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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85화 (285/342)

Chapter 285 - 사랑을 가장 닮은 그대에게.(1)

"엘, 이 옷 한 번 입어보려무나!"

"잠ㅡ 당신! 갑자기 기운 차려서는 이상한 옷들 좀 들이밀지 말아줄래요?!"

생각해 보니 엘과 똑같은 외형이었으니 지금의 나한테 잘 어울리면 엘에게도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다.

아이는 그런 내 행동이 질색이라는 듯이 굴었지만, 그래도 한 번 정도는 꼭 입혀보고 싶었다.

...조금 과하게 산 면이 있지만서도.

"그런 옷들이 저에게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진심으로?"

"응, 엄청나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

내가 입었을 때도 어울렸으니까 분명 엘이 입었을 때도 잘 어울리지 않을까?

그런 의미를 담아서 고개를 갸웃하니, 입술을 비죽 내밀어댄다.

그렇게 삐졌다는 듯이 행동해도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니까 말이지...

마음 같아서는 억지로라도 갈아입히고 싶었지만, 엘이 정말 싫다고 한다면 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면 제가 거절할 수가 없잖아요."

"싫으면 굳이 억지로 입지 않아도ㅡ"

"싫은게 아니예요. 그냥, 이런 적은 처음이라서 어색할 뿐이라구요?"

마신일 때의 엘에게 옷을 선물하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때 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는 베일 하나만 걸치고는 그렇게 평생을 살았지.

어쩌면 엘에게 있어서 옷이란 불필요한 물건 정도의 인식일지도 몰랐다.

그저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데 사용하는 것.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누군가가 옷을 가지고 오는게 어색할 법도 했다.

"그,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지 말아주실래요? 지금까지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는데, 큿..."

"그래도 처음 옷을 갈아입는게 가족의 앞이니까 괜찮지 않니?"

"...그건, 그렇지만."

이제는 가족이라는 말에도 화내지 않는구나.

그 사실이 꽤나 기분이 좋아서 엘의 머리카락을 잔뜩 쓰다듬어줬다.

이런 쓰다듬에도 신경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 드디어 진짜 가족이 됐다는게 아닐까.

정작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엘을 보며 덜덜 떨어대기는 했지만ㅡ

ㅡ뭐, 좋은게 좋은거 아닐까.

"저, 정말 이런 옷이 저에게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엄청 잘 어울려, 엘. 내가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가장 예쁘구나."

"...칭찬해도 딱히 나오는 건 없다구요? 힘도 없는 신이라서 축복도 못 해주고, 당신에게 걸려있는 저주조차 해결해주지 못해요. 그리고, 성격도 안 좋고! 마족들도 인간들도 싫어하는 몹쓸 녀석이라구요, 저?"

끝 없는 자기 비하.

언제나 높은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있던 엘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분명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그것이 마족과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미안함인지 아니면 나에게만 해당하는 미안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여기서부터 시작으로 본다면 분명 좋은 징조일 터였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게 제일 좋은 방법이었으니까.

"괜찮단다. 이제부터 고쳐나가면 되니까. 엘로써 사는 것보다 여신으로, 마신으로 산 기간이 더 기니까 그 기간을 덮으려면 한참이고 걸리겠지."

"...덮는다고 사라질 문제가 아니예요."

"내가 말한 덮자는건, 과거를 없었던 일로 하자는게 아니야. 증오 위에 사랑을 덮자는 뜻이지."

내가 너에게 하는 것처럼.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엘은 분명 나와 닮아 있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닮아있지 않기도 했다.

"그나저나, 이건 제가 당신을 닮은게 아니라 당신 쪽이 저를 닮은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지만."

"어떻게 보자면 저는 당신의 할머ㅡ 큼, 할머니나 마찬가지니까요."

"할머니 맞잖아."

"..."

그냥 할머니가 맞았다ㅡ 지만, 아무래도 할머니라는 단어를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신이라도 늙은이 취급 당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대체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지?

할머니가 가장 무난한 호칭이기는 했지만 그 외에 다른 호칭을 찾으라고 한다면ㅡ

"그래도, 이름으로 부를게. 할머니나 손녀 같은 호칭을 쓰기에는 서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니까."

"...서로 작은 상태로 그런 말을 하니까 괴리감이 상당하네요."

"뭐, 나중에는 커질 거니까 상관 없지 않을까."

물론 엘 같은 경우에는 한참 걸리겠지만, 계속 살아가다보면 엘이 성장한 모습 또한 볼 수 있을 터였다.

언젠가는 꼭 볼 수 있으면 좋겠네.

아니, 그렇게 되면 아서가 나와 엘을 착각할지도 몰라.

만약에라도 아서를 빼앗기면ㅡ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아서가 아무리 품행이 바르지 못하고 조금 나쁜 남자 기질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말이지.

아무튼, 원피스의 끝자락을 붙잡고 얼굴을 붉히고 있는 엘은 꽤ㅡ 아니, 상당히 귀여웠다.

요즘 들어서 귀엽다는 평가를 자주 내리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려나.

