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3 - 사라지지 않는 것들.(5)
내가 에밀리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인건, 에밀리가 전혀 무섭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섭다면 무서운 쪽에 가까웠지.
지금도 내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에밀리의 시선을 피해 린의 손을 붙잡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겁에 질려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에밀리. 이제부터 덮어씌우면 되는 거야. 안 좋았던 기억들을, 좋은 기억들로."
"...그게 무슨 뜻이야?"
린의 손과 얽혀있는 내 손을 흘긋 바라본 에밀리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었다.
분명 내 팔이 잘게 떨리는 걸 눈치채서 그러는 거겠지.
이런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반사적으로 저런 목소리를 토해내는 것이었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에밀리.
"내가 우는 걸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
"엄마잖아? 그러니까, 이제는 안 울 거야."
이런 모습으로 엄마를 자칭하는게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이 이상으로 강인해질 필요가 있었다.
지금 상황을 이겨낸다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을 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 모습으로 엄마는 무슨."
"왜, 그러면 친구라도 할까?"
"됐네요. 아리엘은 그냥 아리엘이니까, 아리엘로 남아줘."
빙긋 웃으며 손을 뻗자, 코웃음을 치면서 그 손을 마주잡는다.
약간의 떨림이 상대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기는 했지만, 에밀리는 그런 떨림 하나하나에 반응할 정도로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에밀리가 자기 자신을 두려워하는 나를 볼때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나는 그것 때문에 에밀리가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속이 쓰렸다.
이제서야 진짜 가족이 되었는데 과거의 일로 무너질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인데?"
"마을 나들이라던지. 평소에는 밖에 별로 안 나가잖아?"
"...평소에 안 나가는 거랑 마을 나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에밀리는 대인기피증이라니까.
다른 인간들이 있는 마을 로 간다고 말하기가 무섭게 표정을 와락 구긴다.
정말이지, 다른 살마들과도 좋게좋게 지내면 좋을 텐데 말이야.
노파심에 하는 말이기도 했지만,이것 만큼은 꼭 고치는 편이 나을 터였다.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인가?"
"딱히 이상한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그냥 네 대인관계능력을 조금 향상시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게 이상한 생각이라는 거야!"
이게? 어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열불이 나서 죽어버릴 것 같다는 얼굴이 되어버린다.
역시 인간과 마족 간의 생각 차이라는게 있는 걸까.
이래 봬도 마족 중에서는 가장 인간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갈 거야? 만약 네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딱히 가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에밀리가 싫다고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테니까."
"...읏."
"물론, 나는 엄청 가고 싶지만. 너랑 같이."
에밀리와 함께 인간 마을로 가본 적이 있었나?
일단 내 기억으로는 없었다.
언제나 서고에 틀어박힌 에밀리가 밖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건 겨우 세계수까지가 끝.
본인 말로는 연구할 거리가 꽤나 많아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내 입장에서는 전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달까.
"...따, 딱히 싫다고 한 적은 없어."
"진짜?!"
"그, 그래! 그러니까 얼굴 들이밀지마, 바보!"
"에밀리 한정이라면 바보가 되어도 좋아~"
"...읏."
와아, 나들이다! 랄까, 왜 이렇게 신난 거람.
에밀리가 함께 간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들뜨고 그랬다.
무의식적으로 느끼던 공포가 조금은 잦아든 것 같다고나 할까.
어쩌면 슬슬 에밀리를 무서워한느 감정보다 사랑하는 감정이 더욱 커진 걸지도 몰랐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 뿐이었으니 말이다.
***
평화롭던 마을은 예상치 못한 존재들의 등장에 한 차례 혼란에 빠졌다.
언젠가 보았던 마왕이 다시금 마을에 나타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왕과 똑같이 생긴 아이가 마을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번에는 인간으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서는.
"저기, 그렇게 촐랑촐랑 걸어다니지 말아줄래?"
"그치만, 신기한게 많은걸?"
두 사람은 마치 친구ㅡ 아니, 자매처럼 보였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한 아이가 언니, 검은색 머리카락을 한 아이가 동생.
하지만 동생처럼 보이는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분위기가 그들의 생각을 단정짓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자면 철 없는 언니를 챙기는 성숙한 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정체가 마왕과 마왕의 딸이라고 한다면 다들 소스라치게 놀라겠지만서도.
"안녕하세요, 주인 아저씨."
"그, 그래. 어서 오렴."
"혹시 이건 얼마 정도 할까요?"
