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8 - IF : 전부 다 낳은 뒤에 지구로 보내졌다면.(4)
혜린과 함께 지내면서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한다면, 잘 때 상당히 따뜻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바닥에서 재우고 싶지 않았는지 침대에서 자라고 했는데, 내 쪽도 상대를 바닥에서 재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타협한 게 바로 같이 자기.
침대 크기가 꽤 되는 것도 있었고, 애초에 둘 다 덩치가 그렇게 큰 편도 아니라서 적당히 잘 정도는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심장에 안 좋다고요? 특히 제가 먼저 일어날 때요."
"그러면 나보다 늦게 일어나면 되지 않느냐."
"아니, 그건 언니가 잠이 너무 많아서 무리."
확실히 혜린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 수면 시간이 꽤 길게 느껴질지도 몰랐다.
그야, 저쪽 세계에서는 해가 지기 시작할 때 자기 시작했으니까 말이지.
대충 지구의 시간으로 따지고 혼자면 오후 8시에서 9시 정도가 아닐까.
매일매일을 그 시간에 칼 같이 자는 건 아니었지만, 자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특별한 일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뭘 하다가 자면 더 늦게까지 자서 절대적인 수면량은 전부 비슷비슷했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언니는 세계 제일의 미모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나 잠이 많은 거예요?"
"그렇게 띄워줘도 뭔가 떨어지지는 않는다만. 내 외모와 상관 없이 그냥 잠이 많을 뿐이다. 만약 내가 못생겼어도 많이 잤을 걸."
"뭐, 언니가 못생겼을 거라는 가정 자체가 불가능하지만요."
혜린의 말로는 내 얼굴 어느 부분을 손을 대야 못생겨질지 가늠이 안 된다나 뭐라나.
...그렇게 금칠을 해도 고맙다고 말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는데.
뭐라고 했더라, 내 얼굴만 봐도 힐링 되는 기분이니 딱히 뭘 해줄 필요는 없다고 했었나?
너무 과하잖아, 칭찬이.
"설마 부끄러워하시는 건가요?"
"대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도 평범하게 부끄러움은 느낀다만?"
"아니, 언니라면 뭐랄까 '위대하신 나니까 아름다운 것도 당연하지.' 라던지, '더욱 더 칭찬하고 찬양하거라, 내 미모를!' 같은 소리를 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란 말이에요."
...거짓말이지? 애초에 그거, 누가 말해도 이상하게 들릴 법한 말이잖아.
랄까, 지금 나를 그런 이상한 말을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이거지?
눈을 가늘게 뜨며 혜린을 노려보자, 본인도 조금 심한 걸 깨달았는지 슬쩍 고개를 피해댄다.
정말이지, 그렇게나 미안해 할 거면 처음부터 그런 소리를 안 했으면 되는 게 아니었을까.
"그보다 언니, 그 말투는 교정할 생각 없어요? 대체 한국어를 어디에서 배우셨길래 그런 말투를..."
"내 말투에 문제라도 있느냐?"
"뭐랄까, 21세기의 사람이라면 절대 쓰지 않을 것 같은 말투기는 하죠?"
그런가. 그런 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이 이런 말투를 쓸 리가 없지.
만약에라도 지구에 이런 말투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십중팔구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일 테니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바꾸는 것이 나을 것 같으냐?"
"에, 바꿀 수 있는 거였어요? 저는 이미 그 말투로 고정 되어버려서 절대 못 바꾼다거나 그런 걸 줄 알았는데!"
"...겨우 말투인데 바꾸지 못할 이유가 있겠느냐? 그 정도 쯤은 평범하게 바꿀 수 있다만. 애초에, 나도 평범한 말투 정도는 평범하게 사용할 줄 안다."
"진짜요?!"
아니, 내가 평범한 말투를 쓸 수 있다는 부분에서 그렇게 놀라지 않아줬으면 좋겠는데.
심지어 잔뜩 기대하고 있잖아.
마치 듣고 싶다는 듯이 딱 달라붙어서는 눈을 반짝이는데, 이 정도로 달라붙지 않아도 마음껏 보여줄 테니까 조금 떨어져줄래?
"그러니까ㅡ 음."
"..."
"혜린아."
"약해요. 조금 더! 겨우 세 글자로는 잘 모르겠다구요?"
"그런 말 좀 그만 해줄래? 솔직히 부담스러우니까."
"...헉."
언젠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 아서를 대할 때의 말투를 쓰니, 숨을 들이키며 움직임을 멈춘다.
뭐야, 그 정도로 안 어울렸어?
솔직히 말하자면 평범한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음, 미코라던지 엘 같은 경우에도 내 평범한 말투를 듣고 놀랐던 적이 있으니까 그거랑 비슷한 경우려나.
"언니, 그 말투 쓰니까 훨씬 더 어려보여요."
"원래는 몇 살로 보였는데?"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저보다 연상으로요."
"지금은?"
"저랑 동갑이요."
"그럼 그런 걸로 하자."
혜린이가 그러니까ㅡ 음, 스물 다섯이었나?
막상 스물 다섯이라는 걸 깨달으니까 조금이지만 양심이 찔렸다.
