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3 - 꿈에서 찾아온 그대.(3)
"무, 무, 뭔가요, 당신!!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죠?!"
"...여신?"
"이, 이건 악몽이야. 마왕이 내 의식 세계에 침범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ㅡ"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방이 깜깜한 곳이었다.
눈앞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여신이 있었고.
심지어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기 전에 보았던 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커다랗고, 작은.
...꿈 속인데도 딱히 가슴은 자라지 않았구나.
"어딜 보고 있는ㅡ"
"마왕님."
"할리벨?"
나와 여신만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이 더 있었다.
당연하게도 할리벨 또한 마지막에 보았던 것과 같이 커다란 상태.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온 할리벨이, 내 팔을 꼭 껴안아왔다.
"아앙, 마왕님 너무 보고 싶었다구요~ 아기일 때는 겨우 그 정도 밖에 하지 못해서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우흐흐흐흐흐흐..."
"...목소리가 조금 불순하구나, 할리벨."
"불순하다고 하지 말고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씀 해주세요!"
...누가 봐도 순수한 사랑이 아니잖아, 그거.
조금 떨떠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할리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는 듯이 더더욱 달라붙을 뿐이었지.
마치 눈앞에 있는 여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당신들, 제가 앞에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건가요?!"
"마왕님, 앞에 뭐가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말하는 쓰레기 하나만 있는 것 같은데."
"당신...!"
발끈하는 여신과 비웃는 할리벨.
명색이 마신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피조물과 같은 마족에게 놀림 당하는 처지라니, 안타깝구나.
물론 위로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리 여신을 용서했다고는 하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호를 해줄 생각까지는 없었으니까.
마족과의 일은 여신이 직접 풀어내는 것이 좋겠지.
"마왕! 뭐라고 말 좀 하세요! 다, 당신 저랑 화해하고 싶다고 말했잖아요?!"
"하지만 본인의 잘못은 본인이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무슨 어린아이 훈계하듯이...!"
마치 혈압이 올라 죽을 것 같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네.
과연 신도 혈압이 올라서 죽을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여기는 꿈속 세계니까 죽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겠구나.
"우리 진~한 사랑의 키스 할까요?"
"반가운 건 알겠지만, 진정하거라."
할리벨의 팔을 톡톡 두드리자 마치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린다.
정말이지, 이럴 때만 애 취급을 바란다니까.
"그치만, 꿈에서 깨어나면 한참 동안은 마왕님 품에 안겨만 있어야 하잖아요."
"대신 볼 뽀뽀라면 마음껏 해주마."
"흥, 저는 그 정도로 만족하는 서큐버스가 아니거든요?"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부드러운 손길로 할리벨을 밀어내며 이번에는 여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러니까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구나.
잔뜩 화를 내고는 있지만 정작 달려들지는 못하는, 그런.
"여신, 그러고 보니 우리끼리 통성명을 한 적이 없더구나."
"..."
여신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여신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더랬다.
어떤 이름일까.
나와 비슷할까? 아니면 완전히 다를까.
조금의 비슷함이라도 있다면 그것에 기대서 조금 더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름 같은거, 없어요."
"..."
하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마신, 혹은 여신이라고만 불려왔다면 또 달랐다.
물론 그녀를 칭하는 단어가 마신이나 여신만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다른 명칭이 있기는 했겠지.
'그분', 혹은 '하늘에 계신 위대하신 분' 이라던지.
확실히, 역사책이나 과거에 있던 책들을 보면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었더랬다.
그런데 설마 이름이 없던 것이었다니.
"이름이 없다니, 슬프지 않느냐."
"흥, 신에게는 이름 따위 불필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완벽한데 굳이 이름이라는 장신구를 달아놓을 필요가 있을 리가 있나요?"
"그런 완벽하신 분이 마족 꼬마의 촉수에 앙앙거리면서 뇌가 녹아 죽어버렸으면서~"
놀리는 솜씨가 장난 아니었다.
확실히, 여신의 최후는 누가 봐도 꼴사납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하고 안쓰러웠지.
당시에는 여신을 증오하고 있던 나조차도 엉망으로 절정하는 얼굴을 볼 때면 조금 불쌍하다고 느꼈으니 말이다.
"...닥치세요."
여신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할 터였다.
그야, 그런 추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이했다는 사실을 쉽게 잊거나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아마 나였어도 그렇지 않았을까.
응, 관계를 가지다가 죽었으면 죽어서도 절대 잊지 못했을 거야.
"그래도,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무 매달리지는 말거라."
"매달리지 말라니...! 그 빌어먹을 물건만 아니었어도 분명 완벽한 부활을 이뤄낼 수 있었는데! 그랬는데... 으흣..."
"...설마, 울어요?"
분노를 터뜨리다가 제 처지가 처량하다고 느낀 건지, 여신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는 가느다란 울음 소리와 함께 흐느끼기 시작했다.
