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70화 (270/342)

Chapter 270 - 당신과 나의 비밀스러운 토론회.(2)

보자마자 곧바로 정체가 알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마왕은 지금의 내가 정신이 돌아온 채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뭐야, 배려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조금 기가 찼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티를 낼 수도 없었다.

"아가, 내가 없어서 외로웠던 거니?"

"..."

무슨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으면서도 묻다니.

하나도 외롭지 않았는데요?

오히려 당신을 보고 있으면 제 처지가 얼마나 기구한지 체감이 되어서 죽어버리고 싶은 기분이라고요.

그런 의미를 잔뜩 담아서 마왕을 바라보니, 푸스스 하는 웃음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 건지 모르겠네...'

원수와 얼굴을 마주하면 반사적으로 표정이 찡그려지지 않나?

이번 세계선에서 처음 마왕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내가 마신인지도 몰랐으면서 나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던 그 모습.

분명 처음에는 자신의 예상과 똑같은 반응을 보여줬더랬지.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는 뭔가 해탈해서는 전부 용서해버렸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 처럼.

"그래, 책이라도 읽어줄까? 마침 재미있는게 하나 있단다."

"그 전에! 아리엘 씨, 선물이에요."

"선물?"

침대 위에 놓여져 있던 책을 집어드는 마왕에게 성녀가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제 품을 뒤적거려 무언가 물건을 꺼내는데, 무언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자그마한 오르골이 그 손에 들려 있었다.

태교에 좋은 물건이라는게 오르골이었구나.

무미건조한 감상을 내뱉으며 몸에 조금 힘을 줬지만, 마왕이 내 몸을 놓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 ~♬

"소리가 참 좋구나.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아, 악기를 파는 가게의 사장님께서 주셨어요. 지인이 임신했다고 하니까 선뜻 주시더라구요."

기쁘다는 듯 입꼬리를 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고도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행복해 할 수 있지?

언젠가 겪었던 배신의 아픔을 되새기자, 심장이 욱씬거렸다.

'나는, 그런 일을 겪어야 할 존재가 아니었어.'

내가 낳은 아이들로 인해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들이 심장에 칼날을 들이밀 때의 감각.

저릿하고, 몸이 무거워지고, 절로 우울해지는ㅡ

분노. 혹은 증오.

그때부터였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저주가 새겨진 것은.

'아무도 믿지마. 네가 직접 만들어낸 존재가 아니면, 절대로 믿지마.'

다른 존재들이 태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믿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래, 어쩌면 그때부터 '마신'이라는 주체성이 확립됐을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오로지 자신과 마왕만을 위해 행동하는 이기적인 신.

...맞아. 내 마음대로 마신이 된게 아니라, 다른 녀석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자, 이것 보렴. 예쁘지 않니? 이 분이 바로 여신님이란다."

"..."

하지만 그 한 마디에는 결국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녀석들이 있는 곳에서 보여주는 첫 번째 감정 표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성녀와 마족의 얼굴을 무시하고는, 마왕이 펼치고 있는 책에 시선을 집중했다.

'대체 이런 책을 왜 만든 건데?'

애초에 이런 세상 따위에는 단 한 조각의 애정도 없었다.

그저 마왕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만든 모형 정원.

재미로 만든 세계 안에 벌레들이 살아간다고 해서 그 벌레들에게 특별한 감정이 들거나 하지는 않을 터였다.

심지어 그 벌레들이 나에게 상처 입혔던 자들의 후손이라면 더더욱.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해주고, 그 대가로 겨우 그녀의 믿음을 받았지."

"..."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소리를...

교단의 지하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리고 교단이 정확하게 무슨 짓을 해왔는지 전부 알고 있었음에도 태연하게 저런 소리를 해댄다.

나를 놀리려는 걸까. 아니면 죄책감이라도 느끼라고?

인간들은 너를 이렇게나 좋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는 왜 그런 짓을 했었느냐고 말하는 건가?

"뭐, 여신님은 그다지 좋은 분이 아니셨지만 말이지."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신에게 좋고 나쁘고를 따진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었다.

신이란 필멸자들의 잣대로 판단할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시선이 거슬려서, 마왕의 품으로 파고들어 얼굴을 책 뒤로 숨겼다.

그냥 의식을 희미하게 하는 편이 좋으려나.

아니, 그랬다가는 또 이 몸뚱이가 멋대로 두근거릴게 분명했다.

"...마마."

"말했다!"

"...저 사람들, 싫어."

"에..."

자신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는 것부터 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는데,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서 목소리가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내 말에 표정이 굳어지는 두 사람의 얼굴이 참 우스웠다.

겨우 싫다는 한 마디에 저런 얼굴이라니.

