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2 - 겨울이 지난 다음에는.(4)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아이는 이걸로 마지막이었다.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뱉은 케이가 제 이마를 스윽 닦아내었다.
"감사합니다, 케이 씨."
"조심해서 들어가고, 가족들이랑 행복하게 잘 지내."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저 인사는 엄마한테도 했었지.
이제는 완전히 아리엘을 엄마라고 부르게 되었달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서도.
시간이 흘러서, 케이의 몸은 과거의 그때와 비슷한 수준으로 자라났다.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전보다 키는 작지만 가슴이 컸고, 처녀인데다 몸에 있던 흉터들이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일까.
"...이렇게 보니까 확실히 유전인 것 같기는 하네."
죽기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조금씩 다른 면이 있기는 했더랬다.
물론 과거와는 자라온 환경 자체가 달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뭐, 선물이라도 사갈까."
이 지역에서만 파는 특산물이 있으려나? 휘파람을 불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순간 눈에 띄는 사람이 있어서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몸집에 꾹 눌러쓴 후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으응, 어디서 봤더라? 분명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인데ㅡ
"아, 맞다."
주먹으로 손바닥을 툭, 내려치면서 눈을 깜빡인다.
엄마를 구하고, 엄마가 구해낸 마족 꼬마.
대륙에 흩어져 있는 마족들을 북부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그 아이였다.
'으응, 뭔가 친하지는 않아서 말을 걸기 조금 그렇기는 한데... 뭐, 상관 없나?'
용사 파티 중 친근함을 담당하고 있는 케이였기에, 별로 친하지 않은 상대와도 충분히 대화할 수 있었다.
다른 바보들은 하나 같이 말주변이 없었으니까 말이지.
"저기 말이지, 잘 지냈어?"
"누구, 세요?"
"나야 나, 랄까... 이런 모습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나?"
그렇네. 잠시 스치듯이 보기는 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자신은 모습이 상당히 달랐더랬다.
당시에는 훨씬 작았었지, 으응.
이쪽을 잔뜩 경계하는 상대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으며 뺨을 긁적거렸다.
뭐라고 말해서 알아볼까.
내 이름을 알지 모르겠네.
"엄마ㅡ 아리엘이 구한 마족 꼬마 아니야?"
"마왕님을 아시나요?!"
화악, 하고 밝아지는 얼굴과 함께 마족 꼬마가 잔뜩 달라붙었다.
우와, 표정 변화가 엄청나네.
고개를 들어올리니 그제서야 그 귀여운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보니까 벨을 닮은 것 같기도 하네.
아, 이쪽은 벨을 본 적이 없던가?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그렇게 '마왕님'ㅡ 하고 소리치면 안 된다구? 북부라면 몰라도 다른 곳에서는 별로 좋지 않은 행동이니까."
"...죄송합니다."
"딱히 죄송할 것 까지는 없고."
시무룩해지는 마족 꼬마의 정수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마음 같아서는 로브를 벗기고 쓰다듬고 싶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도록 할까.
"여기에는 얼마나 있었어?"
"...한 달 정도요."
"시간은 돼? 따로 하고 있는 일이 있다거나."
"며칠 전에 노예로 붙잡혀 있던 마족들을 북부로 보내서, 지금은 시간이 남는 편이에요."
열심히 하고 있구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전에 마족 꼬마의 손을 잡고는 거리를 벗어났다.
일단은 주변을 돌다가 뭐라도 살까나.
"아직도 돌아올 생각은 없어? 마침 돌아가려고 했는데, 엄마가 너를 보면 좋아할 것 같아서 말이야."
"...제가 돌아가도 될까요?"
"당연히 돌아와도 되지."
오히려 좋아하지 않을까.
애초에 북부에서 떠난지가 벌써 몇 년째다.
솔직히 이 정도면 잊을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아직까지도 이 아이를 기억하고 있었다.
생명의 은인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 그 사람은 애초에 아이들을 좋아하니까 전부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제가 과연 용서 받을 자격이 될지..."
"우리들도 용서한 마당에 너를 용서하지 않을 리가 없잖아? 심지어 너는 마족이기까지 하잖아."
머뭇거리는 아이의 마음을 돌릴 확실한 한 마디였다.
정말이지, 엄마 근처에 있는 마족들은 하나 같이 엄마를 닮았다니까?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 없는 모습이 어찌나 이렇게 똑 닮았는지.
"자, 돌아가자. 그러니까, 이름이ㅡ"
"베르, 베르라고 해요."
"그래, 베르."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그곳으로.
***
오늘은 뭔가 느낌이 좋았다.
무언가 과거의 인연이 다시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고나 할까.
딱히 예지 능력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번뜩이는 무언가가 있기는 했더랬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보이시네요."