그 작은 키로도 총총 걸어 까치발을 짚는다.
그러고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사과 하나를 콕 찍어누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마왕을 닮았던, 진짜 마왕의 딸이던 이제 와서는 별로 상관 없을 것 같았다.
애초에 최근 들어서 성녀님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으니까.
'마왕은 인간들의 적이 아닙니다. 그녀 또한 저희들처럼 피해자에 불과해요. 여신이라고 불린 마신의 손아귀에 놀아난, 불쌍한 존재입니다.'
처음에는 성녀님의 모습을 한 마족이 자신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의심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아무리 머리 위에 뿔이 달렸다고는 해도 그 타고난 성정까지 잃어버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는 사람.
자신에게 욕을 하는 이에게조차 미소를 건네는 사람.
그런 사람이 성녀가 아니라고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자, 이건 꼬마 아가씨에게 주는 선물이란다."
"와아, 감사합니다!"
사과 한 알을 받아들고는 해맑게 웃어보이는 아이를 보는 가게 주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이런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는 아이가 마왕의 아이라고?
아니, 마왕의 아이라고 해도 무슨 상관일까.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건 그저 순수하디 순수한 어린아이일 뿐이었는데.
"너도 먹을래? 틀어박혀만 있으니 과일 같은 건 잘 안 먹을거 아니야."
"...사용인들이 알아서 가져다 주거든? 나는 필요 없으니까 너나 많이 먹ㅡ"
"그러지 말고, 나눠 먹자."
심지어 혼자 먹는 것도 아니고 나눠먹으려고 하기까지.
그 자그마한 손으로 사과를 반으로 쪼개기 위해 낑낑거리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쉬쉬하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아이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자, 이러면 됐지?"
"와아, 감사합니다!"
제 손을 벗어나는 사과를 보면서도 화 하나 내지 않는 아이에게 반으로 쪼개진 사과를 건네주자, 아까와 같은 환한 미소가 주변을 밝게 물들였다.
머리카락이 검정색이라서 그런지 대비 때문에 훨씬 더 빛나는 것 같구나.
주변에 있던 이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자, 먹으렴."
"너 말이지ㅡ 하아, 이래서 나오기 싫었던 건데..."
"딱히 내 탓을 하면 안 되잖아? 애초에 마을에 온 건 전부 너 때문이고."
"내 탓이라고?"
싸우나? 하긴, 아이들은 별 것 아닌 이유로도 곧장 싸우는 법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법 했다.
물론 상황이 심각해질 것 같으면 곧바로 말릴 마음도 있었다.
굳이 그러지 않는 건 두 아이가 도란도란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상당히 귀여웠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인데 말도 참 잘 하는구나.
"자자, 엄마 말 들어야지?"
하지만 그 한 마디.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온 한 마디에, 주변에 있던 모두가 소리 없는 경악성을 터뜨렸다.
엄마? 엄마라고? 누가, 누구의?
누구 하나 빠짐 없이 잔뜩 표백된 머릿속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삐걱거리는 뇌가 멀쩡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아이는 다른 누군가의 엄마가 될 정도의 크기가 아니었다.
'소꿉 놀이라도 하는가보구나.'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가장 납득할 수 있을 법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대며 서로서로 웃어넘겼다.
너무 말을 잘해서 순간 믿어버렸지 뭐예요, 호호호.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하하하.
정작 당사자인 아리엘은 사람들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차라리 그 편이 그녀에게 있어서는 더욱 좋을 터였다.
만약 사람들이 무슨 반응을 했는지 깨닫는다면 분명 잔뜩 부끄러워할 터였다.
"저기, 꼬마야. 혹시 이것도 먹어보지 않을래?"
"꼬마? 아, 네 이야기구나, 에밀리. 어른이 주는 음식이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야지, 응?"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데?"
아무래도 엄마 역할에 상당히 심취해 있는 듯 싶었다.
손에 들린 꼬치가 자신에게 향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옆에 선 다른 아이에게 그것을 받으라며 재촉했다.
결국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한 분홍빛 머리카락을 한 아이ㅡ 에밀리가 꼬치를 받아들자,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방긋 미소를 지었다.
분명 낮인데도 불구하고, 태양이 하나 더 떠오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에밀리는 사람들에게 참 인기가 많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자주 데리고 나올 걸 그랬어."
"앞으로는 다시는 안 나올 거야. 특히 너랑 같이 나오는 건 더더욱 안 할거고."
"왜?!"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하고 투덜거리는 에밀리에 아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