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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93화 (293/342)

Chapter 293 - 해피 엔딩.

아이가 태어난다는 건 축복 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 어떤 아이가 태어나도, 무조건.

뭐, 이런 독백을 하는 건 무언가 큰 일이 벌어졌거나 그래서 그런게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아서."

"...아리엘."

"어떤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 마음 같아서는 너를 닮은 남자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침대에 누워있는 내 손을 꼭 붙잡은 아서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언제나와 같은 출산인데도 왜 이렇게 불안해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안심하라는 의미로 손을 꼭 붙잡았다가 놓으니 그제서야 조금 괜찮아진 듯 표정을 풀었다.

"나 닮은 애는 안 태어났으면 좋겠는데."

"푸흐, 뭐야 그게."

누가 봐도 나를 닮은 딸을 보고 싶어하는 느낌이었다.

정말이지, 한결 같다니까.

"아리엘 씨, 용사님.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문을 열고 들어온 엘리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내 앞에 섰다.

분명 엘리는 내 뱃속에 든 아기의 성별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텐데, 우리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했더라, 그건 훗날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자고 했었나?

"산모의 건강 상태도 좋고, 뱃속의 아기도 건강해요. 산후조리만 잘 하신다면 딱히 이상 없이 지내실 수 있을 거랍니다."

"...그렇구나."

세계수의 지속적인 치료 덕분에 평범한 인간 정도의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아서도 엘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요즘 들어서는 나를 혼자 두는 시간이 많아졌달까.

뭐, 뱃속에 아기가 들어있는 이상 아주 신경을 안 쓸 정도는 아니었겠지만서도.

"읏..."

"괜찮아, 계속 옆에 있을 테니까. 안심해, 아리엘."

"안심은 언제나 하고 있어, 아서."

진통이 시작되고, 서둘러 달라붙는 아서에 빙긋 웃어주었다.

정말이지, 나보다는 네가 더 불안해 하고 있잖아 바보야.

아기를 낳는 건 나인데 아서가 훨씬 더 무서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아기 때문에 내가 잘못 될까봐? 아니면, 아기가 잘못 될까봐?

물론 둘 다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ㅡ

"읏, 으하으으으으...!"

"배에 힘 주시고, 천천히 숨 쉬세요. 제가 따로 말하지 않아도 잘 하시겠지만, 천천히... 천천히..."

왼손은 아서의 손을, 오른손은 엘리의 손을 붙잡고는 꾹 힘을 주었다.

천천히, 천천히 내 뱃속에서 바깥쪽을 향하는 아이의 움직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ㅡ

"머리가 보여요!"

"윽, 하으으으윽...!!"

정신이 날아간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그 어떤 순간보다 정신이 멀쩡했다.

어째서일까.

그 정도로 아기를 맨 정신으로 보고 싶었던 걸까?

긴 한숨을 토해내며 숨을 골랐다.

분명 조금 전까지 부풀어 있던 배가 홀쭉해진게 느껴졌다.

"으앙, 으앙, 으아아아앙!!!"

"아..."

고개를 가눌 수 없어서 보지는 못했지만, 자그마한 울음 소리를 듣고서는 겨우 아이가 태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태어났구나, 드디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었다.

1년. 그 시간은 마족에게 별 것 아닌 시간이었지만, 아기를 품고 있는 동안은 생각보다 꽤 길었던 것 같기도 했더랬지.

언제쯤 태어날까.

언제쯤 세상에 모습을 보여줄까, 하고.

"아리엘 씨."

"...엘리."

"예쁜 따님이세요."

"아..."

양수 범벅이 된 아기를 품에 안은 엘리가, 천천히 아기를 내 가슴 위에 얹어주었다.

아가, 아가, 내 아가...

멍하니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언제나와 같이 젖을 물려주었다.

더듬거리며 내 가슴께를 두들기던 아기가 툭 튀어나온 첨단을 오물거리기 시작한 건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 뒤였다.

