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1 - 아리엘.(4)
의심 따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만약 범인이 엘리야라고 했을 때 그 아이가 다음으로 노릴 사람은 누구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바로 떠오르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아서.
내 기억 안에서 나에게 가장 심한 짓을 한 존재.
하지만 그녀가 아서에게 무언가 손을 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아무리 두 사람이 소꿉친구의 관계에 있다고는 해도 아서는 어디까지나 용사.
살의를 가지고 접근한다면 분명 미리 알아차리고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터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상 내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으면 하지만ㅡ"
그게 마음대로 될 리가 없었다.
그 증거로 엘리야의 기억이 조금씩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아서의 어렸을 적의 얼굴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오기는 했다.
...엘리야는 아서를 좋아하고 있는데 그런 광경을 봐버려서 나와는 반대로 그를 증오하고 있었지만서도.
"일단은 아서를 찾아보자꾸나."
"네, 아리엘 씨."
엘리의 커다란 흉부가 아주 위협적으로 내 팔뚝을 짓눌러 왔다.
아무리 같은 여자라고는 해도 거리감이 상당히 가까운데 기분 탓일까.
아니, 엘리는 예전부터 그랬으니 딱히 뭐라고 할 수도 없겠지.
마족과 하나가 되어 완전해진 엘리는 분명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완벽하다고 할 수 있었다.
어울리는 짝만 찾는다면 참 좋을 텐데.
"지금 이 시간이면 분명..."
에반젤린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근 들어서 두 사람은 다른 나라를 향한 침략 전쟁을 벌일 것이냐 벌이지 않을 것이냐로 말싸움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에반젤린 같은 경우,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건 내가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기 위함이었다고.
자신은 전 대륙을 통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서의 경우에는 달랐다.
지금까지 전장에서 살아온 그가 더 이상의 피를 보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똑똑.
"아서, 에반젤린. 혹시 들어가도 되겠느냐?"
"들어와."
들어오라고 했으니 들어가도 되겠지.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주변의 공기가 이상했다.
가장 비슷한 분위기라고 한다면 한바탕 전투를 치른 것 같달까.
...아니, 이건 그냥 두 사람 모두 칼부림을 한 꼴이잖아?!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두 사람 모두."
"..."
"아리엘."
방 안은 말 그대로 작살이 나있었다.
검을 어찌나 날카롭게 갈아놓았는지 주변의 물건들 전부 깔끔하게 잘린 채에, 커튼은 태양을 가리지 못하고 반토막 난 상태.
그렇게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한다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게 아니잖아, 응?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엘리에게 몸을 기댔다.
"아리엘 씨."
"엘리, 잠시만 기대마. 이 둘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어린애도 아니고 대체 뭐야.
물론 그들이 의논하던 일이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된 사람들끼리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거였던 걸까.
"아서."
"...응."
"대체 나이가 몇인데 칼부림이나 하고 있는 거야? 응? 에반젤리도 그래. 아무리 북부의 여왕이라고 하지만, 가족이잖아? 가족끼리 어떻게 싸워?!"
"...미안하지만, 우리는 가족이 아니다."
"아무튼!"
말투가 가득 깨져나간 것이 느껴졌지만,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그 위에 둘의 일까지 겹친다?
심지어 나는 엘리야가 아서를 노리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까지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자기가 알아서 위험을 자처했다는 말이지?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마. 알겠어?!"
"...미안."
"에반젤린도!"
"그래."
순순히 대답하는 에반젤린에 아서가 눈을 부라렸다.
언제는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전쟁을 벌일거라고 하더니, 아리엘이 뭐라고 하니까 바로 꼬리를 내려? 같은 느낌의 노려봄이었다.
대체 뭘 잘했다고 저러는 걸까, 다 커서는.
내가 알던 아서는 장난기가 조금 있어도 조금 어른스러운 아이였는데.
...
...그랬나?
"너는 그게 문제야. 예전이 쥐른 할아버지께서도 쉽게 흥분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
"...왜 그렇게 봐?"
아서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마치 나인데, 내가 아닌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마주했다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분명 쥐른 할아버지라고ㅡ'
"흐극, 으..."
머릿속에서 일렁거리는 과거의 기억ㅡ 아니, 엘리야의 기억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아니, 생각하지마. 이제 그만 떠올려.
나는 나야.
엘리야가 아니라, 나.
합쳐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니까ㅡ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아리엘."
"엘리야를 찾아야 해. 그 아이, 지금 너를 증오하고 있어. 너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너를 찾고 있으니까ㅡ"
그러니까, 그 아이가 더 이상 더 이상 나빠지지 않게 막아야 해.
