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65 - 그냥, 미움 받고 싶지 않아서.(2)
"엄마?"
"엄마?"
"...닥쳐."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나와 껄껄 웃으며 말하는 고르돌 씨.
그리고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얼굴을 시뻘겋게 달군 에밀리까지.
세계수 바로 아래에서 일어난 술판은 드워프 하나가 천재 마법사 하나를 잔뜩 놀려먹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적당한 선에서 치고 빠졌겠지만, 지금의 에밀리는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음과 동시에 마법까지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
즉, 고르돌 씨가 진심으로 놀려먹기 좋은 상태라는 뜻이었다.
"자, 작작해!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있지!"
"뭐, 어떻게 보자면 진짜 엄마라고 불러도 상관 없지 않나?"
"그건, 그건ㅡ"
"인정하면 편해."
이제는 또 짐짓 위로하듯 어깨를 턱턱 두드린다.
키는 비슷하더라도 덩치에서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고르돌 씨의 손짓마다 에밀리의 몸뚱이가 거칠게 흔들려댔다.
아니, 어쩌면 그냥 속에서 천불이 끓어올라 떨림을 주체하지 못하는 걸지도 몰랐지만.
그런 장면을 보면서 새삼 에밀리의 성격에 많이 좋아졌다 싶었다.
원래라면 불길을 뿜어내며 주변을 모조리 불태웠을 텐데.
'아니, 이건 그냥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서 그런 걸지도...'
어린아이라서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겠지만, 만약 외형이 어른의 것이었다면 예전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겠지.
슬쩍 술잔을 들어올리다가, 에밀리의 술잔이 텅 비어있어서 몰래 그 안을 가득 채워주었다.
화를 진정시키는데 술만한 것도 없지.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 자체를 가라앉히는 것이지만.
"자자, 이번 잔은 에밀리의 엄마를 위해 건배!"
"...어감이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면 이번 잔은 아리엘을 위해 건배!"
짠, 하고 부딪히는 술잔과 함께 한숨을 토해냈다.
에밀리가 아리엘을 엄마라고 부른다면 나와는 대체 무슨 사이인지...
딱히 아빠라고 불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아빠라고 불린다면 오히려 소름이 돋을지도 몰랐다.
"에밀리."
"...왜?"
"네 마음대로 불러도 되니까 아빠라고는 부르지마."
"...뭐?"
"푸핳핳하핳하하하하!!!!"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굴의 에밀리.
미친 듯이 웃는 고르돌 씨.
그리고 세계수의 나뭇가지 위해서 배를 움켜쥐고 있는 레이나 씨ㅡ
...레이나 씨?
"배, 배가... 배가... 크흣, 흐아..."
"닥쳐어어어어어!!!"
곧 죽기 직전의 레이나 씨에 에밀리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고는 주먹을 꼭 말아쥐어 휘두르는데, 아무리 봐도 그 경로가 이쪽이었다.
심지어 얼굴.
"쓰레기 용사 따위한테 누가 아빠라고 부를까봐?!"
"..."
솔직히 말하자면 에밀리에게 맞은 뺨이 아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보다는 마음이 더 아팠지.
쓰레기 용사라니, 너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라서 입 안이 엄청 썼다.
그런 제 심정을 눈치챘는지 고르돌 씨는 그저 말 없이 술을 따라낼 뿐이었지만서도.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원래 삶을 살면서 실수 하나 둘 정도는 누구나 한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나 둘이 아니라서 문제입니다. 아니, 애초에 그걸 실수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실수라는 귀여운 단어로 포장하기에는 저지른 일이 너무나도 커다랬다.
아리엘은 용서ㅡ 아니, 용서 대신 사랑이라는 단어로 꽁꽁 포장했지만 그런다고 그 모든 것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꽁꽁 싸매어져 있으니 더더욱 불안한 것이었다.
혹여나 다른 누군가ㅡ 아리엘 혹은 자신이 그 내용물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이.
'엘리야의 경우도 마찬가지겠지.'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과오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소꿉친구가 알아버렸다.
단순히 그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죄어오는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더랬다.
...참 겁쟁이 같기도 하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전부 치르리라 말했으면서도, 정작 때가 오니 두려워 하는 꼴이란.
"...무엇보다, 제가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입으로는 아리엘을 닮은 딸이 태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런 때가 오는 것을 상상하면 마냥 반길 수도 없었다.
그녀를 상처 입힌 내가 그녀의 딸에게 아빠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그 증거로, 지금까지 태어난 아이들 중에서 자신을 아빠라고 부른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물론 질투는 아니었다.
나 또한 그렇게 불릴 마음은 존재하지 않기도 했었으니.
"음, 그렇게 말하자면 나도 딱히 좋은 아빠는 아니었지."
"...지금은 좋은 아빠가 된 것처럼 말한다?"
"최근 딸아이에게 '아빠 정말 좋아!' 라는 말을 들었거든."
딸아이가 말해주는 것만큼 가장 확실한 것도 없겠지, 안 그런가?
낄낄 웃으며 말하는 드워프의 얼굴에는 에밀리를 거쳐 자신 마저도 놀려주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저를 놀려서 뭐하시려고요, 고르돌 씨.
