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8 - 단란한 가족.(5)
"그렇게 된 거야."
"...그렇구나."
케이의 말을 전부 듣고 나니 조금이지만 눈시울이 붉어졌다.
점점 자라고 있는 느낌이랄까.
언제나 마족을 증오하거나, 증오를 포기해도 좋아하지는 않던 케이가 이토록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니 감회가 새로웠다.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것이 이토록 감동스러울 줄이야.
"설마 울어?"
"...딱히 우는 건 아니란다."
"아리엘 울리지 마세요, 빌어먹을 도적!"
뭐, 이쪽의 아이는 처음과 별로 달라진게 없었지만서도.
인간도 싫어, 마족도 싫어 상태인 엘은 내 근처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가시를 세워댔다.
물론 나에게도 비슷한 태도이기는 했지만 그것 만큼은 조금 결이 다르다고나 할까.
마치 예전부터 대하던 버릇을 아직까지 고치지 못한 느낌이 강했다.
...그 정도로 질긴 악연이었다는 뜻이겠지만서도.
"하, 여신 주제에 주둥이가 기네? 대체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러면, 울리겠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네가 어쩔 건데?"
나를 울릴 생각이니? 왜?
케이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를 하지 못해서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엘은 케이가 말한 속뜻을 전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하면ㅡ 표정이 엄청나게 험악해졌거든.
"쓰레기."
"네가 한 짓보다는 앞으로 내가 할 일이 더 나을걸?"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린다.
싸우는 건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이렇게나 작은 아이들끼리 이마를 맞대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니 너무 귀여워서 마구 껴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채통이라는게 있으니까 참는 편이 낫겠지.
응, 사람이란 자고로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니까.
"자, 마마."
"응? 왜 그러니?"
쪽ㅡ
"어머."
아이의 손길에 고개를 숙이자, 부드럽고 따뜻한 것이 내 입술을 콕 찍고 멀어져 갔다.
다른 아이들과는 종종 하는 뽀뽀였지만, 케이와 하는 건 또 느낌이 달랐다.
솔직히 케이가 애교가 많은 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사이가 소원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다, 당신 지금 무슨 짓을?!"
"그렇게 불만이면 너도 하면 되잖아? 아니면 왜, 부끄러워서 못하겠어?"
"누가 부끄러워 한다는 건가요!!"
케이의 도발에 씩씩 화를 내는 엘.
명색이 여신이었던 존재가 한낱 필멸자에게 화내는 모습이라니 참 뭐랄까...
응, 그냥 귀엽기만 하네.
소리를 냈다가는 서로 아웅다웅하는 것을 멈출 것 같아서 잠시 숨을 죽였다.
'너무 심해지기 전까지만 지켜보고 있어야겠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분명.
"아리엘!"
"응? 나 불렀니?"
"...뭘 그렇게 싱글벙글 하고 있는 건가요, 대체."
하지만 나에게 불똥이 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엘의 부름에 빙긋 웃으며 쪼그려 앉자,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잔뜩 돌아왔다.
그 정도로 웃는 얼굴이었던 걸까.
뚱한 표정의 아이와 마주보며 다시 한 번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상하니?"
"그야, 당연하죠. 저와 있을 때의 당신은 언제나 표정을 구기고 있었으니까ㅡ"
"..."
"...물론, 요즘 들어서는 항상 웃는 얼굴이었지만요."
확실히, 과거의 나는 항상 여신ㅡ 마신을 볼때마다 표정을 구긴 채였더랬다.
아니, 분명 처음 봤을 때는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던 적도 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묻고 싶은게 하나 있어요."
"말해 보려무나."
이런 순간에 질문이라니, 어떤 걸 물으려고 그러는 걸까.
뭔가 잔뜩 더듬거리는 아이의 모습에 눈을 깜빡였다.
그냥 바로 말해도 될 텐데 뭐 때문에 뜸을 들이는 건지 모르겠네.
우리 사이인데 말이야.
1초, 2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붉어지는 뺨에 어디가 아픈 건지 걱정이 드려는 찰나.
"...저도 똑같이 하면, 싫어할 건가요?"
"어떤 걸?"
"저 도둑고양이가 당신에게 했던 행동이요."
케이가 나에게 했던 행동?
그러니까ㅡ 뽀뽀, 말하는 거지?
짧은 의문과 빠른 깨달음에 푸스스,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런 내 웃음 소리를 들은 아이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싫어할 리가 없잖니."
"...그러면, 할래요."
"뽀뽀를?"
"네."
머뭇거리면서도 살짝 허리를 숙인다.
그 앙증맞은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하마터면 저 자그마한 볼따구를 꽉 깨물 뻔 했달까.
천천히 다가오는 자그마한 입술을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온기가 내 입술을 콕 찍어눌렀다.
"이, 이걸로 저 도둑고양이의 흔적은 지웠으니까요!"
"좋아해줘서 고맙구나."
"...읏."
부정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꽤나 사이가 좋아진 듯 싶었다.