"뭐어, 나야 오늘 뿐만이 아니라 언제나 좋지."
내 무릎에 앉아있는 고양이ㅡ 벨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어내리며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고양이 수인들 중에서도 벨이 특히 더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배가 불렀음에도 충분히 안고 있을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런 벨이 부럽다는 듯 바라보고는 했지만ㅡ
미안, 다들 내가 안고 있을 정도로 몸집이 작지는 않아서 말이지...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질리도록 안아줘야겠는걸.'
다들 아닌 척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 누구보다 나에게 안겨있는걸 좋아하는 아이들이었다.
케이 같은 경우에는 이제 본인이 나를 안아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며 좋아했지만서도.
"랴뇨리는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어디 황무지에 떨어져도 잘 지낼 애니까요."
"확실히 그렇지? 어디 가서 미움 받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랴뇨리에 대한 평가는 한결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봤던 특유의 신경질적인 느낌이 사라진 랴뇨리는 유쾌함과 은근한 배려심만을 남긴 완전체가 되었다.
랴뇨리가 그 에반젤린의 품에 안겨서 고롱고롱 늘어져 있을 때는 엄청나게 놀랐지.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하는 에반젤린이라도 설마 업무 중에 랴뇨리를 안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동족을 찾아서 떠난 건, 그 애가 두 번째구나."
내 목숨을 구해주었던, 그리고 내가 구해내려고 했던 마족 아이.
잘 지내고 있을까?
가끔씩 편지가 오기는 했지만, 그 반가움은 직접 얼굴을 봤을 때보다는 훨씬 약할 터였다.
내 주변에 있는 동족이라고 해도 메이아 정도가 전부였으니까.
음, 동족에 굶주린 건가.
따지고 보면 린도 엘리도 마족인데, 으음...
"그 아이는, 고향에 잘 돌아갔으려나."
"케이 씨가 맡았으니 잘 돌아갔을 거예요."
그렇겠지?
케이는 이제 이쪽 분야에서는 전문가 수준이나 다름 없었으니 분명 잘 돌아갔을 터였다.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어서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
나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표하던 그 얼굴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았다.
"부디 가족들이 무사하기를..."
마족들이 죽인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내가 낳을 수 있었지만,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들은 내가 낳을 수가 없었다.
만약 다시 살아난 사람의 가족이 이미 죽은 채라면, 그 사람은 대체 어떻게 해야만 할까.
차라리 가족들이 있을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할 터였다.
그래, 살아있는 것이 지옥이니 차라리 죽어서라도 편해지고 싶었겠지.
"으음..."
"왜 그러니, 벨?"
"아니요, 뭔가 소리가 나는 것 같아서요..."
하나 밖에 없는 귀가 쫑긋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고양이 수인의 귀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건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랄까, 소리가 난다니 무슨 소리?
물론 내가 집중한다고 해도 듣지는 못하겠지만, 벨을 따라서 잠시 주변에 귀를 기울여봤다.
사라락, 하며 풀들끼리 스치는 소리.
조심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
그리고, 등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는ㅡ
"엄마!"
"케이!"
왁, 하고 달려든 케이가 그대로 나를 껴안았다.
만삭인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적당히 조절한 것에서 짙은 배려심을 느꼈다.
돌아왔구나, 케이.
이제 거의 내 키 만큼 커진 케이는 성인 여성 특유의 풍만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얼굴은 닮지 않았지만 몸매 만큼은 닮았다는 걸로 봐도 되려나.
"아이는, 가족들 품으로 잘 돌아갔니?"
"응, 잘 돌아갔어. 다음에 편지 한다고 하더라. 고맙다고 전해달라는 말도 하던데?"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고향으로 돌아간 아이의 가족이 살아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마워, 케이.
네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가.
부드럽게 내 등을 토닥이는 케이에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참아냈다.
"엄마, 울어?"
"안 울어. 좋은 일인데 울 수는 없잖아?"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니, 그게 무슨ㅡ"
살짝 떨어져, 나와 시선을 마주치며 말해오는 케이에 고개를 갸웃했다.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다니, 어떤 소식인데?
궁금증이 피어올라서 연신 눈을 깜빡이자, 케이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마왕님."
"..."
"잘, 지내셨어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왕도로 향하는 여정 중에 자주 들었던 목소리.
나를 구해주었던, 나를 위해 희생했던 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내가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아이의 목소리ㅡ
"...돌아왔구나."
"...네, 돌아왔어요."
서로를 마주보며 미소를 짓는다.
"어서 오렴. 그리고 늦었지만, 구해줘서 고마웠단다."
"저야말로,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때 다하지 못한 인사를 나눈 뒤에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서로를 껴안았다.
어서 오렴, 우리들의 집에.
품 안에 안긴 차가운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정말이지,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