스물 다섯이면 그러니까 0을 빼서 반을 줄이고ㅡ
...더 이상 생각 했다가는 정말 마음에 큰 상처가 될 것 같으니까 그만 두는 걸로.
"기왕 이렇게 된 거 극한까지 가보도록 하죠!"
"극한까지 가자니, 무슨 뜻이야?"
"예를 들자면 애교를 부린다던지? 아니면 말 끝에 냥- 을 붙인다던지?"
"...그건 조금."
가족들에게도 하지 않은 짓이야, 그건.
애초에 내가 애교를 부릴 일이 없기도 했지만, 살면서 애교라는 걸 부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란 사람은.
절대 안 된다는 의미를 담아 혜린을 바라보자, 실망을 잔뜩 해서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시시 쪼그라든다.
그런 반응 보여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러면 제 애교 보여드릴 테니까 교환 방식으로 하는 건 어때요?"
"싫어."
"...우와, 즉답."
어쩔 수 없네요. 억지로 시킬 수도 없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혜린에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 가나?
평소에는 잘 나가지도 않던 녀석이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조금이지만 궁금증이 생겼다.
"어디 가느냐? 지금까지는 잘만 집에 있더니만."
"아아, 아르바이트 하러 가야 하거든요. 언니 만나기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둬서..."
"무슨 아르바이트더냐?"
"랄까, 말투 원래대로 돌아오셨는데요."
"이 말투가 편하니까 이 말투를 쓰는 거다만, 문제라도 있나?"
아무튼, 지금은 내 말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혜린의 아르바이트가 중요했다.
언젠가의 기억 속에서의 나는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
새벽 시간대에 했는데, 진상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더랬다.
술에 잔뜩 취한 뒤에 찾아오는 사람, 백원짜리 동전들로 8000원 어치를 구매하는 사람, '그거'하는 말과 함께 담배를 찾는 사람까지.
별에 별 인간 군상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편의점이라는 마경이었으니까.
"뭐, 간단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ㅡ"
"당장 그만 두거라."
"...네?"
"편의점 아르바이트 따위, 당장 그만 두라고 말했다.."
"...그냥 단순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인데도요?"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끔찍한 일이다."
내 기억 상의 인간들 대부분이 여러 의미로 지옥을 경험했지.
모두들 '개꿀 알바'인가 뭐인가 하는 달콤한 말에 속아넘어가서는 다들 무한한 진상들의 손에 정신이 갈려나갔었다.
뭐, 단편적인 기억들 뿐이니 맹신하면 안되겠지만 그래도.
"아니, 그래도 첫날부터 안 나가기는 조금..."
"첫날이니까 오히려 더 나가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니겠느냐."
"...그런가? 그러니까 뭔가 말이ㅡ 될 리가 없잖아요?!"
"흠, 그 정도인가."
"만약 언니가 돈을 벌어올 다른 방법을 말씀 해주신다면 나가지 않을게요."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방법이라...
음식점에서 일한다던지?
아니, 그것도 힘들어. 서빙도 설거지도 카운터도 전부 다.
PC방?
음,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PC 방은 그냥 PC방이 아니라 거의 음식점 수준이던데.
"원래 돈을 번다는 게 다 힘든 법이에요, 언니."
"그렇지만, 나는 네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말이다."
"...언니."
지금까지 꽤나 고생하면서 산 것 같은데, 조금은 편해질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런 의미를 담아서 말하자 혜린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완전 감동했다는 듯한 표정.
조금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곧 있으면 내가 귀찮아지게 될 것이라 알려주는 듯한 표정이었다.
"완~전 감동이에요!!"
"읏, 자, 잠깐! 그렇게 갑자기 안겨들지 말거라!"
내 허리를 꼭 안아서는 놓아주지 않는 혜린의 어깨를 탁탁 내려쳤지만, 나를 붙잡은 구속이 풀려나는 일 따위는 전혀 벌어지지 않았다.
힘을 써서 떼어내기는 싫은데.
아무리 뿔이 없는 마족이라고는 하지만, 지구의 연약한 인간의 몸뚱이로는 겨우 그 정도의 힘도 버텨내지 못할 터였다.
억지로 떼어내게 된다면 팔이 뽑히거나 뼈가 부러질지도 모르지.
"그치만, 덕분에 확신이 섰어요!"
"무슨 확신 말이더냐?"
"제가 열심히 돈 벌어서 언니한테 맛있는 것들 왕창 사드릴게요!"
"아니, 딱히 왕창 사줄 것까지야ㅡ"
"왕창! 사드릴게요!"
...그래,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아무튼, 그 말 뜻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겠다는 뜻이지?
"그러면 나도 따라가마. 옆에서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충분히 같이 있어도 되겠지?"
"...뭐, 그러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사장님이 돈을 더 주셔야 할 것 같은데."
"? 일도 안 하는데 돈을 더 받을 수는 없지 않느냐?"
"아니 그러니까..."
혜린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답답하다는 듯이 주먹으로 가슴을 툭툭 두들긴다.
"언니는, 언니의 외모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자각할 필요가 있어요."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도..."
그 정도로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기도 했다.
오히려 너무 띄워줘서 더 불신하게 된다고나 할까.
솔직히 이 정도면, 평범한 쪽에 더 가깝지 않나?
"...언니."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혜린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 정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