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01 - IF : 전부 다 낳은 뒤에 지구로 보내졌다면.(7)
혜린의 고백 이후, 우리들의 사이는 더더욱 돈독해졌다.
말을 할 때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얼굴이 후련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어쩌면, 혜린은 그저 말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몰랐다.
금방이라도 떠날 듯이 굴지만 차갑지 않은,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고 후련해질 수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러면 다녀올게요, 언니!"
"그래, 조김히 다녀오려무나."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러 집을 나서는 혜린을 배웅하고는 그대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원래는 비밀번호가 걸려있는 녀석이었는데, 집에 혼자 있을 나를 배려해서 혜린이 비밀번호를 삭제시켜 준 덕분에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달까.
기억 상으로 오랜만에 잡아보는 키보드와 마우스가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으음, 아직까지도 사진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구나."
내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게 된 이유라고 한다면, 바로 인터넷에 내 사진이 떠돌기 시작하게 된 것 때문이었다.
그날 단 하루.
딱 하루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따라가, 맥주를 사들고 다시 집에 들어갈 때까지 찍힌 사진의 양이 상당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곳이 한적한 동네라서 그런지 지내고 있는 집이 특정되지는 않았다는 점일까.
"지워달라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한다고 해도 쉽게 지워줄지 의문이구나."
애초에 나는 이쪽에 신분이 없는 입장이기도 했으니, 되도록이면 관심을 덜 받는 편이 나을 터였다.
그래, 일단 향후 십 년 정도는 조용히 사는 걸로 하자.
물론 완전히 집에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밤에만 조금 돌아다닐 생각이었지만서도.
"...아서."
내가 사라진 뒤의 너는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구로 오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을까?
아니면 나를 지구로 불러내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을까.
어쩌면 엘을 닦달하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정작 엘이 가장 후회하고 있을 텐데도.
"보고 싶구나, 다들."
나의 사랑들이 존재하는 그 땅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그렇기에 서둘러 신성력을 모아야만 했다.
엘이 가지고 있던 그 힘을 이용한다면, 분명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신성력이 모이는 조건이 나를 향한 믿음이라면, 대체 그 믿음은 어떻게 키우는 편이 좋을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않는 선에서 사람들의 믿음을 모아야 하는 입장인 이상, 그 방법도 매우 한정적이게 되겠지.
예를 들자면ㅡ
[그분을 믿게 된다면 온 가정에 평화가 오고, 행복해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이비 종교를 만든다던지, 그런 것들.
21세기 지구에도 만연한 것이 바로 사이비 종교였으니, 어찌어찌 시도는 해볼 수 있을 터였다.
만약에라도 그렇게 한다면, 제 2의 여신교를 만들게 되는 걸까.
그런 상상을 하자니 역시 핏줄은 못 속인다는 생각이 퐁퐁 솟아올랐다.
'엘, 어쩌면 나 또한 너처럼 여신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다른 사람들이었다면 이런 나를 보고 키득거리며 웃겠지.
그리고 그 중에서 오로지 엘 뿐만이 잔뜩 빨개진 얼굴로 외치는 것이다.
'흑역사인 건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따라하지 마세요!' 하고.
떠올리기만 해도 즐거운 상상이구나, 정말이지.
***
최근 마을 근처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골목길 근처를 오가며 곤경에 빠진 사람들 구해주는 사람이 있다.
교통사고가 날 뻔 했는데 차를 맨손으로 막아서 구해줬다.
자살하려는 사람을 구하고 설득해서 집으로 되돌려 보냈다던지 그런 것들.
처음에는 장난하지 말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소문이 계속해서 들려오니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언니, 그거 알고 있어요? 요즘 이 근처에 슈퍼 히어로가 활동한다는 사실?"
"슈퍼, 뭐라고?"
"슈퍼 히어로요, 슈퍼 히어로! 위기의 순간에 팟, 하고 나타나서 사람들을 구해주는 영웅이요!"
언니는 뭔가 탐탁치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엣, 설마 히어로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던지?
뭐, 사람마다 취향 차이가 있으니가 강요하지는 않겠지만서도.
그래도 이 정도까지 관심이 없을 줄은 상상도 못했달까.
"나는 그런 것보다 네 아르바이트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만."
"에이, 저는 언제나 똑같죠! 손님 받고, 계산하고, 언니는 안 나오냐고 질문 받고!"
"나? 나는 왜?"
"설마 몰라서 물어보는 건 아니죠?"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언니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언제나와 같은 언니라서 다행이지만 이 정도면 조금 자각을 해줬으면 좋겠단 말이지...
뭐, 이것마저도 매력 중 하나일 정도의 사람이니까 상관 없나.
나중에 깨달은 다음의 반응이 기대가 되기도 했고.
"그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야간 아르바이트를 할 걸 그랬네요."
