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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96화 (296/342)

Chapter 296 - IF : 전부 다 낳은 뒤에 지구로 보내졌다면.(2)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떠나가려고 하는 나를 붙잡는 손길에 결국은 멈춰서 버렸다.

죽었다는 말로는 미련을 끊어내지 못한 걸까.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결국은 그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섰다.

대체 왜 이러지.

당사자가 아닌 그저 기억 속의 일인데도, 대체 왜.

"그런 꼴로 대체 어디 가려고 하신 건데요?"

"...그냥, 근처 교회를 조금."

"그 모습으로 교회 가면 하나님께 천벌 받아요."

그렇게 말하며 제 옷가지들을 툭툭 건네준다.

옷을 주는 건 고맙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걸 건네주는 이유가 뭘까.

뭔가 바라는 거라도 있는 걸까?

최근 들어서 이유 없는 호의를 많이 받아보기는 했지만, 그곳에서 받는 호의와 이곳에서 받는 호의가 다르다는 것 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왜 나에게 잘 해주는 거지? 그런 식으로 나를 대한다고 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보시다싶이, 빈털터리라서 말이야."

"..."

손을 들어올리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알려주는 제스처였다.

"이제 보니까 상처가 많으신 분이셨네요."

"..."

이번에는 내 말문이 막혔다.

방금 뭐라고 말했지? 내가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고?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하는 게 예의 아닐까 싶기도 한데.

물론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기억에만 의존할 뿐인 희미한 관계였으니까.

"저녁은 드셨나요?"

"컵라면으로 배는 채웠다."

"그런 걸로 배가 찰 리가 없잖아요? 남은 반찬이 있으니까 밥이라도 먹고 가요."

익숙하다는 듯 뻗어오는 친절이 어색하다.

이걸 받아도 되는 걸까.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밥이라는 말을 들은 이 몸뚱이가 요란하게 울어대기 시작했기에, 결국은 자리를 잡고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앉은뱅이 탁자 위에 차곡차곡 올려지는 밥과 반찬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엄청나게 예쁘시네요. 그 사람에게 이런 미인 지인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나 말이다. 원래라면 안면식도 없어야 할 텐데."

"설마 막 그런 건 아니죠? 사체업자라던지. 돈 받으러 왔다던지 그런 거요."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숟가락을 들어올려 새하얀 쌀밥을 한 숟가락 떠올리니, 그 위에 반찬이 척척 올라갔다.

빠르구나, 정말로.

이 정도면 케이가 단검을 가지고 놀 때의 속도에 비견되겠어.

잠시 층을 이루고 있는 숟가락을 바라보자, 상대가 쿡쿡 웃어댔다.

"뭐가 그렇게 웃기느냐?"

"아니, 반찬 올려준 걸로 엄청 놀라시길래 웃겨서 그랬어요."

그러면서 웃음을 멈추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살만 한 것 같았다.

하긴, 그때 그 지옥 속에서 사는 것보다는 이렇게 혼자서 사는 편이 훨씬 좋겠지.

앙, 하고 숟가락을 입 안에 집어넣고는 오물오물 씹었다.

밥의 고소한 맛과 김치의 맵고 짠 맛, 그리고 계란물을 묻힌 햄부침의 맛이 한대 어우러져 꽤 자극적인 맛이 만들어졌다.

"...자극적이구나."

"진짜요?"

"물론 맛 없다고 한 적은 없다. 스읍, 조금 매운 거 같기는 하지만서도."

기억 상의 몸은 김치 따위로는 끄덕 없을 정도였지만, 지금의 몸은 매운 것에 별로 면역이 없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숨을 들이키며 눈을 깜빡거리자 눈 앞에 물컵이 내밀어졌다는 것일까.

생각보다 눈치는 빨라서 좋구나.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고는 잠시 혀를 빼물자 우후후, 하는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뭐가 그리 좋지?"

"아니, 그냥 미인은 무슨 짓을 해도 예쁘다는 생각을 했어요. 혹시 그 눈동자는 진짜 눈동자예요? 아니면 렌즈?"

"진짜 내 눈동자다만."

"와아~ 저 황금색 눈동자는 처음 봐요! 아니, 이렇게 보니까 뭔가 토파즈 색 같기도 하고... 아무튼, 엄청 예쁘네요."

"...그렇게 칭찬해도 나오는 건 없다. 하물며 눈을 뽑아주지도 않을 테니까."

"에엑... 그 정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구요? 원래 꽃은 꺾이지 않았을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요."

말을 정말 번지르르 잘 하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지금은 어서 밥을 해치운 다음 주변의 교회를 둘러보는 게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왜 가려고 하는데요? 원래 기독교인이었어요? 뭔가 기독교 믿을 것 같은 인상은 아닌데..."

"그러면, 무슨 종교를 믿을 것 같으냐?"

"으응, 딱히 무슨 종교를 믿는다기보다는 그냥 종교의 신 같은 걸 할 것 같아요."

...딱히 틀린 말은 아닌가?