그렇지만, 귀여운걸 귀엽다고 말하지 어떻게 해?

"그나저나, 너무 팔랑거리는거 아닌가요, 이 옷? 요즘 인간 아이들은 이런 옷을 입다니... 조금 남사스러운 것 같기도..."

"겨우 어깨와 허벅지를 드러내는 정도잖니."

"그게 남사스럽다는 거예요!"

소리를 빽, 하고 내지르는 엘에 고개를 갸웃했다.

부끄러워하는 건 좋지만 말이야, 너 다산의 여신 아니었어?

남자와 여자가 관계를 나누는 방법을 일러주고 그랬잖아.

솔직히 교단 지하에 있던 장소를 보고 식겁하기까지 했었는데.

"그거랑 그건 다른 문제라구요!"

"...딱히 다르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리고 말이지, 애초에 어린아이에게 몹쓸 짓을 할 인간 같은거 대부분 없으니까?"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살결이 너무 드러나는걸 지적하고 있던 거예요, 저는!"

이렇게 보면 확실히 엘도 옛날 사람이기는 하지?

얼마나 옛날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이 세계가 태어날 시점의 존재였으니까.

...그런데 그때도 나체가 부끄럽다는 인식이 있었나?

새삼 궁금해졌지만, 굳이 엘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를 이렇고 저런 꼴로 만들었었잖아? 그랬으면서 겨우 어깨랑 허벅지가 드러난다고 부끄러워 하다니..."

"그, 그건! 그건 복수였으니까! 그런 거라구요, 그건!"

"...은근히 순진한 면이 있구나, 엘."

"...몰라요, 바보."

진실만을 말했는데 어째서 삐지는 걸까.

그래도 지금 입은 옷을 벗지는 않는걸 보니 생각보다 마음에 들어하는 걸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말이지, 그 옷만 사온게 아닌데 말이지...

물론 엘이 부끄러워할 법한 옷은 저게 마지막이었지만서도.

"...이건."

"어떠니. 이런 옷이면 부끄럽지 않지?"

"...그나마 조금 낫네요."

북부의 찬 공기를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두툼한 외투가 마음에 들었는지, 슬쩍슬쩍 제 몸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역시 옷걸이가 좋으니 뭘 입어도 전부 다 잘 어울리는구나.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제서야 겨우 평범한 가족처럼 어울리는 둘 의 신세를 작게나마 한탄했다.

어머니가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겨우 옷 한 벌에 얼굴을 붉히고, 부끄럽다는 듯 행동하는 것을 보셨다면 분명 행복하게 웃으셨을 터였다.

'이제야 겨우 시작점에 왔어요, 어머니.'

이 길을 따라 걸어가면, 과연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이 부디 우리들의 행복이기를 바라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일까요.

아니면ㅡ

***

"...정말이지, 친한 척이나 하고."

쿵쿵, 하는 소리와 함께 뛰어대는 심장에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나 심장이 뛰었던 일이 있었을까?

아니, 전혀.

그런데 지금은 대체 왜 이렇게 날뛰는 건데.

'어머니, 꼭 자랑스러운 마왕이 될게요.'

스쳐가는 기억 속에 남은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 그때는 그랬지.

처음에는 그저 마구잡이로 날뛰는 마족들을 억제하기 위해 낳은 아이였다.

어떠한 애정도, 관심도 없는 그런 아이.

"어차피 나를 떠날 거라고 생각했었지..."

나를 떠나서, 자신만의 가정을 이루고, 결국 나를 배신한 마족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지금은 아니지만 먼 훗날에는 분명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러니까 정을 주지 말자.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하고, 배신 당하기 전에 먼저 버리는 거야.

그래, 처음에는 그렇게 마음 먹었었지.

마음을 닫고, 언제나 신인 것처럼 있자고.

'아, 아아아아아아아아...'

왜 슬퍼했더라.

충분히 이용할 만큼 이용했잖아.

마신이 어떤 존재인지 마족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그 어떤 마족들도 나에게 덤벼들지 못하게 만들었으니 이제는 없어도 되는 존재였잖아.

오히려 혹이 떼어진 것처럼 좋아했어야 했는데, 대체 왜?

'아가, 아가, 내 아가...'

언제부터였더라. 그 아이에게 사랑을 준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가장 처음 낳은 아이보다 아이를 더 사랑하게 된 것이.

언제부터였더라. 점점 기력을 잃어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게 고통스러워진 것이.

언제부터였더라ㅡ 언제부터였지? 나는 대체 언제부터ㅡ

'으앙, 으앙, 으아아아아아앙!!!'

'...흑, 아가... 읏...'

ㅡ처음부터, 였잖아.

"..."

심장을 꿰뚫는 송곳에 저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이대로 목소리를 내면 비명이 터져나올까? 아니면 울음이 터져나올까.

그 무엇 하나라도 내 입에서 튀어나온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 그래서 입을 다물었지.

그렇기 때문에 슬퍼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원망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것을 잃는다는 건, 바로 그런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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