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3 - 아리엘.(6)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아서와 엘리야의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잃어버렸던 소꿉친구를 되찾은 용사와 사랑하는 소꿉친구를 마주한 시골 소녀가 아닌, 그냥 아서와 그냥 엘리야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못한 관계일지도 모르고.
"아리엘ㅡ"
"다가오지마. 저리 꺼져."
"..."
내 품에 안긴 엘리야가 근처로 다가온 아서에게 잔뜩 으르렁거렸다.
마치 무릎 위에 앉은 말티즈 같은 느낌이네.
아이의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손을 움직이다가, 아서에게 눈치를 줬다.
지금은 조금 져줘.
내 눈빛을 읽고는 천천히 물러서는 아서에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저런 남자를 좋아했었다니, 믿을 수가 없어."
"..."
엘리야의 중얼거림에 괜히 내가 미안해졌다.
좋게 해결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결국 아무도 다치ㅡ 아니, 죽지 않았으니 다행인 건 맞는 것 같았다.
아서에게 무언가를 하겠다고 달려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으니까.
"엘리야, 어디까지 기억 해냈니?"
"...몰라요."
아무래도, 아이는 나에게도 조금 감정이 있는 듯 싶었다.
그것이 아서에게 가지고 있는 것과는 결을 달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ㅡ
조금이라도 아이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게 엄마의 마음이랄까.
감정이 격해져서 그런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엘리야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줬다.
"진정 하려무나, 엘리야."
"아리엘 씨는 아리엘 씨가 당한 일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아셔야 해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거 절대 용서하지 못할 텐데, 대체 어떻게..."
다시금 내 기억을 떠올렸는지, 자그마한 몸이 덜덜 떨려왔다.
확실히, 내가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아서를ㅡ 그리고 다른 이들을 어떻게 용서했는지 신기하기는 했다.
그래도 뭐,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면 과거 같은 건 상관 없지 않을까.
그야 모두가 불행한 것보다는 모두가 행복한게 좋잖아?
"증오하는 사람은, 행복해질 수 없단다. 그래서야."
"...행복 때문에 복수를 포기하셨다고요?"
"그 이유도 있고, 아서도 반성을 했으니까."
뒤로 물러서 있던 아서와 눈을 맞추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서를 용서한게 아니야. 아서를 사랑한 거지.
너에게 아서를 용서하라는 듯이 아니란다, 아가.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천천히, 천천히ㅡ
우리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을 위해 나아가자고.
"아, 그래."
"...아리엘?"
"일단은 에밀리에게 사과부터 하러 가자꾸나."
"...에."
아직 회복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세계수라면 분명 멀쩡하게 회복 시켜주었겠지.
거의 죽어가기 직전의 나를 살려낸 전적이 있었는데, 지금의 세계수는 그때보다 훨씬 더 성장한 상태였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가자.
시간이 가면 갈수록 기회를 잡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하려면 어서 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자, 일어나야지. 계속 앉아있으면 내가 일어서지를 못한단다."
내 무릎 위에 앉아있는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어, 그래도 들어올렸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부정을 하거나 하지는 않는 걸 보니 사과를 하러 가기는 할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면 조금 곤란해질 뻔 했는데.
물론 아이가 아니라 내가.
"아서, 왜 가만히 있어? 너도 와야지."
"...나도?"
"당연하지."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계속 그렇게 도망치다가는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오른손에는 엘리야의 손을, 왼손에는 아서의 손을 잡은 채로 방 밖을 빠져나갔다.
우리 세 사람을 발견한 인간 사용인이 잠시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가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이렇게까지 공손하게 대하지 않아도 된데도 계속 이러는구나.
에반젤린의 손님인 건 맞지만 대접까지 받을 생각은 없는데 말이다.
"마마."
그렇게 저택 밖으로 나가 세계수 앞에 도착할 때 즈음 레이나가 마중을 나왔다.
표정이 좋은 걸 보니까 에밀리는 잘 회복한 모양이구나.
제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아이였으니 분명 나와 마주치면 잔뜩 부끄러워할게 틀림 없었다.
뭐, 그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움 포인트였지만서도.
"에밀리는 잘 회복하고 있어요. 아니, 이제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겠죠."
"고맙구나, 정말."
"저보다는 세계수 님께 감사해주세요. 저는 그저 에밀리의 곁을 지켰을 뿐이니까요."
내 옆에 선 에밀리에게 잠시 시선을 준 레이나가 슬쩍 몸을 틀었다.
그러자 보이는 세계수의 몸체에 난 자그마한 구멍.
그 안에 누워있던 에밀리가 내 얼굴을 보더니 표정을 와락 구겼다.
정말, 사실은 좋으면서 일부러 기분 안 좋은 척 하기는.
"...여기는 어쩐 일로 온 거야?"
"네가 걱정되서 왔지. 가장 중요한 건 사과를 하러 온 것이고."
"사과라니, 무슨 사과를ㅡ 아."
사과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던 에밀리가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엘리야를 보더니 무슨 뜻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야는 그런 에밀리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지만서도.
스스로가 잘못한게 있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었지만, 원래 사과를 할 때는 상대와 얼굴을 마주봐야 하는 법이니까.
