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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95화 (295/342)

Chapter 295 - IF : 전부 다 낳은 뒤에 지구로 보내졌다면.(1)

"..."

다시 돌아온 지구는, 상상 이상으로 반갑지 않았다.

아니, 이건 돌아왔다기보다는 추방 당했다고 보는 게 맞을까.

엘도 이런 건 생각하지 못했겠지.

설마 나에게 건 저주가 끝나자마자 지구로 전송되는 것까지가 하나일 줄은.

"아서, 엘, 엘리, 린, 에밀리..."

어두운 반지하 방 안에 있는 건 오직 나 혼자 뿐.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온기에 천천히 몸을 떨었다.

보고 싶다, 다들.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

***

"...아."

깜빡 잠이 들었었나?

멍하니 눈을 뜨고는 눈을 비비자, 길게 내려온 흑색 머리카락이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눈에 보이는 풍경은 그대로인 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해져, 반사적으로 한숨을 토해냈다.

돌아가고 싶어. 진심으로, 돌아가고 싶어.

띠리리리링!!

"깜, 짝이야..."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요란한 디지털음.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소리라 그런지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뭐야, 왜 아직까지 배터리가 다 되지 않은 건데?

멍하니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들자, 익숙한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개새끼]

"...하아."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은 내 기억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내 기억이기도 했더랬다.

솔직히 받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뭐랄까ㅡ

어디엔가 화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잔뜩 들었다고나 할까.

[여보세요? 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거ㅡ]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지마, 쓰레기 새끼야."

[너 누구냐? 누군데 그 새끼 전화를 대신 받ㅡ]

뚜욱.

속 시원하다.

마음 같아서는 그 면상을 두들겨주고 싶었지만, 그 정도의 의욕까지는 솟아나지 않는다는게 사실이었다.

안타깝네. 조금의 의욕이라도 있었다면 기억 속에서 당한 울분을 전부 갚아줬을 텐데.

꼬르륵ㅡ

"...뭐라도 조금 먹을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단 주린 배를 채우는게 우선이었다.

생명체인 이상, 먹지 않으면 약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비척비척 일어나서 찬장을 뒤지자,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컵라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거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컵라면이라... 얼마만에 먹어보는건지."

이 몸으로 직접 먹어본 적은 없지만, 먹어봤던 기억은 있으니까.

스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넣고, 뚜껑을 덮는다.

당장 열어서 내용물을 먹으라는 몸의 신호를 무시한 채 3분 정도 기다리면, 딱딱하던 면이 부드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정말 만찬이나 다름 없구나.

호로록ㅡ

"...맛있어."

원래 있던 세계에서의 음식은 간이 조금 약했더랬지.

하지만 지구의 음식은 MSG를 상당량 첨가해서 그런지 상당히 자극적이었다.

역시 기억상으로 먹은 것과 직접 먹는 건 느낌이 다른 걸.

조금 목이 마른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은 만찬이었다.

"하아..."

배를 채운 건 좋지만,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가지고 있는 거라고는 이 몸뚱이 하나가 전부.

머릿속에 있는 마법으로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애초에 뿔이 없어서 마법을 사용하지도 못했겠지만서도.

쿵쿵쿵!

"야! 안에 있는거 다 아니까 나와라? 전화 받은 년도 있으면 같이 튀어나오고!"

"..."

역시 그렇겠지.

전화를 그런 식으로 끊었으니, 열불이 나서 곧바로 쫒아왔을게 분명했다.

누가 봐도 목소리가 달랐는데도 이 정도로 흥분하다니.

아니, 오히려 목소리가 달라서 이렇게나 빨리 달려온 걸지도.

"셋 셀 때까지 안 나오면 문 부수고 들어간다. 하나, 둘ㅡ"

당장 나가지 않으면 문을 부숴버릴 기세로 두들겨 대길래, 서둘러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설마 모르는 사람에게 손찌검을 할 정도로 쓰레기지는 않겠지.

...그 정도로 쓰레기가 맞나?

"문 좀 작작 두들기거라. 어디 부술 일 있느냐?"

"...누구세요?"

처음 내 얼굴을 보고 하는 말이 존댓말.

기억 상으로는 반말 찍찍 내뱉고 돈 갚으라고 지랄지랄 해대는 녀석이었던지라, 이런 얼빵한 얼굴을 보니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쌓여있었구나, 나.

정확히는 기억 속의 인간.

"여기 사는 새끼ㅡ 아니, 여기 사는 녀석은 어떻게 됐습니까?"

"죽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그러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죽었다고? 그 자식이?"

죽었을 수도 있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혼자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린 남자가 나와 눈을 마주쳐왔다.

이곳에 살던 남자와 나의 관계성을 따져보려는 듯한 시선.

하지만 닮은 것이라고는 흑색의 머리카락 밖에 없는 존재에게서 과연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 새끼와는 무슨 관계지?"

"지인이다. 왜, 불만이라도 있는 건가?"

"지인, 지인이라... 이런 지인이라면 꼭꼭 숨겨두고 있을 법도 하지, 그래..."

무언가 탐색하려는 듯한 눈빛이 돌변한 건 그 순간이었다.

상대는 어디까지나 사체업자.

돈을 빌려준 상대가 죽어도 어떻게든 돈을 돌려받는, 빌어먹을 작자들.

