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0 - 사라지지 않는 것들.(2)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아이를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심지어 소리내어 우는 법을 모른다는 듯 숨죽여 울고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이질적이면서도 처량해 보이기 짝이 없었다.
이건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기억 때문인 걸까, 아니면 이 시절의 그녀가 이토록 연약한 존재였다는 뜻인 걸까.
그 누구도 일으켜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침묵만으로 일관한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본인들에게 자격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리엘, 자리에서 일어나야지. 옷 더러워지니까, 응?"
"히익..."
언젠가 마을의 아이들을 대하는 느낌으로 천천히 몸을 숙이는 순간, 아이의 얼굴의 희게 질렸다.
숨이 넘어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딸꾹질 소리.
자신을 보며 덜덜 떨려오는 황금빛의 눈동자는 언젠가의 기억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아리엘, 나는 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아, 아픈거 싫어... 싫어, 싫어어어!!!!!!"
"..."
"흐, 흐아아아아아앙!!!!"
바닥을 기듯이 움직여, 최대한 구석을 향해 들러붙는다.
거칠게 숨을 쉬는 모습이 마치 기괴한 무언가를 본 것 같은 느낌이라, 감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안 되는 것 같아. 일단은 다른 사람을 불러오자."
"..."
"..."
에밀리도 여신도, 그 누구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이 상황.
아이를 향해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간다면 분명 발작하게 되겠지.
지금의 아리엘을 바라보는 것도 힘겨운데,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분명 심장이 미어질 정도로 고통스러울 터였다.
일단은 자리를 비켜주자.
그리고, 아리엘을 안심시켜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해.
욱씬ㅡ
"...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 따위 절대 용서 받지 못한다는 것 쯤은.
동시에,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쯤은.
그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고 보니 마치 미궁 속을 해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길고 긴 미로 속에 갇혀서, 눈을 가린 채로 어떻게든 빠져나가겠다며 버둥거리는ㅡ
"미안, 아리엘."
짧은 사과와 함께 방을 나섰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발걸음 두 개와 함께 복도를 따라 걸어, 마침내 저택 바깥으로 나온 순간.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약을 만든 건가요?"
"...닥쳐."
"아, 혹시 아리엘을 작게 만들어서 뭐라도 해볼 생각이셨던 건가요? 이런 일 따위는 전혀 상정하지 않고 만든게 맞냐고요?!"
"...닥치라고."
등 뒤에서 따지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낮은 읊조림이 들려왔다.
짙은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느껴지는 목소리.
간신히 제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 자가 내뱉는, 경고의 소리였다.
"당신ㅡ"
"네가 잘한게 뭐가 있다고 나한테 목소리를 높이는 건데? 쓰레기 같은 년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눈을 감은 뒤 뒤를 돌아서자, 바닥에 쓰러진 여신과 에밀리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린아이인데도 손이 맵구나, 에밀리.
머릿속이 어지러운 나머지 쓸데없는 감상이 튀어나왔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쯤 해둬, 에밀리."
"...왜, 아리엘을 닮아서 더 이상 맞는 꼴은 보지 못하겠다는 거야?"
"아리엘이 싫어할 거야."
"..."
아리엘이 마신 포션의 지속 시간이 끝난 뒤 원래의 몸으로 돌아오게 됐을 때 서로 싸웠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진심으로 슬퍼하며, 눈물을 뚝뚝 흘리겠지.
자신 때문에 싸우게 되었다면서. 전부 자신의 탓인 것 마냥.
...정작 잘못한 건 우리들인데.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우리들 전부의 잘못이지. 애초에, 그렇게 쉽게 사라질 법한 일이 아니었는데도 대체 뭐가 그리 좋아서 행복해지길 원했는지..."
머릿속에 뜨거워서 절로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 열기를 쏟아내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만약 그 자리에 계속 있었다면 무슨 반응을 보여줬을까.
그리고, 어떤 모습을 보게 되었을까.
"아서?"
"...아리ㅡ 아니, 엘리야."
여신을 일으켜 세워준 뒤, 다시금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렸을 적 많이 듣던 목소리.
아리엘ㅡ 아니, 엘리야.
그녀의 품에는 자그마한 아이가 안겨 있었는데, 분홍색 눈을 똘망하게 뜬 채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것이 뭔가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왜 그렇게 표정이 죽상이야? 설마 아리엘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설마 이상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
"뭐라고 말 좀 하라구, 바보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강이에 자그마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내 정강이를 차낸 엘리야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너무하다고 말할 수도 없나, 전부 내 업보이니.
씩씩거리며 자신을 올려다 보는 엘리야에게서 어서 말하라는 재촉이 느껴졌다.
"네가 돌봐줘, 엘리야."
"뭐를? 누구를?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야기는 해야해야지!"
"...에밀리가 만든 포션을 마시고, 아리엘이 어려졌어."