그런 기억을 혼자 받아들이지 않게, 어째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고 어떻게 해결했는지에 대해서 전부 말해줘야해.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서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도와줘.
너와 엘리야는 소꿉친구였잖아.
너라면 알고 있을거 아니야.
"엘리야가 어디 있는지 알려줘, 아서."
내 간절한 부탁에 아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래도, 아이가 갈 법한 장소를 곰곰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뒤.
"...짚이는 곳이 있기는 해."
아서에게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
배를 움켜쥐고는 한참이고 괴로워했다.
겨우 기억을 떠올리는 것 뿐인데도 몸에 새겨지는 고통 때문에 정신을 놓기도 잠시.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얼굴 덕분에 겨우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의 빌어먹을 여자.
내 안에 지팡이를 쑤시고, 배를 걷어차고, 아기를 바닥에 내려친ㅡ
"하윽......"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닌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나 생생한 거야.
이 고통, 이 분노, 이 증오, 그리고 슬픔까지.
그 무엇 하나 흐릿한 것 없이 직접 겪은 것처럼 생생했다.
"에밀리..."
그래, 이런 이름이었어.
나를 괴롭게 한 건 분명 그런 이름이었어.
깨달음 끝에 찾아오는 건 짙은 충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서는 몸이 이끄는 곳을 향해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그것도, 손에는 날붙이를 든 채로.
"...에밀리, 에밀리, 에밀리, 에밀리."
걸음을 비틀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계속해서 목표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고통스럽게 해줘야 해.
내가 그랬던 것 만큼.
그리고, 내 아이가 그랬던 것 만큼.
비릿한 웃음과 함께 식칼의 손잡이를 쥔 손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혹시, 여기 에밀리라는 사람이 있나요?"
뒷짐을 진 채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다.
책에 시선을 주고 있는 작은 소녀는 지금의 자신보다 약간 컸지만,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 정도 크기면 딱 좋아.
커다랬다면, 분명 실패했겠지.
이렇게나 무방비하면 분명ㅡ
"난데, 대체 누구ㅡ"
푸욱ㅡ
"그때는, 대체 왜 그랬어?"
"...너."
"그렇게나 내가 싫었어? 아리엘이, 증오스러웠어? 그런 짓을 할 정도로?"
그저 칼날이 몸 안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반항하지 못한다.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그 귓가에 속삭여줬다.
이게 바로 네가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야.
영원한 잠.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 정도의, 짙은 죽음의 향기.
"서서히 죽어가면서, 공포에 잔뜩 떨도록 해."
"...후회, 할 거야."
"...후회?"
후회라고? 내가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후회 따위의 감정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이렇게까지 한계로 몰린 나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행동이었다.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안녕."
"...아윽."
빌어먹을 년을 넘어뜨리고는, 그대로 도망치듯 서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손을 덜덜 떨리게 만들 정도의 흥분.
그리고, 허무함.
분명 복수는 달콤해야 할 텐데, 생각보다 달콤하지 않았다.
어느쪽이냐고 묻는다면 분명 쓴 것에 가까운 느낌.
"...아."
손바닥을 잔뜩 물들인 붉은색에, 겨우겨우 정신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흥분이 가라앉은 다음 튀어나오는 건 다름 아닌 후회.
손가락 사이사이에 파고드는 질척함에 이를 악물고는 그대로 저택 밖으로 뛰어나갔다.
'복수라는 건 허무한 법이란다.'
...내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아리엘 씨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머릿속에서 흐물거리는 단어들의 나열을 떠올리며 멍하니 걸었다.
이런 걸 바라던게 아니었는데.
내가 원하는 건 이런 찝찝한 복수가 아니라, 조금 더 상쾌하고 기분 좋은 것이었는데.
"...그러면, 대체 어떻게 했어야 됐다는 건데?"
한참을 걷다 보니, 황금빛 물결이 출렁이는 지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살던 고향에도 이런 곳이 있었지.
저 황금빛 바다 안에 숨으면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것 같은 장소.
천천히 황금빛 풀밭 안으로 걸어가, 그 중앙에 자리를 잡고 쭈그려 앉았다.
"후으..."
머리가 뜨거웠다.
한참이고 숨을 고르며 시간을 보냈다.
그냥 눈을 감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만 싶은 기분이었다.
분명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그 누구도 찾아낼 수 없겠지.
자신이 원한다면, 평생 동안 숨어있어도 발견되지 않을 터였다.
한 사람.
"아리엘."
"...아서."
단 한 사람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