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89 - 겨울이 지난 다음에는.(1)
남겨진 마족들은, 인간들과 함께 그럭저럭 잘 살았다.
머리에 뿔이 달려있음에도 농사를 짓고, 육류보다는 채식을 주로 하는 이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존재들과는 다르다고 인식한 듯 싶었다.
확실히, 인간들이 알고 있는 마족들과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까 말이야.
피에 굶주리고 학살을 하던 녀석들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런 녀석들은 이미 전부 죽어버린지 오래였고.
"다들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구나."
"전부 마왕님 덕분입니다."
그런가...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으며 빙긋 미소지었다.
따지고 본다면 내 덕분이 아니라 에반젤린의 덕인 것 같은데.
중얼거리듯이 그런 말을 하니 메이아가 그 말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대륙 곳곳에 노예로 남아있는 동족들이 있겠지..."
그들 모두를 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 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만약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훨씬 더 수월하게 찾을 수 있을 텐데.
마을에서 지내고 있는 마족들이 다른 이들을 구해오겠다며 고행을 자처하기는 했지만, 북부 이외의 곳에서 마족들의 인식이 어떨지는 안 봐도 훤히 알 수 있었다.
분명 박해 받고, 노예 취급을 당하고 있겠지.
목에 노예의 목줄이 걸려있지 않다면 죽이거나 노예로 팔아넘기기 위해 납치할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곳에서만큼은 충분히 만족할 정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행운이나 다름 없겠지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이 모든 건 엘리의 덕이 가장 컸다.
정작 마왕인 나는 가족들과 함께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지.
물론 한참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녀의 노력에 어떻게든 보답하기 위해서 음식이라던지 안마라던지 사소한 것들을 해주기는 했다.
마족의 몸뚱이에 내 힘으로 해주는 안마가 쓸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서도.
"그나저나, 이번에는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이번에는 제가 여자아이 입니다, 마왕님."
어느 순간부터, 메이아와 나는 소소한 내기를 하고는 했다.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정해서 맞춘 사람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내기를.
처음에는 누가 제안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재미있었기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중 하나였다.
"여자아이라니,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지?"
"감입니다. 이번에는 분명 마왕님을 닮은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요."
"...나를 닮은 아이라."
정말 그랬으면 좋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 먹통이 되어버린 카운트는 내가 앞으로 몇 명의 아기를 낳아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엘에게 말해보니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는 아는게 불가능하다고 했더랬지.
"그나저나, 다들 잘 지내고 있을지 모르겠구나."
나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을 평생 동안 잡아놓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들도 가족이 있었으니까.
기억이 돌아온 순간 떠나려고 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작아진 몸에 적응을 전부 할 때까지는 이곳에 있는 편이 나았다.
몸에 적응을 다 했다고 해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무조건 호위를 끼워서 보내기도 했고.
"케이가 참 고생했지..."
"케이 님 본인이 원해서 하는 일이니 너무 염려치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절대적인 무력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여러 처제술이나 상황 대처가 좋으니 믿고 맡길만 했다.
심지어 속도도 상당했고.
뭔가 안심 귀가 서비스를 하는 것 같아서 느낌이 묘하지만 말이지, 으응...
"...북부도 많이 따뜻해졌구나."
"세계수가 꽤나 자라났으니까요. 보세요. 이제는 여기에서도 모일 정도로 커졌지 않습니까?"
메이아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세계수의 가지였다.
척박하는 북부의 땅에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
몇몇 사람들은 겨울의 축복을 받은 북부가 이종족의 신에 의해 더럽혀졌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생명의 축복에 환호하고 감사를 표했다.
모든 이가 굶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계.
모든 이가 얼어죽지 않는 세계.
근 몇 년 동안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구에 에반젤린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본 것도 며칠 전의 일이었다.
"이 정도면 좋은 결말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이 정도면 충분히 좋은 결말이야. 내가 이렇게까지 행복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걸었다.
분명 커다란 씨앗의 형태로 내 몸속에서 태어난 세계수는, 이제 내가 몇 명이 있어도 둘러안을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자라있는 상태였다.
심지어 주변을 뛰노는 작은 동물들과 조용히 피어있는 꽃들까지.
세계수가 왜 생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지 알 수 있을 법한 광경이었다.
