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0 - IF : 전부 다 낳은 뒤에 지구로 보내졌다면.(6)
"혜린, 한 번 나를 믿어보겠느냐?"
"이미 믿고 있는데요?"
"아니, 그런 의미의 믿음이 아니라 신앙적인 의미의 믿음 말이다."
"...네?"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으려나.
벙 쪄버린 혜린의 얼굴을 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술 마시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조금 아니었으려나.
"언니, 혹시 취하셨어요? 정말 귀여운 술주정이네요~"
"하나도 안 취했다. 애초에 맥주 같은 걸로 취할 리가 없지 않느냐."
손에 들린 과일 맥주를 홀짝이며 살짝 표정을 찌푸렸다.
대체 나를 얼마나 술 못 마시는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건데?
"그러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씀을 하신 거예요? 설마 진짜로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라던지 그런 건 아니죠?"
"...아니다. 내가 말을 잘못 했구나. 조금 전에 한 말은 잊어다오."
"아아, 언니! 그러지 말고 한 번 말해줘요!"
애초에 믿지도 않을 거면서 그러지 말거라.
입술을 비죽이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귀엽다며 달라붙어오는 혜린에 조금이지만 기분이 상했다.
너 귀여우라고 한 행동이 아닌데.
"뭐, 그래도 말이죠? 언니 같은 사이비라면 믿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이비라니..."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사이비라고 볼 수도 있으려나.
엘이 신으로 있는 종교 비스무리한 걸 따라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음, 기도할까요?"
"..."
"위대하신 아리엘 님, 제가 이렇게 믿고 있사오니 제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주옵소서."
손을 모으고는 기묘한 말투로 기도를 시작하는 혜린에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뭐야, 그게. 누가 봐도 사이비의 기도잖아.
그래도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런 가벼운 분위기는 언제나 환영이니까 말이지?
"그나저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라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달라니, 그건 신에게 비는 기도가 아니지 않느냐."
"언니는 신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건강하고 오래 살아달라고 말한 거라구요? 언니 같은 사람이 단명 하는 건 세계의 손해니까, 응응."
"미인은 단명한다는 말도 있지 않느냐."
지나가듯이 한 말이었는데, 뭔가 잔뜩 상처 받았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버린다.
...뭔가 역린이라도 건든 걸까.
"미안, 미안하구나.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아다오."
"...앞으로는 그런 농담 하지 말아주세요, 언니."
미인은 단명한다는 농담에 이 정도로 반응 했다는 건, 지인 중 누군가가 단명 했다는 뜻인 걸까.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다가붙는 혜린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또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고 말았어.
지구로 돌아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서의 얼굴을 떠올리며 품 안의 따뜻함을 꼭 껴안았다.
'네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리엘. 나는 네가 이제 그만 낳았으면 좋겠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몸 상태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낳은 아이의 탯줄을 끊자마자 이곳으로 날아왔으니, 아직 산후조리가 필요한 몸이라고 볼 수 있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니까 술을 먹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했다.
뭐, 이미 먹어버린 뒤지만 말이지.
"일단 너보다는 훨씬 오래 살아줄 테니까 너무 불안해 하지 말거라."
"...얼마나 오래 살아줄 건데요?"
"백년 천년 살아주마."
"푸흐, 그거 뭐예요."
다행히도, 혜린의 미소는 금방 되찾을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안도하면서 등을 쓸어내리니, 이제는 아주 몸에 힘을 풀고는 반쯤 내 위에 눕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리광이 꽤 심하구나.
마치 고양이 수인 아이들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야.
"술에 취한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구나."
"네, 조금 취한 것 같아요."
"착하지, 착해..."
따지고 보면 스물 다섯이라는 숫자가 그렇게 많은 숫자도 아니었다.
어리광을 부리려면 얼마든지 부릴 수 있는 나이라고나 할까.
살짝 쓰다듬으니 마치 고양이처럼 고롱거리는데, 정말 고양이 수인 아이를 안고 있는 건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술이 들어가서 평범한 인간보다 몸이 따뜻해져서 온도도 비슷하고 말이지.
"으헤, 언니 몸 시원해서 기분 좋아요..."
"그래, 그래. 일단 취한 것 같으니까 자리로 가서 자자꾸나."
이빨이라도 닦게 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었지만, 벌써 바닥에 깔린 캔의 숫자가 열을 넘어간 채였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인간이구나.
***
처음 언니를 봤을 때 느낀 건, 아슬아슬한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텅 빈 동공.
그리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희미한 존재감까지.
복도의 철제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너무도 아슬아슬해서, 반사적으로 붙잡아 버리고 말았더랬다.