천천히 시작된 이야기에 엘리야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에 놀라고, 아리엘이 우리들에게 그런 반응을 보여줬다는 것에 놀란 듯 싶었다.
"아니 ,그보다. 그런 아리엘 씨를 그냥 두고 온 거야?"
"...린이 남아있어서 괜찮ㅡ"
"바보야, 진짜!"
그 말을 끝으로 저 멀리 뛰어가는 엘리야에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래, 차라리 나보다는 훨씬 더 낫겠지.
***
그런게 아니야.
그런 말을 하려고 한게 아니야.
전부 기억하고 있어.
너희들이 나에게 했던 일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고통까지.
하지만 그건, 그건ㅡ
"가지, 마. 가지마...!"
ㅡ이 외로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조금만 더 참을걸.
조금만 더 참아서, 웃는 얼굴로 대해줬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멀쩡히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참아왔던 것이 폭발하듯 덜덜 떨려오는 몸뚱이에 진한 무력감이 정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어머니."
"...린?"
그렇게 다시금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고도 안심되는 목소리.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니, 익숙한 분홍색 눈동자가 나를 조용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린, 이구나.
에밀리의 색과 너무 닮아있어서 그런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던게 미안해졌다.
"바닥에 있으면 추워요."
"...으응, 고마워."
나를 일으켜주는 자그마한 손길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우와, 이렇게 보니까 나보다 더 크구나.
눈을 깜빡이며 린의 얼굴을 올려가 보자, 정수리에 린의 손이 슬쩍 올라왔다.
그 뒤에 이어지는 건 부드러운 쓰다듬음.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온기에 쾅쾅 뛰어대던 심장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이런 상황을 미리 생각하고 있어야 했는데..."
"아니, 괜찮단다. 솔직히 말하면 아이의 모습이 된 것도 꽤 신선한 경험이니까."
자그마한 손, 자그마한 발, 자그마한 몸.
시야도 엄청나게 낮고, 손쉽게 뻗을 수 있던 탁상에서 손이 닿지를 않았다.
옷이 마구 흘러내려서 조금 쌀쌀하기도 했고.
킁,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일단 얼굴부터 닦아내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
"여기요."
"고마워."
손수건을 내미는 린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얼굴 곳곳을 닦아냈다.
으, 눈물 투성이잖아.
전부 울고나서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워졌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엉엉 운게 또 얼마만이더라.
똑똑.
"아리엘 씨, 안에 계세요?"
"들어와도 돼!"
"그러면 들어갈ㅡ 진짜 작아지셨네......"
문이 열리고 나타나는 건 다름 아닌 엘리야였다.
아이의 품 안에는 할리벨이 안겨 있었는데, 최근 들어 엘리야도 할리벨도 서로에게 관심이 생겼는지 꼭 붙어다니고는 했더랬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참 적절한 등장이었다.
'하긴, 어떻게 보자면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도 하니까.'
나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이리저리 둘러보는 엘리야에 살짝 어깨를 움츠렸다.
무서워서 그런게 아니라, 그 기세가 심상치 않아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냥 몸이 작아졌을 뿐인데 꽤나 관심을 가지는구나.
따지고 보면 엘리야도 몸이 작아진 걸 텐데, 자기 자신이 작아진 것과 다른 사람이 작아진 건 꽤 느낌이 다른 듯 싶었다.
"아리엘 씨, 엄청나게 귀여워지셨네요~ 그 여신보다 훨씬 더요!"
"아하하..."
역시 아직은 무리구나, 엘.
어떻게 보자면 엘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귀여움이었지만, 엘리야에게 있어서 엘은 자신의 귀여움 범위 내에 들어가지 않는 존재인 듯 싶었다.
그래도, 사람이 늘어나니 조금 나은 것 같기도.
나를 보며 분홍색 눈동자를 빛내는 할리벨을 보며 빙긋 미소지었다.
"왜, 너도 신기해? 하긴, 내 작은 모습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뭐어, 따지고 보면 엘도 있기는 하지만."
"어머니와 엘은 분위기가 다르니까요. 표정도 그렇고."
엘 같은 경우에는 날카로운 고양이 상이라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느긋한 집고양이 상이란다.
같은 고양이니까 똑같은거 아니야? 하고 묻자, 엄청난 차이가 있다며 잔뜩 반박 당했다.
"귀여움의 차이가 있어요, 귀여움의 차이가! 여신 같은 경우에는 특유의 비호감이라고나 할까, 그런게 있으니까요!"
"...그건 그냥 단순하게 그 아이를 싫어하는거 아닐까."
"싫어요! 싫은데, 겨우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구요!"
"그, 그렇구나..."
말해오는 모습이 상당히 강렬했다.
그나저나, 엘리야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으니까 기분이 조금 묘하네.
어떻게 보자면 자기 자신에게 귀엽다는 말을 들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뭐어, 그렇다고 칭찬이 싫다는 건 아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