이런 풍경을 다른 이들도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오셨어요? 어머니."
"레이나, 이제 슬슬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어머니는 언제가 되어도 어머니에요. 제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언제까지고 어머니라 부를 거라구요?"
그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레이나는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처음에는 마마라고 불렀으니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아진 것 맞지만서도...
물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나 둘 떠나가는 아이들을 추억하는 것도 상당히 지치는 일이었으니, 이렇게 매일마다 나를 어머니라고 불러주는 존재가 하나 쯤 있는 편이 좋았으니까.
"보세요, 아직도 이렇게나 작은 채니까 얼마든지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는게 아닐까요?"
"확실히, 엘프는 성장이 느리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구나."
"뭐, 그렇다고 하기에는 자라지 않은 사람도 몇몇 있지만 말이죠."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뻗어진 손가락 끝을 바라보니, 세계수의 가지 위에 앉아있는 에밀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네, 에밀리도 그때부터 거의 자라지 않았구나.
본인 말로는 몸이 작은 채로 있는 편이 더 편해서 그렇다고는 하는데, 누가 봐도 나를 위해서 자라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언제까지고 내 마음의 기둥이 되어주려는 생각이었겠지.
'...저런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건 걱정되지만서도.'
"에밀리!"
"뭐야, 언제 왔어? 오늘은 세계수에 오는 날이 아니었잖아?"
"그냥, 지나가는 길에 생각나서 들렸단다!"
입가에 손을 모으고는 소리를 질러야 겨우 목소리가 닿는다.
그건 에밀리도 마찬가지였는데, 소리를 지를 때마다 몸이 불안하게 흔들려서 괜히 말을 걸었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대체 저기는 어떻게 올라간거야.
설마 레이나가 올려준 걸까.
슬쩍 시선을 돌려 내 옆에서 웃고 있는 레이나를 바라보자, 본인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여댔다.
"에밀리! 불안하니까 혹시 내려오지 않겠니?! 그러다가 떨어지면 크게 다칠 것 같구나!"
"..."
"...안 들리는 건가?"
"제가 올라가서 말하고 올까요?"
"부탁하마, 레이나."
분명 조금 전까지 대화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우리들 중에서 세계수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레이나가 있다는 점일까.
대화를 할 때마다 위 아래를 오가야 한다는게 단점이기는 했지만, 레이나의 나무를 타는 속도가 상당했기에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엄청 길기는 않았다.
"지금은 내려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네요."
"내려올 수 없는 상황이라니, 대체 어떤 상황인데 내려올 수가 없다는 거야?"
"포션 실험에 실패한 반동으로 저기까지 올라가게 됐는데, 아무래도 내려올 방법이 없나봐요."
"야! 그것까지는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다는데요?"
레이나도 참 짓궂다니까.
분명 저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게 보일 정도였다.
에밀리는 시간이 지나도 귀엽구나.
천재 마법사지만 포션에서는 천재가 아닌 모양이었는지, 종종 실패도 하고 사고도 내고 그랬더랬다.
언젠가 피를 철철 흘렸을 때는 진심으로 심장이 멎을 뻔 한 적도 있었는데...
"레이나, 혹시 에밀리를 데리고 내려와줄 수 있겠니?"
"어머니가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에밀리의 의사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이대로 방치한다면 내 심장이 먼저 망가질 것만 같았다.
실험 때문에 다쳐도 바로 치료받을 수 있게 뭘 할 때는 세계수에서 하라고 말했는데 말이지...
설마 세계수에서 실험한 것 때문에 저 높은 곳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됐을 줄이야.
"레이나 님과 에밀리 님은 예전이랑 똑같네요."
"그러게. 어울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상당히 잘 어울리지 않니?"
"사고 치는 동생과 성숙한 언니 같은 느낌이랄까, 언제 봐도 보는 맛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면 또 두 아이를 구경거리 취급하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지만, 레이나와 에밀리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봐, 지금도 위쪽에서 무어라 무어라 다투고 있는데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그러잖아?
내려가지 않으려고 자존심을 부리는 에밀리가 레이나에게 공주님 안기를 당한 채로 바닥에 내려앉은 건 잠시 뒤의 일이었다.
"...너, 너무 뚫어져라 바라보지 말아줄래?"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에밀리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따뜻한 봄, 어느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