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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81화 (281/342)

Chapter 281 - 사라지지 않는 것들.(3)

쓰다듬어진다. 무심으로 쓰다듬어진다.

누군가를 쓰다듬은 적은 많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쓰다듬어지는 건 또 처음인데 말이지...

"아리엘 씨, 엄청나게 귀여워요."

"으, 으응..."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엘리야가 귀여운 것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걸까.

생각 해보니 기억 상으로도 어린아이들이나 작은 동물들을 좋아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나 꼭 달라붙어서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고 있는 거겠지.

머리가 엉망이 되지 않게 조절을 하는데, 그 능숙함에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아리엘 씨, 혹시 앞으로도 이렇게 지내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렇게 되면 아서한테도 시달리지 않을 수 있잖아요."

"...미안하구나."

"말투!"

"...미안."

정신을 차린 뒤에 원래 말투로 말하려고 했지만, 그건 어린아이답지 않다면서 곧바로 다그쳐졌다.

뭔가 나보다 한참 작은 아이에게 혼나는게 조금 신기하다고나 할까, 뭐랄까...

엘리야의 품에 안겨서 잔뜩 사랑 받고 있으니 얼굴이 후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 그... 엘리야? 혹시 언제까지 안고 있을ㅡ"

"평생이요!"

"힉..."

살짝 고개를 들어올리며 묻는 순간, 엘리야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엄청 빨갛게 변한 얼굴과 잔뜩 풀린 눈동자까지.

...상태가 조금 위험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은 아니겠지?

도와달라는 의미로 린을 바라봤지만, 린은 그저 말 없이 우리 둘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뭐, 잔뜩 사랑 받는 느낌이라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히얏?!"

"...아리엘, 씨."

어깨를 만져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버렸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민망한 소리에 서둘러 입을 틀어막기를 잠시.

천천히 내 몸을 돌려서 나와 눈을 마주치는 엘리야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기 엘리야? 조금 흥분한 것 같은데 잠시 진정해보지 않으련? 그으, 표정이 조금 무서운데..."

"어차피 저랑 아리엘 씨는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죠? 그렇죠?!"

"아니, 그, 린...!"

더 이상은 말릴 수 없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린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도와줘, 린!

뿔만 있었다면 분명 쉽게 떨쳐낼 수 있었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절대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리엘 씨, 좋아해요. 엄청나게."

"자, 잠깐?! 흐앗...?!"

끈적끈적하게 들러붙어오는 피부.

아이 특유의 말랑말랑한 살결이 꾹 밀착되자, 반사적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위험해, 위험해! 이대로라면 잡아먹혀ㅡ

"조금만 진정하세요, 엘리야."

"...윽."

툭, 하고 정수리를 두들기는 손길에 엘리야가 얼굴을 찌푸렸다.

린이라고 한다면 뭔가 손을 쓰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인데 의외로 손짓에 가감이 없구나.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폭력 반대라는 입장을 고수했을 텐데, 지금 만큼은 그저 고마움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다, 정말로...

"어머니."

"으, 응? 왜 그러니?"

"...아무래도, 조절이 잘 안 되시는 것 같아요."

"조절이라니, 무슨 조절?"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짚이는 건 없는데.

나에게 말하는 린의 얼굴도 엘리야처럼 약간 붉어져 있었는데, 뭔가 무언가를 가까스로 참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체 뭘까, 대체 뭐지? 내가 놓치고 있던게 있나?

"여신은 이 세계에서 다산의 신이라고 불렸죠. 교단의 지하에 있던 건 발정 효과를 가지고 있는 약물들이었고요. 무엇보다 여신의 체액부터 신체에 그런 작용을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으니까ㅡ"

"...있으니까?"

"여신의 핏줄이신 어머니도 비슷한 효과를 내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신체가 어려져서 그런지 조절이 더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가 몽마 쪽 느낌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왜. 내 주변에 있는 몽마들은 전부 다 분홍색 머리카락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지.

그런데 확실히 린의 말도 일리가 있기는 했다.

애초에 엘부터 평범한 신이라고 부를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려졌다고 왜 이렇게 된 걸까."

"아무래도 보호색 같은게 아닐까요? 어릴 때는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니까, 그런 특성이 극대화 시켜서 다른 이들에게 호감을 얻어낸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의 호감을 얻는다.

순간적으로 '이 특성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호감을 얻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그런게 있었다면 그런 고생 따위 전혀 하지 않았겠지.

