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1 - 꿈에서 찾아온 그대.(1)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장난기가 담긴 능글맞은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 채워진 그리움을 감춰낼 수는 없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분홍색 머리카락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니, 상대 또한 미소로 화답해왔다.
"그렇구나."
"보고 싶었어요."
부하, 동료, 혹은 친구.
그것보다 우리들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있을 것 같은데, 쉽사리 찾아낼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단순한 단어로 단정 짓기 싫은 걸지도 모르지.
그만큼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할리벨."
"솔직히 꼼짝없이 죽은 줄 알았는데, 설마 마왕님이 제 뿔을 흡수하신게 이런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네요."
확실히, 그 덕분이 컸다.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할리벨의 뿔을 씹어삼키지 않았더라면 분명 나는 지금까지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겠지.
어떻게 보자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그런.
"태어날 때는 아프지 않게 태어나다오."
"노력은 해볼게요. 그런데, 제가 태어나면 마왕님을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흐응..."
"...네 마음대로 부르려무나."
할리벨이라면 엄마라는 단어를 이용해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물론 나에게 정말 해가 되는 건 하지 않겠지만, 장난의 수위가 조금 강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면 할리벨이 하는 그 어떤 행동이라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래도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다구요?"
"...그게 무슨 뜻이지?"
"'마왕은 만마의 어버이이며, 지배자시다.' 친부모는 아니더라도 양부모 정도는 된다는 뜻이죠."
기묘할 정도로 편의주의적인 주장이었지만, 딱히 무어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그녀를 너무 오래간만에 봐서 그런 것도 있었고, 그녀가 너무 열성적으로 나를 설득하려고 해서 그런 것도 있었다.
결국 나는 어떻게든 할리벨에게 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구나.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난 마족이자 처음으로 만난 동족.
처음이라는 건, 그토록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더랬다.
"자, 그러면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 위한 사랑의 키스를~ 츄우~♥"
"잠, 할리벨?!"
쪽,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버드 키스.
순간 아주 농밀한 키스를 예상했던 나로써는 입술만 맞대고 떨어지는 행위에 오히려 더욱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애초에 충분히 예상할 법도 했지만 상대가 몽마라는 사실에서 방심하고 말았달까.
나를 보며 히죽거리는 얼굴에 한숨을 폭 내쉬니, 그제서야 화났냐고 물으며 슬쩍 달라붙어왔다.
"딱히 화나지 않았으니까, 너무 그러지 말거라."
"하긴, 마왕님은 언제나 저에게 관대하셨으니까요. 아니, 모든 마족들에게 그러셨죠."
"...딱히 그런 건 아니다."
나는 관대라는 단어를 들을 정도로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속이 좁다면 좁았지.
그렇기에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 곁에서 사라지지 말거라."
다시는 너를 놓치고 싶지 않다.
너를 잃는다는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개인적인 욕망에서 터져나오는 그 한 마디를, 진심을 다해 전했다.
당연하지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이죠."
긍정.
오직 그것만이, 그녀의 답이 될 수 있을 테니까.
***
"아리엘, 뭔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거 같다냥."
"좋은 일이 있었거든."
"왜, 좋은 꿈이라도 꾼거냥?"
"그런 셈이지."
언제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수인들은 은근히 감이 좋았다.
동물의 촉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들.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고, 숨겼는데도 눈치채는 것들이 꽤 있어서 언제나 놀랄 따름이었다.
뭐, 가장 중요한 건 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마구 쓰다듬어주는 거였지만서도.
"냐앙, 냥..."
"부드럽구나, 랴뇨리."
처음 쓰다듬을 때는 분명 엄청 싫어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야생 고양이를 집고양이로 만든 듯한 느낌에 괜히 뿌듯함이 밀려들었다.
이 감촉.
머리카락 같기도, 부드러운 동물의 털 같기도 한 이 느낌.
이 정도면 애니멀 테라피도 아니고 그냥 수인 테라피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골골골골..."
"완전히 집고양이가 다 됐구나."
"그냥 집고양이로 살래냥..."
"다른 아이들은 밖에서 뛰어노는걸 더 좋아하는데 말이지."
라뇨리도 얼마 전까지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는 입장이었지만, 최근에는 마음이 바뀌었는지 저택 안에만 머무르고 있었다.
따뜻한 걸 좋아하면 세계수 근처에 있어도 될 것 같은데, 라뇨리는 내 곁에 있는 걸 고집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호위라나 뭐라나.
메이아가 있어서 괜찮다고 말했지만 랴뇨리는 막무가내였다.
"네 옆에 있으면 좋은 꿈을 꿀 수 있단 말이다냥..."
"...그렇구나."
랴뇨리의 말에 볼록 튀어나온 배를 살짝 쓰다듬었다.
꿈을 다룰 수 있는 건 지금 이 아이 밖에 없으니까.