일단 나는 엘을 쏙 빼닮았고, 엘은 여신이자 마신이었으니 어떻게 보자면 한 종교의 신을 할 것 같다는 말에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지구에 사는 인간 치고는 날카롭구나.

사고가 유연하다고 해야 할지, 망상이 자유자재라고 해야 할지...

"이렇게 된 거 종교라도 만들어 보는 건 어때요?"

"종교라니, 참나..."

"에이, 정말 당신쯤 되는 외모라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라구요?"

애초에 살아있는 사람을 믿는다니, 사이비잖아.

사람이 아니라 마족이기는 했지만, 겉보기에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한심하다는 느낌을 가득 담아서 상대를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인다.

아무래도 진지하게 한 소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진지하게 한 소리였는데요."

"내 생각에 답하지 말거라."

"그나저나, 우리 통성명 안 했는데..."

"...해야 할 필요가 있느냐?"

곧 있으면 영영 보지 못하게 될 사람의 이름을 들어서 무엇하게.

"왜, 다음에 또 볼 수도 있잖아요?"

"그럴 일 없다."

"너무 단호하신거 아니에요? 기껏 밥도 먹여줬다니만!"

"밥은 네가 멋대로 데려와서 먹인거지 않느냐. 나는 달라고 한 적 없다."

단호하게 대답하자 마치 풍선이 빠지듯이 푸쉬쉬 쪼그라든다.

...너무 칼 같이 잘라버렸나? 아니, 여기서는 차라리 여지를 주지 않는 편이 나아.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평범한 인간과 마족이 어울리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이만 가보마. 밥은 고마웠다."

"잠깐, 잠시만요!"

옆에 놓여져 있는 티슈를 뽑아 입을 닦아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에 더 있다가는 벗어나지를 못하겠어.

하지만 내가 걸음을 옮기기 전에, 옷소매를 붙잡아 오는 손길이 있었다.

...대체, 왜 붙잡는 거야.

"이거 놓거라. 애초에 너와 나는 남이지 않은가. 면식만 아는 사람의 지인이라고 이렇게까지 매달릴 필요가 있는 건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니, 대체 무슨 소리ㅡ"

"당신,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사람처럼 굴고 있으니까! 특히 그 눈동자가!"

잠시, 몸이 굳었다.

내가 죽을 사람처럼 굴었다고? 언제?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딱히 짚이는 점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동자라는 말에 고개를 돌려 방의 구석에 있는 거울을 보는 순간,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밖에 없었다.

'죽어있구나.'

삶을 살아가는 걸 전부 포기한 사람의 눈.

겨우 그곳에서 지구로 전송된 것만으로도, 내 영혼은 무의식적으로 자살을 원하고 있는 듯 싶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깨닫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은 사람이야."

힘이 풀려서 그런지 딱딱하던 말투가 툭, 떨어져 나갔다.

죽다니, 누가 죽는데. 내가? 어림 없는 소리.

거울을 보니까 겨울 알게 되었다.

나는 누구보다 살고 싶은 사람이라고, 반드시 살아남아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야 말 것이라고.

"그러면, 여기에서 살아요. 제 눈에 보이게, 제가 불안하지 않게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지? 우리는, 오늘 처음 본 사이잖아."

"밥을 먹였잖아요. 제가, 당신에게."

진지하게 그런 말을 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겨우 그 정도의 이유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다고?

그런 것 따위, 거절이야.

...거절할 생각이었는데.

"잠시만, 잠시만 있다가 가요. 교회는 얼마든지 보내줄 테니까, 제발."

"..."

눈을 마주치고나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죽으려고 한 건, 나 뿐만이 아니었구나.

당신도 마찬가지였어.

만약 오늘 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분명 죽음을 택했겠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쓸쓸하게.

"나는 그 남자가 아니다."

"알고 있어요. 제 옆집에 사는 사람은 여자도 아니고, 당신처럼 아름답지도 않거든요."

"너에게 친절하지도 않을 거고,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떠나갈 거야."

"평생 있으라고는 하지 않아요. 조금만 있으면 되니까ㅡ"

"좋아, 그러면 약속하자."

내가 떠나야 할 때가 온다면, 그 어떠한 미련조차 가지지 않고 쉽게 보내주기로.

동시에, 내가 어디로 가는지 절대 묻지 않기로.

"약속할게요."

그 대답에는, 약간의 망설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나 나와 함께 있고 싶은 걸까, 이 인간은.

방 구석을 장식하고 있는 두꺼운 밧줄에서 시선을 떼어내며, 상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면 일단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지.

"아리엘."

"...네?"

"내 이름이다."

"저는 민혜린이라고 해요."

한국식 이름.

세 글자로 이루어진 이름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런지 팔뚝에 소름이 다 돋아날 정도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한국식 이름으로 소개하는 편이 나았으려나.

"지내는 동안, 잘 부탁하마."

"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아리엘 씨."

손을 마주잡고는, 서로의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띄워올린다.

우리가 붙잡은 건 손일까, 아니면 서로의 목숨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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