"그, 어떻게 조절하는지 모르는데. 애초에 이런 힘이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고..."

"조금이라면 알려드릴 수 있어요. 어디까지나 편법이기는 하지만..."

린의 어렸을 적, 창관에 팔려 지낼 때의 일.

자그마한 입술 사이에서 천천히 흘러나오는 말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 아이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묻지 않았는데, 이 정도로 적나라할 줄이야.

마족들에게는 그저 호의만을 느끼게 하던 그 힘이,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발정을 이끌어 내는 힘이 된다니.

그로 인해서 여러 고생을 한 린이 고민한 것은 억지로라도 그 힘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꺼려지시면 말씀 해주세요."

"으, 으응..."

관계를 가지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관계는 아서와만 가져왔기에 조금 어색하다고나 할까...

아니, 애초에 린과 이런 짓이라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

천천히 내 몸에 손을 올리는 린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틀었다.

'역시 안 되겠어...'

싫다는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배덕감이 장난 아니었달까.

물론 과거에도 자그마한 몸집이 되어서 관계를 가진 적이 있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작지는 않았다.

동시에 그때는 확실히 '성인 토끼 수인' 정도의 크기였으니까.

하물며 상대가 같은 여자이지도 않았고.

"미안, 역시 안 될 것 같아."

"네, 어머니가 바라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엘리야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의 자제심은 있는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온다.

본인의 말로는 인간과 마족의 혼혈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면역이 있단다.

다르게 말하자면 인간 쪽이 섞여 있어서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남은 문제라고 한다면 바로 엘리야였다.

"엘리야, 엘리야? 정신이 들어?"

"...으응,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계속 보고 있으니까 적응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겨우 몸이 작아진 것 만으로도 대체 얼마나 시달리는 건지 모르겠네.

"아서랑 다른 사람들, 많이 충격 받았을까?"

"다른 사람들도 이해 해줄 거예요."

"...그래도, 내가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니까 다들 자책하고 있을 텐데."

사과를 하기에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그들이 잘못한 과오 때문에 공포에 떤 것이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없었던 일로 지나가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엇나갔다면 다시금 올바른 길로 끌어들이면 될 뿐.

조금 전의 사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으니까.

"어서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구나."

"..."

아서, 에밀리, 엘.

그 셋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고 싶지 않았다.

에밀리는 좋은 의도로 만든 포션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건 저주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몸을 벌벌 떨게 되는 약이라니.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슬퍼질 것 같기도 했다.

"트라우마를 치료해볼 생각은 없으세요?"

"치료하고 싶어. 치료하고 싶은데, 치료하기 위해서 그들이 두려움에 떠는 내 모습을 보는 건 조금 꺼려져서..."

이실직고 말하자면, 내 쪽에서 보고 싶지 않다는게 더 맞는 말이었다.

싫어.

더 이상은 싫어.

그때의 불행에 아직까지 매달려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 너무도 싫어서, 어서 빨리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똑똑.

"...아리엘, 혹시 들어가도 될까?"

"...읏."

봐, 그저 목소리만 들었을 뿐인데도 이렇게나 덜덜 떨고 있잖아.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면 문명 아까 같은 상황이 벌어지게 될 거야.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

지금은, 만나고 싶지 않아.

"어머니, 오히려 지금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렇게나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을 때 풀어내지 않으면, 곪아버릴지도 모르니까요."

"...내가, 이겨낼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강인하지 않아서, 지금 에밀리를 만난다면 아까와 같이 잔뜩 울어버릴지도 몰랐다.

...내가 우는 모습은 더 이상 보여주고 싶지 않아.

나에게 있어서 다른 아이들이 소중해진 만큼, 다른 아이들 또한 나를 소중하게 생각할 터.

그렇기에 얼굴을 마주하고 또 다시 울게 된다면 마음에 상처를 받을 것이 분명했다.

"어머니라면, 반드시 이겨내실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 정도의 응원을 무시하는 것도 조금...

결국 심호흡 세 번 뒤에 문을 열기로 약속하고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괜찮아, 아리엘. 그냥 에밀리를 만나는 것 뿐이야.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이니까, 너무 놀라지마.

"...들어, 와도 돼."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았을까?

아니, 분명 이상하게 들렸겠지. 내가 들어서 잘게 떨리는 목소리였으니까.

"그러면, 들어갈게."

끼익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부디, 내가 이 공포를 이겨낼 수 있기를.

작은 바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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