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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91화 (291/342)

Chapter 291 - 겨울이 지난 다음에는.(3)

할리벨이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에는 꽤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다.

대충 2년인가,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니까.

마족의 성장이 그렇게 느린 편도 아니었으니, 새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 체감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안아주고 싶지만, 이미 아이 하나가 안겨있어서 그러지는 못하겠구나."

"갠차나ㅡ 큼, 괜.찮.아.요."

"억지로 발음을 교정할 필요는 없단다. 자연스러운게 가장 좋은 법이니까."

물론 그 자연스러움이라는 것도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지만서도.

원래 성인이었던 할리벨에게는 발음이 잔뜩 엇나가는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싶었다.

확실히,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엘리야까지 있으니까 말이지.

부끄러워하는 건가 싶어서 살짝 정수리를 두드리니, 기분 좋다는 듯이 뺨을 슥슥 비벼왔다.

'강아지 같아서 귀여워...'

그러고 보니까, 강아지 수인은 또 어떨까나.

여우도 개과라고는 하지만, 여우의 행동 방식은 개보다는 고양이에 더 가까운 편이었으니까.

아무튼, 오두막에 찾아온 건 좋은 선택이었다. 할리벨이 걷는 것도 볼 수 있었고.

나에게 쭉쭉 팔을 뻗어대는 할리벨이 조금 안쓰러워 보여서, 엘리야에게 눈짓했다.

"엘리야, 혹시 할리벨을 탁자 위에 앉혀줄 수 있겠니?"

"네, 아리엘 씨."

내 허리 높이 정도에 오는 탁자 위에 할리벨이 앉혀졌지만, 할리벨은 그 정도의 높이로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꼼질거리며 열심히 일어서려고 했다.

앗ㅡ 차... 위험, 위험!

비틀거리며 아슬아슬하게 다리를 움직이는 아이에 서둘러 달라붙었다.

가슴이니 목이니 잔뜩 짓눌려서 조금 아프기는 했지만, 열심히 몸을 일으키는 할리벨의 모습을 보니 절로 뿌듯해졌다.

"마앙님, 츄우~"

"정말이지, 못 말리는구나."

"츄우~"

앵두만한 입술로 무슨 뽀뽀를 하겠다는 건지.

물론 아이의 모습이라서 성인이던 때의 야릇함이라던지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지만서도.

얼마나 나와 뽀뽀를 하는게 한이면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

쪽ㅡ

"에헤헤..."

"그렇게나 좋니?"

"세상에서 제일 조아요!"

그래, 그래. 나도 할리벨이랑 뽀뽀할 수 있어서 세상에서 제일 기쁘구나.

내 어깨를 붙잡고 서있는 아이를 꼭 껴안았다가 다시금 떼어냈다.

굳이 떨어진 이유는 아이가 답답해할 것 같은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엘리야 때문이었다.

역시 매일마다 붙어있어서 그런지 할리벨을 엄청 좋아하는구나.

"자, 여기 있단다, 엘리야."

"네? 네에..."

살짝 할리벨의 등을 떠미니, 엘리야가 더듬더듬 아이를 안아들었다.

어라, 이게 아닌가?

엘리야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엘리야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설마ㅡ

'할리벨을 안고 싶었던게 아니라 나를 안고 싶었던 거였구나.'

"자, 엘리야도 안겨도 좋으니까?"

"앗, 넵!"

얼마든지 괜찮다는 의미로 양팔을 벌려보이니, 할리벨을 안고 있던 엘리야가 도도도 뛰어와서는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아이쿠, 엘리야도 엄청나게 컸구나.

덩치가 커져서 그런지 엘리야가 달려들 때 잠시 몸이 휘청거렸다.

그래, 그래. 나도 반갑구나, 반가워.

"...앞으로도 이렇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그맣게 속살거리는 그 목소리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

가장 어른스러우면서도 질투가 많은 아이는 누구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면 딱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린.

내가 가장 믿고 있고, 나를 가장 믿어주는 아이.

분명 처음에는 엄청나게 어른스러웠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조금 질투가 많아졌다.

"...언제쯤 태어날까요, 이 아이는."

"곧 태어나지 않을까 싶구나. 엘리도 그렇게 말했고."

그럼에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지금 뱃속에 들어있는 아이를 질투하지는 않는다는 점일까.

내가 다른 아이들을 안고 있는 걸 보면 빤히 바라보다가 둘만 있을 때만 꼭 달라붙어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주변에 다른 아이들이 있어도 내 배에 찰싹 달라붙은 채였다.

정말이지, 벌써부터 사랑받고 있구나.

비식 웃으며 린의 몸에 팔을 두르니 아이 특유의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쿡쿡 찔러왔다.

"몸이 불편하면 말씀 해주세요, 어머니. 활력 마법 정도는 걸어드릴 수 있으니까."

