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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82화 (282/342)

Chapter 282 - 사라지지 않는 것들.(4)

솔직히, 에밀리와 나는 풀어야 할 것이 얼마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같이 지낸 시간이 그다지 길지 않다는게 맞는 말이겠지만.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당한 일들의 농도가 너무 짙어, 이 자그마한 몸뚱이가 전부 버텨내지 못하는 것일 터였다.

"...손, 잡아도 될까?"

"..."

머뭇거리며 흘러나오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아리엘.

지금의 에밀리는 괜찮아.

봐, 그때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작잖아?

...물론 지금의 나보다는 더 컸지만.

'어쩌면, 서로 덩치가 비슷해져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나를 괴롭히던 에밀리와 지금의 에밀리는 꽤나 차이가 있었으니까.

내가 지금의 에밀리를 무서워하지 않는 건 이쪽의 덩치가 훨씬 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자신보다 작은 사람에게 지레 겁을 먹는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테니.

반대로 이야기 하자면, 지금의 에밀리가 지금의 나보다 더 컸기에 무서워 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지.

"괜찮, 아."

나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사를 가득 담은 눈빛으로, 느릿느릿 다가온다.

혹여 빠르게 다가왔다가 놀라기라도 하면 아까와 같은 꼴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뭔가 겁 많은 소동물을 다루는 것 같은 느낌이네.

어떻게 보자면 다람쥐 같은 것보다 더 겁이 많은 상태이기는 하지만서도.

폭ㅡ

"...부드럽네. 큰 몸일 때보다 훨씬 더."

"그, 그래? 칭찬 해주니 고맙구나, 으응..."

짓누르는 느낌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

멍하니 내 정수리를 쓰다듬기 시작하는 에밀리에 조금이지만 몸에 긴장을 풀어냈다.

괜히 긴장하고 있다가 또 울어버리면 서로에게 안 좋을 뿐이야, 아리엘.

괜찮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이건 너를 해치기 위해 뻗어진 손길이 아니니가 안심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 진심으로 사과할게. 응, 이렇게 사과하는 건 또 처음이구나. 가장 먼저 했어야 하는 말이었는데..."

"...괜찮단다."

그러고 보니, 진심을 담은 사과를 받은 적이 없었구나.

아니, 애초에 사과 비슷한 말 한 마디조차 못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게 에밀리가 나빴다거나 그래서 사과를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무의식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을 뿐이겠지.

'내가 바라는 것이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당시의 내가 바라고 있던 건, 과거에 있었던 과오를 청산하기 위한 진심을 담은 사과 같은게 아니었다.

그저, 아직까지 아물지 못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상처 위에 덧붙일 사랑이 필요했을 뿐이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에밀리를 품었다.

물론 순수하게 사랑만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증오했던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결국 자신 또한 사랑을 주게 되는 일이 에밀리에게 있어서는 가장 큰 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지금까지 겪었던 일, 원한다면 나에게 전부 해도 좋아."

"..."

"너는 그럴 자격이 있고, 나는 그런 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있으니까."

"..."

진지하게 말하는 에밀리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이의 말에 일리가 있어서라고 생각했거나, 공감했기에 나온 침묵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실망감에서 흘러나오는 단편일 뿐.

내가 에밀리에게 이 정도의 믿음 밖에 주지 못했다고 느껴버리는 그런, 그런ㅡ

"그런 말은, 부디 하지 말아다오."

"...어째서? 나 같은 건 벌을 받을 자격도 없다는 뜻이야? 애초에 용서하지 않았잖아. 용서하지 않았으면 마음대로 벌하면 될 뿐이고, 그렇게 해서 마음 편해지면 되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에밀리의 분홍빛 눈동자에는 이유 모를 강박이 잔뜩 들어차 있었다.

마치 벌을 받기를 바라는 모습.

지금까지 쌓여져 있던 것을 전부 풀어내듯, 그 자그마한 입술에서 마치 절규와도 같은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벌을 받고 싶어. 네가 겪었던 고통 그대로, 나 또한 겪고 싶어. 너무나 죄스러워서,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런데도 네가 싫어하니까, 당신이ㅡ 엄마가ㅡ 싫어하니까. 그래서, 그래서...!"

"나는."

"..."

"나는, 내가 아플 지언정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에밀리에게 벌을 주지 않은 것은, 절대 이런 상황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크나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다른 이에게 그 고통을 조금이라도 겪고 싶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그것이 에밀리를 고뇌하고, 아프게 만들었다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니, 전혀 그렇지 않겠지.

"그래도, 네가 그렇게까지 벌을 원한다면 어쩔 수 없구나."