"내기는 내가 이겼네."

"...아서."

"널 닮은 예쁜 딸이 태어났잖아. 안 그래?"

"...그렇구나."

검은 머리카락. 아직 눈을 뜨지는 않았지만, 뭔가 나를 똑 닮은 황금빛 눈동자가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눈동자 만큼은 아서의 것을 닮으면 좋으련만.

쪽쪽 젖을 빨고 있는 아기를 품에 담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나를 닮은 아기가 태어났다는 건, 이제 끝났다고 봐도 되는 걸까.

지금까지 동족들이 저질렀던 죄악이, 전부 마무리 됐다고 봐도 되는 걸까.

"이제 마음 고생 할 필요 없어, 여보. 앞으로는 행복해지기만 하자."

"여보라니, 푸흐... 나는 아직 더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데."

"...아리엘."

"여보."

고마워. 내 옆을 지켜줘서. 나를 사랑해줘서. 포기하지 않아줘서.

내가 용서할 수 있게 해줘서.

당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어서.

나쁜 사람이었지만, 고칠 수 있는 사람이라서.

그래서, 정말.

정말, 고마워.

***

"사악한 마왕! 이 용사의 검을 받아라!"

"으아아악...!"

"스텔라, 아빠 괴롭히면 안 된다고 했잖니?"

자그마한 목검을 들고는 열심히 아서를 두들기는 아이에 살풋 웃어보였다.

대체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큰 건지.

분명 나를 닮았는데, 성격은 아서 쪽에 가깝다고나 할까...

전쟁을 겪지 않은 아서는 원래 이런 성격이었으려나?

"마마!"

"옳지, 옳지. 그보다, 옷이 전부 흙투성이가 되었잖아?"

"에헤헤... 옷 더럽혀서 미안해요..."

"뭐, 옷은 빨면 되니까 괜찮단다."

아이의 목검에 흠씬 두들겨 맞고는 바닥에 누워있는 아서를 향해 슬쩍 손을 뻗었다.

여보, 계속 그러지 말고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지 그래?

스텔라랑 같이 놀아주는 건 참 좋았지만, 연기가 너무 과하기는 했다.

정말이지, 남자는 커도 애란 말이지. 언제나.

"에휴, 내가 남편이랑 애를 키우는 건지, 애를 둘 키우는 건지 모르겠구나..."

"마마, 스텔라가 마왕 쓰러뜨렸어!"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용사 쪽을 쓰러뜨린게 맞지만 말이지."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텔라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옛날 이야기를 해줘도 왜 마왕과 용사 같은 이야기를 해줘서는.

심지어 자기가 용사였던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용사 시점의 이야기를 너무 실감나게 해줘서 스텔라가 이상한 물에 들어버렸다.

...뭐, 용사를 하고 싶다는게 이상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서도.

"자자, 이제 씻으러 가자. 바보 아빠는 아무래도 더 누워있을 것 같으니까."

"일어났어!"

"그렇다면 같이 씻고 와, 바보야."

권태기가 왔다기보다는 딸을 키우면서 사랑의 우선 순위가 조금 뒤바뀌었다고나 할까.

어쩌면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좁혀져서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뭐랄까, 서로에게 더 스스럼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서도 나도 서로 앞에서는 망가지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으응... 정확히는 스텔라의 앞에서였지만.

"마마도 용사 역할 해볼래? 특별이 스텔라가 마왕 역할 해줄게!"

"엄마는 괜찮단다. 여기 이쪽 마왕님을 깨끗하게 만들어줘야 하거든."

"에에..."

조금 실망한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지금은 일단 몸을 깨끗하게 하는 편이 더 나아보였다.

...사실 아이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해서 부드럽게 거절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이겠지만서도.

용사와 마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서 그런지 신체 자체가 너무 강했다.

