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4 - 사라지지 않는 것들.(6)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응? 무슨 뜻이니?"
"모르면 됐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에밀리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잔뜩 답답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손에 들려있는 음식은 그 가짓수가 꽤 되어서, 전부 먹지 못하고 집으로 가야가야할 판이었다.
인간들 엄청 친절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래서, 이제 돌아갈 거야?"
"기왕 나온 김에 더 돌아다니자꾸나. 아직 해가 지려면 꽤 멀기도 하니까."
"...해가 질 때까지 있을 셈이냐고."
물론 해가 지기 전에는 돌아가야지?
아무리 따뜻해졌다고는 해도 북부는 북부였다.
밤이 되면 추워지기는 매한가지라, 이런 얇은 옷으로 돌아다녔다가는 금새 감기에 걸리고 말 터였다.
겨우 감기 때문에 앓아누울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몸이 멀쩡할 때 최대한 돌아다니고 싶어서 그래. 이해해줄 수 있지, 에밀리?"
"오늘 하루만이야."
몸 상태를 들먹이면서 말하는건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변명까지 할 정도로 그만큼 더 나들이를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에밀리도 이해 해주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응.
그렇게 다시금 걸음을 옮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옷가게였다.
아이들이 입을 법한 옷도 파는구나...
뭔가 미코가 입으면 엄청 어울릴 것 같은 분홍색 프릴 원피스의 모습에 입꼬리가 절로 치솟았다.
자그마한 무녀복이 아니라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은 미코의 모습ㅡ
"...사고 싶다."
"하아? 몸이 작아지더니 취향까지 어린애 취향이 되어버린 거야? 어차피 다시 커지면 입지도 못할 옷이잖아?"
"내가 입는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입으면 어울릴 것 같아서."
"...큼, 그런 거라면야, 뭐."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에밀리의 착각을 정정해줬다.
내가 이런 옷을 입어봤자 주접 말고는 더 안 되지 않을까.
마음 같아서는 에밀리에게도 이런 옷을 입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무너가 욕을 잔뜩 먹을 것 같아서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작아진 김에 예쁜 옷들을 자주 입으면 좋을 텐데 말이지, 정말로...
"그런 표정으로 봐도 나는 안 입을 거야."
"그게 아니라ㅡ"
"꼬마 아가씨, 옷 사러 왔니? 들어와서 입어봐도 좋단다."
"...앗, 네엡."
가게 앞에서 투닥거리고 있으니, 문이 열리며 인자하게 생긴 노인 하나가 걸어나왔다.
그러면서 옷을 사러 왔으면 들어와서 입어보라고 말하는데, 그 친절함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달까...
솔직히 옷을 사고 싶다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반쯤은 농담이었단 말이야.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자, 일단 이 옷부터 입어보렴."
"네? 네에..."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옷을 들이미는 노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내 옷을 사려고 온게 아니었는데ㅡ
하지만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야말로 못할 짓.
애초에 눈대중으로 사는 것보다는 직접 입어본 다음 사이즈를 확인하는 편이 더 좋을 터였다.
'큰 몸으로 이런 옷을 입었다가는 정말 주책이었겠지만, 지금은 작은 몸이니까 딱히 입어도 상관 없겠지.'
옆에 에밀리가 있다는게 조금 걸리는 사실이기는 했지만, 에밀리라면 충분히 비밀로 지켜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별로 입이 가벼운 아이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내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옷을 입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볼지도 모르기는 했지만, 뭐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겠지.
"어떠니, 에밀리?"
"...뭐, 그럭저럭 어울리네. 원래 모습이 떠오르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그래도 지금은 꽤 잘 어울린다는 뜻이로구나."
"그럭저럭이라고 말 했잖아, 그럭저럭."
분명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에밀리의 입에서 나온 '그럭저럭'이라면 말 그대로의 '그럭저럭'이 아닐 확률이 높았다.
누가 봐도 어울린다는 뜻이잖아?
물론 내가 과대 해석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지만, 다른 사람에 대한 칭찬을 거의 하지 않는 에밀리에게 있어서 그럭저럭이라는 평가는 꽤나 좋은 평가일 터였다.
"이 정도면ㅡ 음, 케이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이구나."
"켁, 그 녀석 주게? 애초에, 그 녀석이 그런 옷을 입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도, 매일 그런 옷만 입고 다니는 것보다는 낫지 않니. 전신 타이츠에 로브만 툭 걸치고는 말이야..."
"걔는 원래부터 그렇게 입고 다녔으니까 신경 꺼. 뒷골목에서 굴러먹다 온 녀석 아니랄까봐 다시 태어나도 똑같다니, 후우..."
투덜투덜투덜투덜.
케이의 이름이 나오니 곧바로 여러가지 불만들이 쏟아진다.