그래, 첫 만남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여전히 입술에 남아있는 온기를 느끼며 아이의 정수리를 슥슥 쓰다듬어줬다.
물론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있다고, 엘이 웃으니 역으로 케이의 표정이 퉁명스러워졌지만서도.
"비켜, 쓰레기 여신 주제에."
"읏?!"
내 품에서 엘을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안기는 케이.
그리고 그런 케이를 노려보며 이를 가는 엘.
아무래도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지는 건 꽤나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이 될 것 같았다.
...어쩌면 영원히 친해지지 않을지도 모르고.
"아무리 저를 쓰레기 여신이라고 해도, 아리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은 저라구요?"
"...무슨 뜻이야, 그거?"
"당연한거 아닌가요? 저는 당신들 같이 마음만 가족인게 아니라, 실제로 같은 핏줄이 흐르고 있는 진짜 가족이라구요?"
"..."
엘이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일리 있구나.
물론 일리만 있었지만.
아무리 같은 핏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남보다 더 못한 관계를 가지는 이들은 더러 있었다.
핏줄이 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가족보다 더 끈끈한 사이를 유지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고.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엘."
"...읏."
"나에게 있어서는 모두 사랑하는 가족들이니까 사이 좋게 지내야지."
무조건적으로 엄마 행세를 한다는 건 아니었다.
만약 아이들이 독립을 바란다면, 나는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해줄 터였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가족이라는 틀을 유지해도 되지 않을까.
진짜 가짜 같은 꼬리표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그냥 가족이라는 단어 하나만 존재하는 관계로 쭉 지내고 싶었다.
"나를 생각해주는 건 고맙지만, 케이의 마음도 이해 해주렴."
얼마 전까지 적이던 사람이, 심지어 지금까지 있던 일의 원흉인 사람이 갑자기 돌변한다?
케이의 입장에서는 엘이 또 무슨 꿍꿍이라도 숨기고 있는게 아닐까, 하고 걱정되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케이도 마찬가지로, 엘을 이해 해주렴. 동생이잖니."
"싫어. 애초에 제대로 반성 했다면 저런 소리를 하지도 않았을 텐데?"
저런 소리라고 한다면 분명 같은 핏줄 운운했던걸 말하는 거겠지.
진정으로 반성을 했다면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케이가 말하는 건 이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하나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면 지금 엘의 정신 상태는 어른보다 아이 쪽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어린애잖니."
"...쟤가?"
"그래."
뿔이 사라져서 그런 건지, 최후 때 겪었던 쾌락 때문에 머리의 볼트 몇 개가 풀어진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엘은 언젠가 겪었던 여신보다 훨씬 어린 상태였다.
뇌가 청순하다고 할까, 아니면 말랑말랑하다고 할까.
지금 엘의 상태는 여신일 적보다 뇌의 주름이 20%는 더 부족한 상태라고 볼 수 있겠지.
물론 뇌 자체의 크기는 훨씬 작아졌고.
"하긴, 하는 행동을 보니 애 같기는 하네."
"...지금 놀리는 건가요?!"
"이렇게나 쉽게 발끈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케이의 빈정거림에 엘이 잔뜩 얼굴을 붉혔지만, 이건 무슨 짓을 해도 케이가 이길 수밖에 없는 말다툼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있거나, 어머니와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애꿏은 마족들을 괴롭히며 지냈던 여신과 달리 케이는 산전수전 다 겪으며 이런저런 사람들과 지내왔으니까.
뭐, 그렇다고 진심으로 엘의 정신이 어리다는 뜻은 아니었지만ㅡ
예전처럼 나를 어떻게든 해보겠다는 느낌처럼 영악한 모습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자자, 싸우지들 말고 두 사람 모두 이리로 오려무나."
조금만 더 있으면 진짜 몸싸움이 날 것 같아서 두 사람의 팔을 주욱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곧바로 포옹.
한 번에 두 아이를 껴안았음에도 불구하고 품이 부족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딱 적당한 크기구나.
양 손에 있는 꽃들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니 가슴이 행복으로 가득 채워졌다.
"곧바로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
"..."
"그렇지만, 앞으로 살아가며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 서로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갔으면 좋겠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아이들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꽤 있었다.
부모라는 존재가 되어서 아이들에게 대해 아는게 뭐냐고 묻는다면 또 할 말이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아이들에 대한 것들을 알아가려고 노력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정말 싫지만ㅡ 노력은, 해볼게."
"...저도, 노력은 해볼게요."
그렇게 답하는 두 아이의 표정은 여전히 잔뜩 찡그려져 있었다.
내 품이 아니었다면 서로 왜 자기 몸에 손을 댔냐며 싸울 것 같은 표정.
하지만 표정을 빼고 본다면, 그 대답만큼은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착하구나, 내 아가들. 정말 착해."
아이들을 안은 팔에 힘을 더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뜩 속삭였다.
이런 좋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나는, 분명 행운 가득한 엄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