그 증거로 목검으로 두들겨 맞은 아서의 몸에 자그마한 생채기들이 남아있을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면 스텔라가 다 컸을 때 상대도 안 되는거 아니야, 여보?"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 너랑 내 딸이니까, 어쩔 수 없을지도."

아서가 허허로이 웃었다.

스텔라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언제나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 와서는 저런 시원한 미소까지 지어보일 수 있게 되었달까.

뭐든지 자연스러운게 좋은 법이지, 응.

"자, 스텔라. 엄마한테 올래? 아니면 아빠?"

"용사는 마왕의 품에 안기지 않아! 그러니까 여신님 품에 안길래!"

"여신님이라니..."

푸흐, 하고 웃었다.

엘이 들었다면 분명 표정이 엄청나게 이상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자리에 쪼그려 앉고서는 살짝 팔을 벌렸다.

싱그러운 흙내음을 잔뜩 묻힌 아이가 내 품에 안겨드는 무게감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텔라가 용사고 마마가 여신님! 그리고, 파파가 마왕!"

"그래도 가족인데 용사 일행에 끼워주는 건 어때? 뭐랄까, 쓰러뜨린 마왕이 용사 일행이 된다는 느낌으로."

"에에, 그치만 마왕인데? 마왕인데 용사랑 같이 있어도 되는 거야?"

볼을 부풀린 스텔라가 잔뜩 불만이라는 듯이 아서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이유 없이 미움 받고 있구나?

"스텔라."

"응, 마마."

"사실은 마왕도 마신에게 이용 당했을 뿐인 불쌍한 사람이었단다. 그래서 용사님과 싸울 수밖에 없었던 거지."

저 멀리에서부터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아서, 또 그런 표정을 지어보이면 내가 미안하잖아.

결국은 해피 엔딩으로 끝났으니까 오히려 웃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나는 이미 떼어낸 것을 네가 이어 받아 가슴에 품고 있다니...

"으응, 스텔라는 그런 어려운 일 모르겠어..."

"그러면, 아직 적이 남은 걸로 하자. 마왕과 용사가 힘을 합쳐야만 쓰러뜨릴 수 있는 적이. 그러니까, 음ㅡ 마신이 있는 걸로."

"마신?"

"응, 마신."

"와아, 그러면 스텔라, 마왕도 쓰러뜨렸으니까 마신도 쓰러뜨릴래!"

"마침 마신 역할을 잘 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하나 있단다."

"누구? 누구?!"

조금 전까지 불만 가득이던 표정은 어디로 가고, 지금은 아주 눈을 반짝반짝 빛낸다.

한쪽은 황금색에, 다른 한쪽은 녹색.

나와 아서의 색을 모두 물려 받은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사과했다.

미안, 엘. 하지만 네가 마신인 건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어울려주렴.

"나, 그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응? 무슨 말?"

"마왕!"

비장한 표정으로 내 팔을 두들기는 스텔라에 슬쩍 몸을 돌리자, 아이가 아서 쪽을 향해 손가락을 척, 하고 내밀었다.

그러고는ㅡ

"아무리 네가 스텔라의 편이 됐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다는 건 변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죽인 만큼 낳아서 속죄해라!"

에.

에?

에에에에에에엑?!

"스, 스텔라?! 그, 그런 말은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거니?!"

"엘리 언니가 가르쳐줬어!"

"에, 엘리... 아아...."

해맑게 웃는 아이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미리 엘리의 입을 단속하지 못한 내 잘못이지.

속으로 한숨을 푹, 하고 내쉬자 아서가 쿡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런 말에 웃어주면 애가 또 한다니까 그러네?

"그러면 뭐ㅡ"

"..."

"나도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어버린 건가?"

...정말이지 못 말린다니까, 바보.

"'나도'라니,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아니란다, 스텔라."

"파파, 말해줘~ 응? 마왕인데도 스텔라가 특별히 동료로 받아줬잖아? 파파아아...!"

...그래도 뭐ㅡ

ㅡ이 정도면, 해피 엔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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