"...그 슈퍼 히어로인지 뭐인지를 보기 위해서 그런 건가?"
"당연하죠!"
자신 있게 대답하자 언니의 눈썹이 삐뚜름하게 말려올라갔다.
엄청나게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구나.
분명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는데도 얼굴에 표정이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특이하다고 할지, 솔직하다고 할지, 꾸밈이 없다고 할지...
마음에 안 든다는 감정 속에 진한 걱정이 깔려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제가 밤에 나갈까봐 걱정이라도 하는 거예요?"
"당연하지 않느냐. 가뜩이나 이 근처는 치안도 별로 좋지 않은데, 너 혼자 밤에 나갔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에이,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러는 놈들이 있겠어요?"
"혹시 몰라서 노파심에 하는 이야기다만. 어떤 일이던지 만약의 경우가 존재하는 법이니까 ."
언니의 걱정을 잔뜩 받는 건 좋았지만, 잔소리를 듣는 건 싫으니 여기까지 하도록 할까.
내가 밤에 밖으로 나간다고 하면 억지로라도 붙들어 놓을 듯한 기세였다.
'음, 언니에게 붙들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ㅡ 아니, 아니아니아니. 귀찮게 할 수는 없으니까, 자제하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는 언니의 앞에 편의점에서 사온 간식 여러 개를 놓아주었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언니가 유일하게 미소를 짓는 순간.
바로 달콤한 것을 먹을 때였다.
"...역시 너무 달구나. 지금까지 먹어왔던 모든 간식보다도 말이다."
"그래도 좋아하시니까 계속 드시고 계신 거잖아요. 그렇죠?"
"그건 그렇지만ㅡ 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달아."
초콜렛을 얇게 씌운 쿠키를 한 입 깨물자 작은 부스러기가 오소소 떨어져 내렸다.
저 과자는 다 좋은데 가루가 떨어지는 게 문제라니까.
앉은뱅이 책상을 잔뜩 더럽힌 가루를 내려다 보며 미안함을 감추지 못하는 언니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정말이지, 이런 사소한 것까지 전부 미안해하면 어떻게 하자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아이들에게도 먹여주고 싶구나. 참 좋아할 텐데."
"...잠깐, 방금 아이'들'이라고 하신 거예요?"
"응? 그렇다만...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느냐. 첫째가 10살이라고."
"아니, 분명 그런 말을 듣기는 했지만 아이가 둘이라는 말은 안 했잖아요!"
저 얼굴이, 저 몸매가, 저 피부가 아이를 둘이나 낳은 아이 엄마의 것이라고?
거짓말. 만약 진짜라면 과학자들은 지금 언니에게 찾아와서 부디 연구할 수 있게 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어야 할 터였다.
만약 연구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불사는 몰라도 불로의 비결 만큼은 충분히 얻어낼 수 있겠지.
하지만 경악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표정에는 여전히 의문이 감돌아 있었다.
내가 왜 놀라고 있는지 궁금한 걸까. 그게 아니면ㅡ
"정확히 말하자면 여섯이다만."
".....네?"
지금 뭐라고ㅡ
그러니까, 에?
아니, 지금 뭐? 뭐라고 말했지?
"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윽..."
갑자기 지른 소리에 언니가 귀를 막는 게 보였지만, 이건 불가항력이나 마찬가지였다.
하나도, 둘도, 셋도 아니고 무려 여섯? 아니, 여섯이라고?!
무릎을 꿇은 그대로 천천히 움직여, 멍하니 언니의 뺨에 손을 가져다댔다.
그러고는 곧바로 주욱.
"이허 나라."
"...나보다 부드럽고, 탄력있는데."
이게, 여섯 아이의 엄마라고?
갑자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온 걸까.
나름 관리는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 여섯 낳은 사람에게까지 밀리다니...
"입양이라거나, 그런 거죠? 맞죠? 제가 맞춘 거죠? 아하하,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지! 어쩐지 애 엄마 치고는 엄청나게 젊어보이시더라!"
"..."
"..."
"..."
"...아니에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기분 탓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기분이 가라앉은 채였다.
그 상황에서 반사적으로 깨닫게 된 건 바로 내가 지뢰를 밟았다는 것.
단순히 믿을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식의 반응을 한 건 분명 엄청난 무례일 터였다.
누구라도, 그녀에게 이런 모욕을 줄 수는 없을 테니까.
"죄송, 죄송해요. 저는 그냥ㅡ 아니, 그런 말을 해서, 정말 죄송해요..."
그러니까 미워하지 말아주세요, 싫어하지 말아주세요, 떠나지 말아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ㅡ
"하나도 화 안 났으니까, 그러지 말거라."
그 한 마디가, 어찌나 고맙던지.
제 정수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혜린은 결국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