"...그 말은ㅡ"

"그래. 너에게 벌을 줄 거야, 에밀리."

벌을 준다고 말하자마자 생기가 도는 얼굴에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얼마나 혼나고 싶었던 거야, 이 아이는.

뭔가 내가 에밀리를 망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느낌이 조금 묘했다.

처음에는 분명 내 안에 지팡이를 꽂아넣고 화염 마법을 사용하려는, 읏ㅡ

"...지금부터, 눈 떼지 말고 봐."

"..."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질 때까지."

어떻게 보자면 에밀리에게 내리는 가장 큰 벌이기도 했다.

과연 나아질 수 있을지 아닐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떨림.

분명 떨림에 맞춰서 얼굴 또한 엉망이 되어있겠지.

그도 그럴게, 지금까지 참아왔던 감정을 조금 전에 풀어놨으니까.

"하윽, 윽... 흐아윽..."

"아리엘!"

"소, 손 대지ㅡ 큿... 흑..."

트라우마가, 짙은 트라우마가 내 뇌를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겨우 손에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하복부가 쓰리도록 아파왔다.

그래, 에밀리의 발길길에 아랫배를 다쳤었지.

마치 내 자궁을 망가뜨리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처럼 마구잡이로 발을 휘둘러댔더랬다.

만약 그때 정말로 무언가 잘못 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에밀리."

"...응."

"고개 들어서, 내 얼굴을 봐."

"..."

"어서."

나지막이 울려퍼지는 목소리에도 에밀리는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았다.

지금의 내 표정을 본다면 본인이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벌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벌.

"지금 보지 않는다면, 지금의 나를 앞으로 평생 보지 못할 거야. 그래도 좋겠어?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않아."

아무래도, 겁을 먹은 건 나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지.

몸이 작아진 건 나 뿐만이 아니었어.

에밀리 또한, 마찬가지였지.

***

자신의 잘못을 위우치는 죄인에게 가장 큰 벌은 그 죄인에게 벌을 주지 않는 것 아닐까.

하루 하루를 후회로 살아가며 고통 받으라는 듯한 느낌의 벌.

하지만 에밀리는 그런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들 전부 자신이 짊어져야할 죄값이었으니까.

그래, 이건 당연한 것이었다.

작아진 아리엘의 무너진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더랬다.

"당신, 설마 아리엘에게 돌아가려는 건 아니겠죠?"

"...아닌데?"

자신을 노려보며 쏘아붙이는 여신에, 반사적으로 그렇게 답해버리고 말았다.

어디까지나 거짓말.

만약 상대가 조금이라도 냉정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곧바로 들켜버렸을 정도로 형편 없는 거짓말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

지금 자신의 마음을 확실히 알아차려, 아리엘의 모습을 보며 고통 받으라고 보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따로 가볼게. 여신 감시 잘 하고, 아서."

"...그래."

"감시는 무슨 감시ㅡ"

짧은 작별 뒤에는 빠른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도망.

자신의 거짓말이 들킬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 한 행동이 아닌,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다.

쿵쿵쿵쿵쿵쿵ㅡ

'대체,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대체 왜ㅡ'

저 빌어먹을 여신을 보니까, 이렇게나 무서운 건데?

순간적으로 겹쳐 보이는 아리엘의 얼굴.

심지어 지금의 아리엘은 작아진 상태라서 그런지 여신의 얼굴을 보고는 아리엘을 더더욱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망쳐서 도착한 곳이 결국 아리엘이 있는 곳이라는게 우스울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고개 들어서, 내 얼굴을 봐."

무슨 정신으로 문을 두드렸더라.

멍하니 아리엘의 얼굴을 보다가, 내 속에 감춰져 있던 추악한 모습을 전부 꺼냈더랬지.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멍청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저열한 투정.

아니, 이걸 투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그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화를 내는, 그런 상황이었으니까.

'...고개를 들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바보.'

들고 싶지 않았다.

이런 내 이기적인 말에 상처 입었을 네 얼굴을 감히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그런 자격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에밀리라는 인간은, 겨우 이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존재야.

처음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ㅡ

"궁금하지 않아도 봐. 아니, 궁금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더욱 봐야 해."

"...무슨, 뜻이야?"

"지금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라는 뜻이야."

이해. 이해할 수 있다라.

눈물이 아니라 증오라면 차라리 나았다.

전부 받아들이고,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빈다면 이 검게 타들어간 마음이 조금이라도 차가워질 수 있겠지.

그래, 겨우 고개를 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아리엘에게 향해, 그 얼굴을 마주하면ㅡ

'어, 라...?'

아리엘의, 미소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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