'정말 바보 같아...'
대체 누가 누구를 붙잡는다는 걸까.
언젠가 집 안에 가져다 두었던 밧줄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괜한 참견이었다.
애초에 본인부터 오래 살 생각이 없었는데, 다른 이의 목숨을 걱정한다고?
"혜린, 이건 더 없느냐? 나는 이게 제일 맛있구나."
그래, 분명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 했더랬다.
제 방 안에 놓여있는 밧줄을 들켰을 때에는 심장이 쿵쾅거렸지.
차라리 말을 걸지 말 걸ㅡ 이런 사람이 절대 자살 같은 걸 생각할 리가 없는데ㅡ 같은 생각이 반사적으로 떠올랐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말 걸길 잘 했어.
자신을 아리엘이라고 소개한 이상한 사람.
검정색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특별한 사람.
"언니."
"응? 왜 그러느냐?"
"그래서, 안 물어보실 거예요? 제가 왜 그렇게나 과민하게 반응했는지?"
겨우 맥주 만으로 취할 리가 없다고 잔뜩 뻗댄 것 치고, 혜린 본인은 꽤나 술에 약한 편이었다.
처음에는 겉으로 잘 티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취하는 속도가 조금 빨랐다고나 할까.
맥주였기에 망정이지, 만약 소주나 다른 도수가 높은 술이었다면 금방 취해서 나가떨어졌을 터였다.
"괜찮다. 말하지 않고 싶으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개인적인 사연이야, 사람마다 다 있는 법이니까."
"...친절하시네요, 역시."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었더라면 '아, 나에게 별로 관심이 없구나.'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이미 자신의 마음에 파고든 이라서 그런지 그 한마디에 깊은 배려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말하고 싶었다.
내가 어째서 언니의 말에 상처 입었는지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 나를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계속 담아두고 살아갈 것만 같았기에, 최소한 내가 상처 입은 이유라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역시 말할래요. 재미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한번 들어보실래요?"
"..."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던 적이 있었나?
아니, 애초에 내 손으로 전부 고리를 끊어냈으니 애초에 이야기 할 사람도 없었다는 게 맞는 뜻이겠지.
잠시 울렁거리는 마음을 달래려 한숨을 내쉬었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 하는 편이 좋을까.
처음부터? 아니면 핵심만?
"가정 폭력을 당하던 아이가 있었어요. 그 애의 아빠는 엄청난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언제나 술을 마시고 돌아와서는 엄마와 아이를 때리고는 했어요."
"..."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고, 발길질을 하고ㅡ 아, 물론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어요."
처음에는, 평범하게 좋은 아버지였다. 아마 다섯 살까지였나.
기껏 태어난 동생이 죽고, 엄마가 희귀병에 걸려 앓아누운 순간부터 좋은 아버지 노릇 따위는 끝나버렸지만서도.
그 뒤부터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죽지 못해 살아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엄마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돈, 죽은 아이의 추모를 하기 위한 감정과 남아있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의연해야 한다는 강박까지.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무너져 내렸다.
엄마가 지닌 희귀병이 남은 아이에게도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게 알려진 순간부터였지, 아마.
"모든 것을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들었던 거겠죠. 그래서, 그래서 술에 손을 댄 걸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가족들을 때린 것이 합리화 되지는 않는다."
"알고 있어요, 저도 그 사람을 딱히 용서할 생각은 없고."
지금 내 표정은 과연 어떤 표정일까.
잔뜩 괴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으려나? 아니면 울 듯한 표정?
무엇 하나 언니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얼굴들 뿐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갑자기 아버지 얼굴이 보고 싶어졌어요."
"..."
"...웃기지도 않죠? 지금까지 저희를 두들겨 패던 사람이 보고 싶어지다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었나.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 처음으로 술을 진창 마셨더랬다.
뭔가 제정신으로 있을 수가 없어서ㅡ
제정신으로 있으면,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뼈져리게 다가와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네, 그래서 보러 갔어요. 나오지는 못할 테지만, 그래도 그 얼굴이라도 보려고. 저희를 그렇게나 두들겨 패던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엄마가 결국 죽었다고, 당신이 그렇게나 때려도 죽지 않던 사람이 결국 병 때문에 죽었다고 소리치고 싶었어요."
"혜린."
"그래서, 그래서 찾아갔는데 어떻게 된지 아세요?"
내 얼굴을 보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어째서 내가 본인을 찾아왔는지 알고 있다는 것처럼ㅡ 마치 아이가 울듯이 엉엉 울고 계셨더랬다.
그 빌어먹을 면상을 보며 잔뜩 비꼬아 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분명, 그랬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