"필요하면 꼭 말해줄게."

최대한 조작되지 않은 마나 속에서 태어나는 편이 좋다고 말했었나.

내가 불편해 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슨 마법이라도 걸어주고 싶어한다는게 느껴질 정도로 안절부절 못했더랬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까지 꽤 많은 수의 아이들을 낳아서 그런지, 오랫동안 아이를 품고 있어도 크게 힘들다거나 그런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며칠 동안만 힘들던게 몇 개월로 늘어난 정도니까 말이지.

"어머니를 닮은 예쁜 여자아이였으면 좋겠어요."

"푸흐, 다른 아이들도 다들 그렇게 말하던데. 왜, 아서를 닮은 남자아이도 괜찮지 않아?"

"...그건 조금."

"엣."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건 전부 다 똑같단 말이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결국은 어쩔 수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리고 만다.

그러게 아이들과 조금 잘 놀아주지 그랬어, 아서.

이 자리에 없는 아서를 타박하며 린의 손을 살짝 집어들었다.

"여전히 작네."

"어머니 앞에서는 언제까지고 아이인 채로 있고 싶으니까요."

"에밀리도 그런 말을 하던데 역시 닮았구나,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니까요."

확실히, 나를 제외한다면 에밀리와 린은 서로 가장 오래 붙어있는 조합이었다.

에밀리와 함께 포션을 만들거나, 책을 읽거나, 책을 쓰거나.

최근 들어서 서고에 방문하는 손님들이 늘어났는데, 그곳을 관리하고 있는 에밀리와 린을 보면 다들 하나 같이 깜짝깜짝 놀란다나 뭐라나.

물론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전직 천재 마법사와 그 스승이었지만, 외형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린아이 특유의 아우라는 아이들이 딱 아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냥 귀엽다는 뜻이지만.'

아무튼, 지금 에밀리는 자리를 비운 상태.

린이 나를 독차지 할 시간이었다.

...그래, 딱 그럴 타이밍이었지만ㅡ

"왜 그렇게 보나요, 당신?"

불청객이 등장했다.

아니, 내 입장에서는 불청객이 아니었지만 린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이라고나 할까.

나를 가장 먼저 엄마라고 불러주고, 나를 진심으로 엄마라고 생각하는 린에게 있어서 별로 달갑지 않은 존재.

"...지금은 제 시간이니 물러나 주세요."

"싫은데요?"

파지직, 하고 불꽃이 튄다.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말하는 건 존댓말이었지만, 무언가 잔뜩 반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서 린이 나를 독차지 할 때 즈음 되어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아졌단 말이지.

...에이,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린도 엘도 너무 싸우지 마려무나."

"딱히 싸우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마음에 안 들 뿐이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간과 마족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마와 마족을 인간과 마족으로 분리시킨 장본인인 여신.

확실히, 그런 식으로 보자면 린이 엘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을 터였다.

자신이 겪은 인생의 고통 대부분이 단순히 인간과 마족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것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당신이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할 건데요? 당신이 아무리 아리엘을 가족처럼 생각한다고 해도, 진짜 가족은 저라구요? 피가 통하는 진짜 가족 말이에요!"

"..."

"에, 아리엘. 왜 그런 눈으로 저를ㅡ 아얏?!"

한 대 쥐어박았다.

체벌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뭐랄까.

안쪽의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그런 식으로 놀리는 건 조금 자제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한숨을 폭 내쉬며 쥐어박은 부위를 슬슬 쓸어주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잖니, 정말이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렴, 엘. 말 한 마디에도 상처받을 수 있는게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니까."

"...읏."

감정선이 희미해 보이는 린이었지만, 그게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감정선이 희미하기 때문에 스스로의 감정 변화에 대해 더욱 예민하다고나 할까.

지금도 봐, 엄청 슬퍼하고 있잖아?

표정으로는 크게 변화가 없었지만, 누가 봐도 울적해져 있다는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사과 하려무나, 엘. 앞으로 계속해서 같이 지낼 가족인데, 이런 식으로 상처 입히고 그러면 안 된단다."

이런 엇나감이 하나 둘 쌓일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상태까지 향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해소하지 않는다면 안 되겠지.

"...미안해요. 방금은 제 말이 조금 심했던 것 같기도 하네요."

"...네, 심했어요."

"..."

"그래도,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말이죠."

가족. 그 한 마디가 어찌나 가슴을 울리던지.

그건 나 뿐만이 아니라 엘도 마찬가지인 듯, 나와 똑 닮은 황금빛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모두 가족이잖아.

한 사람도 빠지면 안 되는, 완벽한 상태의 가족.

"...가족, 이니까. 그렇네요. 가족이니까, 어쩔 수 없죠."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중얼거리던 엘이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에 대한 수긍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둘의 관계가 더욱 나아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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