 아리엘 씨의 일이 가장 중요해요."
"..."
딱 잘라 말하는 목소리에는 기묘한 열기가 가득 차있었다.
어, 응, 그렇구나.
그렇게까지 이야기 한다면 어쩔 수 없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조금 전까지 진지하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 오늘은 아리엘 씨랑 단 둘이 데이트네요~"
"데이트, 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에밀리 씨, 듣고 있어요? 당신이 거기에 누워 있을 동안 당신의 '마마'를 제가 독차지 할거라구요?"
...뭔가 에밀리의 표정이 안 좋아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일단 엘리가 에밀리의 신경을 더 돋구기 전에 서둘러 팔을 잡아끌었다.
심각했던 처음 상황과는 다르게, 약간 풀린 분위기에서 탐색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