설마 울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정작 울린 할리벨은 잔뜩 당황하고 있었지만서도.
"울지 말거라, 응? 나름 연장자인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에게 위로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
"조용히, 히끅, 하세요... 흑..."
하지만 그런 말에도 여신은 눈물을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자존심을 긁으면 화를 내면서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감정적으로 꽤나 몰려있는 것 같구나.
뭔가 몹쓸 짓을 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입맛이 썼다.
"미안, 미안하구나. 이렇게 울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
"정말이지, 신이라면서 이렇게 눈물이 많아서야..."
그러고 보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한참이고 울었었지.
언제나 권태로운 표정에, 마족들을 경멸한다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던 마신이 우는 걸 보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머니를 싫어한다고, 마족들을 이끄는 마왕이니 혐오한다고 생각했었었는데.
"여신, 마신, 마신님."
"...아."
"울지 마세요."
"......아, 흐, 흑."
전혀 아니었다.
그녀가 빌어먹을 정도로 이기적인 신이기는 했어도, 최소한 어머니에게 보냈던 사랑 만큼은 진심이었다.
여신은ㅡ 마신은 그저 자신의 아이와 단 둘이 있고 싶어했을 뿐.
그 과정이나 수단이 극단적으로 비틀리고 또 비틀렸다는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아가, 내 아가... 그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낳지 않는 편이 좋았어."
"..."
"그런 식으로 죽을 줄 알았으면,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을 주지 않는 편이 나았어!!"
"..."
"왜, 왜? 대체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 나는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 왜 다들 내가 나쁘다고 하는 거야? 애초에, 애초에ㅡ"
먼저 배신한 건, 너희들이잖아.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질척한 진흙이 쏟아져 내렸다.
지금껏 쌓여져 있던 마음의 오탁들.
가장 처음 배신 당했던 순간을 되새기며 채워온 감정들이었다.
"미안하구나."
"당신이, 뭘 안다고 사과하는 건데요?"
"어떻게 보자면 나 또한 그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물론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이런 허울 뿐인 사과는 별로 소용이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신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지금까지의 증오에 지쳐 있었다면.
이런 말 뿐인 사과로 그 증오를 조금이라도 씻어내릴 수 있겠지.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화해의 시작이 될 터였다.
"내 어머니를 봐서라도, 그리고 어머니를 닮은 나를 봐서라도 이제 그만 해주면 안 되겠느냐?"
"..."
"어머니도, 너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니 그런 선택을 하신 거라고 생각하니까."
죽는 그 순간까지, 어머니는 여신의 걱정을 하셨더랬다.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가실지.
앞으로 평생 미소 한 번이도 짓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지, 하고.
"그때, 어머니를 잃은 건 너 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어머니를 잃었지."
"그건ㅡ"
"왜 같은 상실을 겪은 사람들끼리 미워해야 하는 걸까."
이 세계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인간과 마족이 서로를 증오하며 전쟁을 펼친다.
결국 그것이 서로를 상처입힐 뿐일 텐데 감정에 몸을 맡긴채 계속해서 증오를 멈추지 않았더랬지.
그러니 지금에라도, 그 연쇄의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아니, 찍어야만 했다.
"마신님."
"..."
"부디, 제 청을 들어주세요."
"저는,"
고장난 라디오처럼, 여신이 몇번이고 목소리를 떨었다.
그녀가 보여준 증오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보다 그 농도가 짙었지만, 흘러나오기 시작한 이상 되돌릴 수가 없었다.
창문에 뚫린 자그마한 틈으로 강렬한 칼바람이 쏟아지듯, 자그맣게 난 마음의 구멍에서 온갖 검은 감정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눈물이라는 형태로.
"싫어, 싫어, 싫어...! 이런 식으로, 끝내면 안 되는데... 그런데 왜... 대체 왜...!!!"
"..."
"왜, 대체, 왜..."
제 가슴께를 부여잡은 여신이, 결국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고압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과는 정 반대의 행동.
지금의 여신은 마치, 상처 입은 아이와도 같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 아니라 지금껏 그래왔을지도 모르지.
"...그만, 하고 싶어."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겨우 한 글자였다.
"더 이상은, 힘들단 말이야..."
천천히 몸을 숙여 아이의 몸을 끌어안았다.
작고, 여리고, 잔뜩 상처 입은 어린 아이.
지금껏 보여줬던 모습을 벗어던질 정도로 엉엉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며 대체 어떻게 위로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전부 끝났어."
"...흑, 흐으..."
"누구도 상처 받지 않고, 아무도 증오하지 않아도 돼."
이제 남은 건, 그저 행복해지는 것 뿐이야.
그러니까, 더 이상은 미워하지 말자.
그저,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로 사랑하며 살자.
우리는.
우리는ㅡ
"가족이니까."
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