그것이 돈을 빌린 당사자가 아니라 그 당사자의 지인이라고 하더라도 당연하리만큼 손을 내뱉을 정도의 버러지들이었다.

"네가 대신 갚아줘야겠어."

"무엇을? 이미 죽은 녀석의 빚을 말인가?"

"그래."

웃기지도 않는 소리.

작은 비소를 흘리며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 보자, 그 흉악한 면상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못생긴 얼굴이 더더욱 못생겨졌구나.

"무섭지도 않나 보지? 여기서는 네가 사라져도 아무도 너를 찾지 못할 텐ㅡ"

"계속 듣고 있기가 거북하구나. 꺼져라, 덩어리."

"ㅡ하."

어디에서 이런 용기가 나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꼴에 주먹을 으드득 꼬나쥐는 것이 우스워,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고는ㅡ

"꺼져라, 다시는 찾아올 생각 하지 말고."

"어, 라."

순간적으로 의식이 날아갔는지,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역시 썩어도 마족ㅡ 아니, 마왕의 신체.

아무리 뿔이 없다고는 해도 세계수의 치료를 받아서 그런지 상당히 쓸만했다.

이 정도 경고면 당분간 찾아오지 않겠지.

그리고 그 당분간의 시간이면 주변을 정리하고 떠나기에도 충분할 테고.

"내가 다시 문을 열었는데도 그대로 있으면, 그때는 사지를 잘라서 몸의 구멍 곳곳에 꽂아넣어주지."

"..."

쿵, 하고 문이 닫히고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속이 시원하기는 했지만, 이런다고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가지는 못할 터였다.

...정말이지, 울적한 하루구나.

***

꿈속에서지만, 가족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잔뜩 쌓인 먼지 냄새 사이에 희미한 사람 냄새가 나기는 했지만, 그것도 오늘로써 마지막.

일단은 발이 닿는대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엘이 지구에 있는 인간들을 납치해서 내 혼에 섞어넣은 것이라면, 분명 이곳에서 원래 있던 세계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테니까.

"...옷이 조금 크다는게 문제네."

바지 같은 경우에는 잔뜩 흘러내려서 실패.

결국 품이 큰 후드 하나만 뒤집어 쓴 채 밖으로 나섰다.

핸드폰 같은 경우에는 두고 나올까 생각도 했지만, 아직 통화가 가능했기에 혹시 몰라 가지고 나왔다.

"밤에도 너무 밝고, 요란스럽고, 복잡하고..."

언제 지어진지도 모를 정도로 낡은 아파트의 난간에 기대, 언덕 아래로 펼치진 풍경들을 눈에 담았다.

아름답지만, 동시에 차갑구나.

하지만 언젠가, 이곳에서 따스함을 찾아내게 된다면ㅡ

ㅡ그때가 분명 내가 돌아가는 날이겠지.

"신이라고 했으니까 근처에 있는 교회를 찾는 편이 나으려나."

낡은 철제 난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 나라에는 교회가 너무 많지 않았던가?

쉰 걸음 정도 걸을 때마다 교회가 하나씩 있는 수준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뭐, 지금은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가 아닐지도.

"그러면 우선은 이 주변의 교회부터 찾아보자."

대답을 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 언제까지고 무너져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높지만 낮은 아파트 아래의 풍경을 잠시간 눈에 담았다가, 아래층으로 향할 수 있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올 일 따위는 없겠지.

...그러니까 안녕, 내 기억 속의 누군가.

"잠시만요!"

"...응?"

하지만 그런 나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내가 살던 집의 바로 옆집의 문이 열리며 들려온 목소리.

기억 속 어렴풋하게 파묻혀 있던 음성을 되새기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혹시, 이 집에 사시는 분이랑 아는 사이신가요?"

"...일단은, 그렇구나."

별 다른 대화를 나누거나 한 적은 없었다.

그저 어렸을 때 몇 번 봤던 게 전부였을 뿐이지.

희미해진 기억 속의 존재와 대화를 나누는 건 생각보다 껄끄러운 일이라, 어서 대화를 끝마치고만 싶었다.

"혹시,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요 며칠 동안 보이지 않으셔서요."

"왜 찾는 거지? 애초에 어렸을 때 빼고는 별로 보지도 않았던 남자이지 않느냐."

"그걸 어떻게ㅡ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발, 부탁드려요. 알고 있다면, 말씀 해주세요!"

어째서 이토록 간절하게 매달리는 걸까.

빚쟁이들이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게 만들어 달라고 부탁할 셈인가?

그거라면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미 사라진 사람에게 찾아올 빚쟁이 따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직, 고맙다는 말을 전해주지 못해서... 꼭 얼굴을 보면서 말해야 하는데...!"

"...죽었다, 그 녀석은."

"...네?"

"이미 죽었다."

충격으로 굳어지는 여자를 무시하며 몸을 돌렸다.

이제야 기억났다.

어렸을 적,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아 도망쳐 온 꼬마를 숨겨준 것이 그 인연의 시작이었더랬다.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버지란 작자는 교도소로 끌려간 모양이었지만서도.

'...용케 그걸 기억하고 있었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제 와서 감사 인사를 하려는 것이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ㅡ

ㅡ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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