그런 질문이 목 끝까지 솟아올랐지만, 괜히 말을 얹었다가 타겟이 되어버리면 꽤나 버거울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지금은 에밀리도 있으니까 가만히 있자.
"하지만 좋은 드워프는 아니지 않아? 매일마다 술만 마시고, 쯧."
"매일마다는 아니지, 오늘 같이 특별한 날에만 마시는데!"
"오늘의 어디가 특별하다는 건데?!"
"사실 매일매일이 특별하지."
잠시 침묵.
작은 키에 걸맞는 작은 눈동자가 우수에 젖어있었다.
몸에 알코올이 들어가서 느끼는 잠시간의 감상인지, 아니면 이 평화로운 일상에 진심으로 감동을 받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ㅡ
그래, 차라리 지금이 낫지.
그 지옥 같던 시기보다는 지금이 더ㅡ
"아서?"
"...아리엘?"
아무래도 이 술자리의 참여자는 우리 셋으로 끝나지 않을 모양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봤을 때는 분명 취기가 올라와서 보이는 신기루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를 걱정하는 듯 축 늘어진 눈썹을 눈에 담는 순간 조금이지만 정신이 돌아왔달까.
현재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의 등장이었다.
"여기는 어쩐 일로ㅡ"
"여기에 있을 것 같아서 왔다만, 내가 방해한 건가?"
"...딱히 방해는 아니야."
술 냄새가 상당할 텐데도, 아리엘은 굳이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않았다.
그 속에 아무런 의도나 속셈이 담겨있지 않다는걸 알면서도, 절로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또 너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게 될까.
내가 무슨 말로 너를 상처입히게 될까.
그것이 두려워서, 감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왜 내 눈을 피하느냐, 응? 저번에는 술이 들어가서는 잔뜩 나에게 달라붙더니."
"그, 미안해."
"미안할게 아니라, 그냥 하던대로 하면 된다만."
살풋 표정을 찌푸린 아리엘이 제 팔을 탁탁 두들겼다.
뭘까 저 행동은.
아무래도 본인에게 달라붙으라는 뜻인 것 같았는데, 그게 자의인지 다른 사람에 의해서 하는 행동인지의 차이는 가히 하늘과 땅 차이였다.
뭐랄까, 스스로에게도 아리엘에게도 부끄럽다고나 할까.
얼마 전에 떠오른 죄책감과 죄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서 서슴 없이 달라붙기가 조금 그랬다.
'뭐...'
"바보,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내가 아니더라도 아리엘이 먼저 달라붙어 버렸지만 말이지.'
팔뚝에 달라붙는 서늘한 온기가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특히 부드러운 흉부ㅡ
평범한 여성은 가질 수 없는 그 커다란 질량이 제 팔뚝을 눌러댈 때마다 꾹꾹 찌그러지는데,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해서 고개가 돌아가게 만들 정도였다.
마치, 일부러 유혹하는 것처럼.
"고개 안 돌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뺨에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뺨을 때린 범인은 에밀리였다.
그녀는 씩씩 화를 내며 나와 아리엘의 사이를 갈라냈는데, 내가 그녀와 붙어있는게 어지간히도 싫은 모양이었다.
마치 더러운 오물 취급을 하는 것 같달까.
"너도, 마실래?"
"술을 마신다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생각보다 많이 마신 것 같구나. 몸을 회복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읏."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건 취기 뿐만 아니라 아이 취급이 부끄러워져서 그런 것도 있을 터였다.
아리엘의 품에 안긴 에밀리의 모습은 겉모습 그대로처럼 보였다.
...내가 에밀리를 귀엽다고 느끼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물론 이성적인 느낌의 귀엽다는 절대 아니었다.
그냥 마을의 아이를 바라볼 대 같은 느낌일 뿐이었지.
"그나저나, 아리엘. 에밀리가 자네를 뭐라고 불렀는지 아나?"
"...고르돌."
그 이상으로 말을 한다면 그 입을 찢어버린다고 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물론, 고르돌 씨는 전려 멈출 생각이 없어보이셨지만서도.
"무려 엄마라고 불렀다네, 엄마!"
"...너ㅡ"
"그게 이상한 일인가?"
하지만 아리엘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르돌 씨의 예상과 달랐다는게 맞겠지.
아리엘은 자신이 낳은 아이들이라면 전부 제 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게 에밀리라도.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것 같구나. 그날 이후로 엄마라고 잘 불러주지 않아서 섭섭하던 차였는데."
"..."
"에밀리?"
태연하게 내뱉어지는 아리엘의 말에 에밀리가 부끄러워 죽으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내가 에밀리여도 부끄러울 것 같기는 했다.
문제는 그 부끄러움을 아리엘이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지만.
아리엘은 뭐랄까, 소위 말하는 천연이었다.
보는 사람이 애가 탈 정도의.
"...가끔씩이라면, 엄마라고 불러줄 테니까ㅡ"
"..."
"ㅡ그러니까,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울먹이며 내뱉어지는 한 마디에, 고르돌 씨가 곧 죽을 듯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아니, 이미 죽어버린 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