내 손짓에 골골거리기 시작한 라뇨리의 울음 소리와 함게 곧 태어날 할리벨에 대해 떠올려봤다.
린이랑 닮았으려나.
원래도 닮아있던 둘이었으니, 작을 때의 모습은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겠지.
'그러면 이번에는 린이 언니가 되는 건가?'
언제나 린을 아이 취급하던 할리벨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본인이 아이 취급 당할 각오가 필요할 터였다.
뭐, 린 성격에 진심으로 놀리거나 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둘이 티격태격 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보였다.
똑 닮은 두 사람이 아웅다웅거리는... 우후후...
"...아리엘, 뭔가 표정이 이상하다냥."
"응? 아, 아무것도 아니다."
눈을 가늘게 뜨는 라뇨리에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이런, 얼굴로 전부 드러난 걸까.
앞으로는 주의하자고 생각하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할리벨로 만약을 상상하는 건 그만 하자ㅡ
"...읏?!"
"아리엘?!"
ㅡ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진통이 느껴졌다.
설마 듣고 있었던 거야?
아니, 딱히 입으로 내뱉지는 않았으니 마음을 읽었다는 뜻인데...
아무튼,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몸을 뉘이자 랴뇨리가 빠른 속도로 아기를 받을 준비를 했다.
"...이제 많이 익숙해졌구나."
"앞으로도 한참이고 낳을 텐데 지금부터라도 어서 익숙해져야지냥."
"고맙, 흣..."
분명 아프지 않게 나온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배를 아릿하게 찔러오는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래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서 다행이려나.
끄응, 하고 하복부에 힘을 주니 뱃속의 아기가 밀려나오는게 느껴졌다.
"흐아으으으읏...!!"
"오, 머리가 보인다냥! 분홍색이다냥!"
"흐으으으...!!!"
분홍색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더더욱 힘이 났다.
보통이라면 중간에 한 번 정도는 쉬었겠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힘을 더 주어서 한 번에 주욱 밀어냈다.
"으앙, 흐앙, 흐으으으앙!!!!!"
"나왔다, 아리엘!"
"..그렇, 구나."
생각보다는 괜찮을지도.
나에게 아기를 건네는 랴뇨리에게 빙긋 웃어보였다.
고맙구나, 언제나.
머리라도 쓰다듬어줄까 싶었지만, 한 손으로 아기를 안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감사의 표시는 다음에 하도록 하자.
"...드디어 왔구나, 아가."
"..."
울음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 보는 눈동자는, 갓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동그랗게 떠져 있었다.
아기인데도 참 감정이 풍부하구나.
눈이나 얼굴이나 둘 다 울 것 같기도 하고, 웃을 것 같기도 했다.
...정말이지, 오래 걸렸어.
"꺄아아!!"
"그래 그래, 나도 반갑구나."
아기가 선택한 것은 바로 해맑게 웃기.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할리벨이 지을 법한 웃음이었다.
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인지 심히 귀엽게 보여서 문제였지만.
이러다가는 다 자라나도 꼼짝 못하는거 아닐지 모르겠네.
"자, 일단 밥부터 먹자꾸나. 착하지?"
"우으, 바아아!"
"...읏."
아기에게 이런 말을 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젖을 빠는 느낌이라던지 혀놀림이 조금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다기보다는 야릇한... 그게 그거려나.
서큐버스 아기는 조금 다른 걸까?
다른 아이들이 젖을 먹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갓난아기를 다그칠 수도 없고 말이지...'
물론 100% 아기라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서도.
뭐, 그래도 상관 없나.
어차피 젖을 먹는 것도 하루 이틀 정도면 끝날 테니까.
"역시 아기는 귀엽다냐~"
"그렇지?"
"아기를 안고 있는 아리엘도 귀엽고냥."
아서 이외의 사람에게 귀엽다는 칭찬을 받아본 건 또 처음인데.
내 품에 안긴 아기를 유심히 바라보는 라뇨리에 천천히 손을 뻗어 귀와 귀 사이의 부분을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쫑긋거리며 쓰다듬기 편하게 움직이는 귀 덕분에 뭔가 잔뜩 치유 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덤이었고.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환영해, 할리벨."
작은 속삭임과 함께 눈꼬리를 둥글게 휘어보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우리들이 행복할 수 있는 순간의 시작.
내 미소에 마주 웃어보이는 아기를 보니 진한 행복감이 밀려왔다.
'앞으로도 힘내는 거야, 아리엘.'
나 뿐만 아니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뭐, 당장은 할리벨에게 젖을 먹이는게 우선이었지만서도.
그래, 잘 먹고 잘 커야 또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무럭무럭 자라다오. 으응,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지는 말고."
솔직히 말하자면, 다 큰 할리벨은 많이 봤으니까 작은 할리벨을 더 오래 보고 싶은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