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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87화 (287/342)

Chapter 287 - 사랑을 가장 닮은 그대에게.(3)

간만에 좋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잠도 푹 잔 것 같달까.

자리에 일어나서는 기지개를 쭉 켜자, 따끈따끈한 온기가 품에 꼭 안겨있었다.

어라, 뭐지.

"...엘?"

"으응..."

나와 똑 닮은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엘이 왜 여기에 있지?

아니, 분명 마지막에 엘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서 누웠던 것 까지는 기억하는데 말이지...

엘이 잠들어 있는 걸 보는 건 꽤나 희귀한 일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달까.

"엘, 조금만 비켜주지 않을래?"

"아리엘..."

"그래, 나 여기 있으니까ㅡ"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깨워보려고 했지만, 내 이름을 부르며 품 안으로 더더욱 파고든다.

이게 얼마 전까지 나에게 적대적이던 여신이라고?

새삼스러운 감상을 토해내며 푸스스 웃었다.

뭐, 조금 정도는 더 누워있어도 되겠지.

"마왕님, 기침하셨습니까?"

"아, 메이아."

살짝 문이 열리며, 메이아의 머리가 빼꼼 튀어나왔다.

뭔가 아이들을 다룰 때의 그 모습이라고나 할까.

내가 작아진 다음부터 나를 대하는 행동이 묘하게 부드러워졌다.

물론 평소에도 잘 대해주기는 했지만, 외형 탓인지 더 그렇게 느껴졌다.

봐, 지금도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잖아?

"엘 님, 일어나시죠. 벌써 아침이 훌쩍 지났습니다. 마왕님이 곤란해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으응."

오래간만의 잠이라서 그런지, 엘이 잔뜩 투정을 부렸다.

여신일 적에는 잠을 자지 않았으려나.

이제 신이라기보다는 마족에 가까운 신체였기에 충분히 잠을 자지 않는다면 피곤을 느끼고 그러는 듯 싶었다.

졸리다는 것을 느끼는 건 분명 처음이겠지, 응.

"...여기, 어디?"

"내 방이란다. 기억나지 않니?"

"...에."

멍하니 몸을 일으킨 엘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이 아직 다 깨지 않아서 흐리멍텅한 눈과 부스스한 머리카락.

느릿느릿 눈을 비빈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마침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나저나, 어제 내가 선물한 옷을 그대로 입고 갔구나.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다.

"아리엘?"

"그래, 나란다."

"제가 왜 아리엘이랑 같이 자고 있었죠?"

손을 쥐락펴락 하면서 무언가를 되새겨댄다.

내 손바닥 안에 남아있는 온기. 아무래도 엘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을 곱씹고 있는 것이겠지.

그러다가도 자신이 내 품에 안겨서 잠들었다는걸 깨닫고는 얼굴이 잔뜩 빨갛게 물들었다.

부끄러워하고 있네. 그것도 엄청나게.

"그, 그, 이건 일부러 그런게 아니에요!"

"나는 얼마든지 괜찮단다. 같이 자고 싶으면 언제나 찾아와도 되니까?"

"...으."

엘이 부끄러워하고, 어느새 방 안으로 들어온 메이아가 우리 둘을 바라보며 싱글벙글 웃는다.

역시 애들을 좋아하는구나.

같이 지내며 많이 부드러워진 메이아의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푸근해지고 그랬다.

대체 이런 이들이 피에 취하고, 어린아이들을 잡아먹었다고 소문을 낸 녀석들이 누구일까.

"배, 배 고프니까 식사하러 갈래요."

"식사는 이미 준비 해뒀습니다."

"고마워, 메이아."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마왕님."

에반젤린의 성에선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도 되나, 싶기는 했지만 메이아가 알아서 챙겨주는 거니까 크게 상관은 없으려나.

그렇게 오른손으로는 메이아를, 왼손으로는 엘을 붙잡고 식당으로 향했다.

"작아졌다고 했는데, 진짜 작아졌구나."

"미코."

"아리엘 씨, 귀여워요!"

식당으로 도착하고 보니 선객이 있었다.

황금빛 꼬리를 살랑거리는 미코와 그 옆에 앉은 엘리야.

그리고 엘리야의 품에 안긴 할리벨까지.

그러고 보니까 내가 작아진 걸 보는 건 다들 처음이구나.

타박타박 걸어가서 의자를 바라보니, 생각보다 엄청나게 높았다.

'이거, 제대로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니 ,어떻게든 올라갈 수는 있겠지만 그 모양새가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을 것 같달까...

잠시 망설이며 의자를 노려보고 있자니, 내 허리를 감싸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으앗, 메이아?!"

"곤란하신 것 같으셔서. 혹시 주제 넘은 참견이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손길에 몸을 맡긴 채로 의자에 앉혀지는 건 뭐랄까, 기분이 묘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행히 메이아의 도움으로 별로 꼴사납지 않게 의자 위에 앉을 수 있었다.