분명 불평 가득이었지만, 뭐랄까...
이 정도로 자세하면 오히려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게 맞겠지?
'역시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니까.'
애초에 두 사람, 별로 얼굴을 마주볼 일도 없는데 이 정도까지 생각하고 있다면 진짜 우정이라고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봐, 이야기 하면서도 즐거운 듯 입꼬리가 살짝 치솟아 있잖아?
에밀리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서도.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하자면, 에밀리는 자신의 일에 푹 빠지면 주변에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특징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ㅡ 그래.
신나게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고 있는데 그 험담을 당하는 사람이 바로 뒤에 와도 눈치채지 못한다거나 그런?
"나한테 그 정도로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이거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천재 마법사 에밀리 님?"
"히야아아악?!!?!!"
태연하게 내뱉어지는 대사. 그리고 새된 비명.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는 케이의 목소리에, 에밀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하긴, 누구라도 집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나타나면 놀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랄까, 역시 도적이라서 그런지 다른 사람의 뒤를 잡는 것 쯤은 쉽게 해내는구나...
"너, 너, 너너너너너! 대체 언제 온 건데?! 왔으면 인기척 좀 내란 말이야! 누가 뒷골목에서 구르던 창녀 아니랄까봐, 버릇 나쁘네 진짜!!"
"원래는 반갑게 인사라도 하려고 했는데, 어디 계시는 천재 마법사께서 내 험담을 하고 계시더라고?"
"...읏."
본인이 먼저 잘못했으니 반박을 하지는 못한다.
조금 정도는 에밀리에게 힘을 줘볼까ㅡ 했지만, 그냥 이대로 놓아두는 편도 좋아 보였다.
어른이 개입하는 건 상황이 더 심가해질 때나 그러는 걸로 하자.
사실 에밀리와 케이가 서로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는게 좋아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그나저나, 옷 잘 어울리네. 엄ㅡ 아니, 아리엘."
"칭찬 고맙구나. 물론 나보다는 너에게 더 잘 어울리겠지만 말이야."
"내가 그런 팔랑거리는 옷을? 하, 농담도."
케이가 가지고 있는 상처도 꽤 심상치 않아서,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은 저것 하나 뿐이라고 생각하는 무의식적인 행동 하나하나 전부, 보면 볼수록 안타까웠다.
분명 그런 자신을 내가 안타깝게 바라볼 것을 알기 때문에 최대한 모습을 비추지 않으려고 하는 거겠지.
그러니,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난 지금이 가장 절호의 기회였다.
"잘 어울릴 거야, 한번만 입어 보렴. 응?"
"싫어."
"부탁할게! 오늘 지나면 절대 이런 옷 입으라고 말 안할 테니까, 하루 정도만 어울려주려무나."
"..."
손을 모으고, 잔뜩 올려다본다.
이놈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작아져서, 겨우 케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에도 고개를 들어올려야만 했다.
하지만 뭐랄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는 꽤 나쁘지 않다고나 할까.
"...딱 하루 만이니까."
"와아, 고마워!"
나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점점 붉어지는 케이의 얼굴에 승리를 직감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 이렇게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다니까?
방긋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니, 케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 옆에 선 에밀리 같은 경우에는 뭐가 그리도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잔뜩 표정을 찌푸리고 있었지만서도.
...역시 케이가 같이 있어서 그러는 거려나.
"너."
"...응?"
"왜 저 녀석을 볼 때는 안 떠는 건데?"
이건 일종의 질투였다.
작아진 몸으로 자신을 처음 봤을 때는 울고불고 난리까지 쳤으면서 왜 케이를 볼 때는 아무렇지 않냐는, 그런.
물론 그 사실에 당황한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어라, 왜 괜찮지?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고는 하지만, 케이 또한 나에게 저지른 일이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ㅡ
'설마.'
꼬옥ㅡ
머릿속을 스치는 사실에 천천히 손을 뻗어, 에밀리의 손을 붙잡았다.
대답을 하다 말고 손을 잡아오는 내 행동에 에밀리가 꽤나 당황한 듯 싶었다.
그래, 내가 왜 케이를 보고 아무렇지 않냐고 물었었지?
"아무래도, 너랑 같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야. 봐, 하나도 안 떨리잖아?"
에밀리의 손을 쥐고 있는 손을 들어,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게 떨리고 있던 몸이 지금 와서는 꽤나 나아져 있었다.
이건 어느 정도 이겨냈다는 뜻이려나.
그 사실이 기꺼워, 에밀리의 손을 품 안에 꼭 붙잡았다.
'역시 따뜻해.'
한때는 나를 괴롭히던 손길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심장에 두근거림에 맞춰 넘실거리는 따뜻함.
그래.
나는 이 온기 속에서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