마치 원래의 위상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나 할까.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저도 가볼게요, 아리엘 씨."

"그래, 다음에 또 부르도록 하마."

탁, 하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마왕이 내 머리 위로 제 턱을 올려두었다.

무게감 때문에 기분이 나빠져 몸을 이리저리 부딪혔지만, 몸집의 차이 때문에 전혀 벗어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왜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느냐고 한다면, 그런 너라도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서다."

"...무슨, 뜻이죠?"

"너는 언제나 모두에게 미움 받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마왕이 말하는 '언제나'라는 건 이 세계에서의 일 뿐만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과거.

마왕이 지금보다 훨씬 작았던 무렵의 시절ㅡ

설마.

"...기억을, 되찾았다고?"

"적어도 네가 의도한 건 아니라는 뜻이구나."

정말, 되찾았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왕으로써 가지고 있던 기억은 지금까지 섞어왔던 수많은 영혼들로 인해 희석되서 소멸했어야 했는데, 대체 어떻게?

떨리는 눈으로 마왕을 바라보자, 쓴웃음을 지으며 내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어왔다.

"기억이 있는데 어떻, 게?"

어떻게 나를 용서할 수 있지?

당신에게, 그리고 마족들에게 한 짓을 기억하고 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나 간단하게 해결될 정도로 우리들의 악연은 얕지 않았다.

그런데도 용서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우리가 언제까지 살 것 같니?"

"..."

"그래서란다. 앞으로 살아온 세월 이상으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우리 둘이, 영원히 증오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마왕의 눈은 꽤나 슬퍼보여서,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 겨우 마왕 따위에게 말문이 막히다니.

심장 안에서 요동치는 검은 열기를 억누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대의 마왕은 말을 잘 하지 못했던 걸로 아는데.

심지어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시도 따위는 하지도 않았었고.

"...당신의 어머니랑, 다르네요."

"너를 사랑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같지 않니?"

"..."

또야.

또 예상치 못한 답변으로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설마 일부러 이러는 걸까.

나를 안심하게 만든 뒤에 배신하려고?

"...몰라, 요."

"...아가?"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영혼이 덜덜 떨려댔기에, 결국은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나는 과연 무엇을 원하고 의식을 불러온 걸까.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답을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인 채로, 그렇게.

***

여신이 떠나갔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처음에 가져왔던 여신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사냥꾼과 사자의 이야기라던지, 바닷속에 사는 심해 공주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었다.

느릿하게 퍼지는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품에 안긴 아이의 온기가 점점 내 몸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봐, 이렇게나 잘 지내고 있잖아?

'의식이 없는 상태를 무의식이라고 한다면, 여신은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되려나.'

억측일 수도 있었지만,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외모는 내 어머니를 빼다 박았다고 해도 될 정도였기에,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나에 대한 호감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꽤나 오래 걸릴 것 같다는게 문제였지만.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뭔가 이상한 고집 같은게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게 신이라면 더더욱 그러겠지, 응.

"조금 전의 '그거', 여신이었죠?"

"똑같은 내 아이였다."

어느새 다시금 방 안으로 들어온 엘리가 기분 상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문 밖에서 다 듣고 있었던 것 같네.

엘리는 나에 관해서라면 너무 과도하게 민감해지는 면이 있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아이의 반응에 분명 수상함을 느끼고 떠나지 않았던 것이겠지.

혹여나 여신의 기억이 돌아오고, 기억이 돌아온 여신이 나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도 몰랐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다오, 엘리. 네가 염려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상대는 그 여신이에요.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요."

"괜찮다. 너도 있고, 아서도 있고, 모두가 있으니까."

떠넘기는 거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그렇게 말해질 정도로 나는 내 주변의 모두들을 믿고 있었다.

만약에라도 아이가 잘못된 길로 향한다면 분명 막아줄 수 있겠지.

여신 때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또 몰랐지만, 지금의 아이는 그저 어린 마족 수준의 힘 밖에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아리엘 씨. 세상에는 용서하지 않아도 되는 부류가 있는 법이랍니다. 무조건 전부 용서한다고 좋은게 아니에요."

"그래도, 미련이 사라질 때까지는 노력하고 싶구나. 그래, 내 주변의 이들이 나를 용서한 것처럼."

"...그건 용서라고 할 수 없어요. 애초에 아리엘 씨는 어떠한 잘못도 하지 않으셨으니까ㅡ"

"마족들의 잘못도 내 잘못이다. 내가 마왕인 순간부터 그랬지."

마왕이 아니게 되었다고 해서 나와 동족들의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용서 받을 필요가 없었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건 다른 모든 일에서도 도망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를 너무 무고한 피해자로 만드려고 하지 마.

물론, 나를 위한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