...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의자에 앉은게 더 꼴사나운 걸지도.

"그나저나, 두 사람이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을 줄이야. 뭐, 친하게 지내는 건 너희들 마음이지만 말이다."

"미코, 혹시 지금 질투 하는 거야?"

"지, 질투라니 무슨 말을 하는 게냐! 나는 그저, 저 속이 거멓게 물든 여신과 친하게 지내는게 걱정 돼서ㅡ"

"걱정 해줘서 고마워, 미코. 하지만 이제 착한 아이가 됐으니까?"

나와 똑같이 메이아의 도움을 받아서 자리에 앉은 엘이 제 머리를 쓰다듬는 내 손길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하고 있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엘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겉으로는 새침해 보이지만 실상은 부끄러움을 잘 탄다고나 할까.

이런 면을 잘도 숨기고 있었구나, 지금까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게 있어, 메이아."

"말씀하세요, 마왕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의자 위에 올라간 거야?"

"그건ㅡ"

순수하게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지만, 아무래도 저 둘에게는 부끄러운 일인 듯 싶었다.

아, 두 사람도 메이아가 안아올려줬구나.

메이아의 손길이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이미 해봐서 그랬던 거였구나.

하긴, 성인용으로 만들어진 의자 위에 아이들이 올라가려면 꽤나 고생을 할 테니까 말이지.

"언젠가는 메이아의 도움 없이도 올라갈 수 있겠지."

"...그런 식으로 위로를 해도 별로 도움은 안 되느니라."

"앞으로는 내가 안아서 올려줄게."

"그게 더 문제야!!"

퐁퐁 솟아오르는 귀를 바라보며 잔뜩 피식거렸다.

역시 반응이 좋단 말이지, 미코는.

엘리야 같은 경우에는 자유자재로 튀어오르는 황금빛 귀가 꽤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만지고 싶어서 미칠 것 같다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따로 더 오는 사람은 없니?"

"일단은 지금 계시는 분들이 전부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따로 드신다고 말씀 하셨기에."

"그렇구나..."

아서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다.

분명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거겠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아서ㅡ'

부디, 늦지 않게 와줘.

***

"네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는데, 아서."

"...레이나 씨."

세계수 밑동에 앉아 고양이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녹색의 머리카락.

무표정 속에 숨겨져 있는 부드러운 미소에 잠시 한숨을 토해낸다.

"아직까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건가?"

"...네, 아무래도 저는 용서 받기에 너무 이른 것 같아요. 아직까지 그렇게나 무서워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정말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알고 있었잖아, 아서.

모든 것을 잊기에는 너무 큰 일을 저질렀다는 걸,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마지막에 봤던 그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나를 보고 공포에 질린 그 모습.

덜덜 떨고, 눈물을 흘리고,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버린ㅡ

'아파,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윽..."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 그랬지. 떠올리고 싶지 않다고 해서 잊을 수 있는 기억인 건 아니었는데.

아리엘의 목을 조르던 감각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 가느다란 목이 손아귀에 쥐여져 있을 때의 그 느낌ㅡ

"아리엘은 네가 그러고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만나러 갈 수도 없으니까요."

어떻게든 과거를 잊기 위해서, 혹은 지금까지 쌓아온 친밀함을 표출함으로써 상처를 묻으려고 했다.

일부러 짓궂은 장난을 하고, 유쾌한 척 웃음을 얼굴에 달고 살았었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죄책감에 파묻혀 되돌리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엘리야에게 들은 분노의 말이 제 심장을 파고들어, 금방 무너질 것만 같았으니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ㅡ"

"바보 같은 소리 하지마, 아서."

툭, 하고 주먹이 정수리를 두들긴다.

딱히 힘을 주지도 않았고, 애초에 용사의 육체는 레이나의 주먹에 고통을 느낄 정도로 연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을 타박하는 마음 만큼은 제대로 느껴져,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방금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야,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만든 수 있을 리가 없어.'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아리엘이 기뻐할 리가 없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은 상처 속에서 피어난 꽃이었으니까.

그리고,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이 이상으로 좋아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것이 단순히 지금의 행복을 잃고 싶지 않아서 나오는 생각인 건 알고 있었지만서도, 멈출 수가 없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네가 무서워지지 않으면 되는 거잖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떨지 않도록, 지금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면 되는 거잖아. 아니, 애초에 아리엘은 너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이니까 따로 노력할 필요는 없겠지."

"..."

나지막이 울려퍼지는 목소리에, 천천히 그 얼굴을 떠올려봤다.

나와 함께 있을 때 웃는 아리엘.

두 사람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며 미소짓는 아리엘.

그리고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던 부드러운 표정까지.

'바보였구나, 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아리엘은 서로가 서로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왜 이제서야 깨달았는지 모를 정도로 당연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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