아이의 손등을 부드럽게 톡톡 두들겨 시선을 끌었다.
자, 아가.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가 있잖니?
"...합니다."
"..."
"죄송, 합니다."
꾸벅, 하고 숙여지는 자그마한 머리통에 에밀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설마하니 사과를 받으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은 표정.
그 표정 안에는 본인이 엘리야에게 사과 받을 가치가 있는 인간인지에 대한 고뇌 또한 잠들어 있었다.
...자존심 높던 에밀리가 어쩌다가 그런 걱정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네.
"고개를 들어."
"..."
"나는 딱히, 사과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니까. 만약 사과를 해야 한다면 내가 너에게 하는 편이 맞겠지."
"..."
"내가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네가 그런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을 테니까."
자업자득이야.
죽지 않은게 행운일 정도로.
잠시 숨을 고른 에밀리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지켜보고 있던 레이나가 아이를 부축하자, 진한 쓴맛을 머금은 미소와 함께 살랑살랑 손짓을 시작했다.
"...아."
그런 에밀리의 손짓에 몇 걸음 다가간 엘리야의 정수리에 자그마한 손이 올려졌다.
때릴까, 혹은 잡아당길까.
그런 걱정을 하며 굳어진 얼굴이 당혹감으로 물드는 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그래.
에밀리가 아주 자애로운 표정으로 엘리야의 머리를 쓰다듬어서 그런게 아닐까.
'내가 보기에는 둘 다 어린아이처럼 보이는데 말이지...'
아이가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것 같달까.
그렇다고 어울리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생각보다 잘 어울려서 그림이 됐다.
엘리야의 충격 받은 얼굴만 아니었다면 비슷한 또래의 언니 동생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겠지.
...음, 같은 뱃속에서 태어났으니까 자매라고 불러도 될지도 모르고.
"아, 물론 아서 녀석은 용서하지마. 저 녀석, 쓰레기거든."
"에밀리?!"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엘리야?!"
갑자기 불똥이 아서에게로 튀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칼에 찔리고 찔림 당하는 관계였을 텐데, 지금은 서로 의기투합해서는 쓰레기 용사 타도니 뭐니 하면서 잔뜩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얘들아.
아서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너무 구박하지 말거라. 이러니 저러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아서에게 팔짱을 끼며 어떻게든 변호를 해줬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아서를 꽁꽁 묶어서 마구 두들길지도 몰라.
용사인 이상 쉽게 당해주지는 않겠지만, 아이들의 눈빛에 새삼 불안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물론 아이들을 혼낼 생각은 없었기에 그저 아서를 끌어안아 보이는 정도만 했지만서도.
"그나저나, 이제는 괜찮으신 건가요?"
"그래. 세계수의 회복 능력 덕분에 살았어."
"...세계수요?"
에밀리의 대답에 엘리야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이의 키를 훨씬 뛰어넘는 크기의 거대한 나무.
레이나의 말로는 이것보다 더 많이 자라난다고 했는데, 솔직히 전부 다 커졌을 때는 과연 어느 정도 크기가 될지 가늠이 가지를 않았다.
이러다가는 진짜 북부 전체가 봄으로 물들게 될지도 몰랐다.
"와아..."
작은 감탄사와 함께 아이가 손을 뻗었다.
엘리야에게 있어서 세계수란 그저 책에서나 읽을 수 있었던 환상적인 무언가였기에, 그 반응도 꽤나 대단했다.
그러다가도 세계수의 몸체에 손이 닿기 직전 멈칫했는데, 잠시 레이나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니 그제서야 손을 대는게 상당히 깜찍했다.
연신 우와, 우와아, 하는 감탄사를 연발하는게 어찌나 귀엽던지.
얼마 전까지 증오에 절여져 있던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들뜬 모습이었다.
"느낌은 평범한 나무랑 비슷하네요. 물론, 훨씬 크지만. 고향에도 큰 나무가 조금 있었지만, 이 정도로 큰 나무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대신 우리 키보다 훨씬 큰 곡식들이 있었지. 지평선 너머까지 길게 이어지는 황금빛 바다ㅡ"
"조용히 해, 아서."
아무래도 엘리야는 그냥 아서의 목소리 자체가 듣기 싫은 모양이었다.
불쌍하구나, 정말로.
오래간만에 만난 소꿉 친구에게 당하는 취급이 이 정도라니.
아무튼, 지금 엘리야의 관심은 오로지 세계수만을 향해 있었다.
딱히 반응을 하거나 움직이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따지고 보면 레이나도 책에서나 볼 수 있는 엘프이지 않느냐."
"음, 뭐랄까... 세계수는 살아있는 신님 같은 느낌이잖아요. 엘프는 다른 인종 같은 느낌이고."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외모가 뛰어나고 뾰족한 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빼면 인간과 거의 같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음.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세계수도 그냥 커다란 나무인거 아닌가?
"마마."
"으, 응? 갑자기 왜 부르니?"
"...아니,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신 것 같으셔서요."
...눈치 너무 빠른거 아니야?
조금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레이나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딱히 이상한 생각은 아니잖아?
그냥 감상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