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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10화 (310/342)

Chapter 310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4)

다시 만난 아리엘은 내가 알던 아리엘과 달랐다.

아니, 분명 아리엘이었지만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우리들에 대한 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린 것처럼.

다시 보니 반갑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사랑한다고도, 이번에는 절대 잃지 않겠다고도 말하고 싶었더랬다.

...결국에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싸우고 말았지만, 최소한 예전처럼 끔찍한 기억을 심어주지는 않았다.

"마왕 씨, 혹시 불편하신 점이라도 있으세요? 있으면 말해주세요! 물론 불편한 것 뿐만 아니라 궁금하신 것도 물어보셔도 돼요!"

"...용사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무섭더구나."

그래,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싸지.

방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리엘에게 살갑게 굴지 못했던 건 사실이니까.

어쩌면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사랑하던 아리엘은 이미 사라졌다고,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래서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했던 것 같았다.

'아서,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방 안에 있는 마왕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리엘의 모습이 계속해서만 떠올랐다.

처음에는 사랑, 그 다음에는 그리움, 마지막으로 체념까지.

심할 때는 꿈속에서 아리엘이 나타나 나 때문에 자신이 죽었다고 저주의 말을 잔뜩 쏟아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마왕을 만나러 오는 이유가 뭘까.

끼익ㅡ

"용사님."

"..."

"..."

나를 부르는 엘리의 목소리에도, 내 시선은 마왕을 향한 채였다.

기억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전히 같은 사람.

그런 사람에게 과연 온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미안, 방을 잘못 찾아온 것 같아."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가 말한 것을 처음 본다는 듯 깜짝 놀란 마왕의 표정을 뒤로 하고, 결국은 도망치듯 방 밖을 빠져나왔다.

아리엘, 거기에 있는게 너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사라져버린 너를 너라고 인정할 수 없어서, 그래서 여기에 있는 너를 너라고 생각하지 못할 것 같아.

"아서, 어디가? 아리엘 만나러 가는거 아니었어?"

"에밀리."

"뭐가 무서워서 도망치는 건데. 지금까지 쌓아온게 전부 사라져서? 전부 사라졌으면 다시 쌓아올려. 아리엘이 살아난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거야?"

아니, 아니야.

내가 아리엘의 부활에 만족하지 못할 리가 없잖아.

얼마나 그녀의 부활을 바라고 또 바랬던가.

단 한 번이라도 그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 체온을 느낄 수만 있다면ㅡ

그런 생각을 얼마나 많이, 오래 했는데 감히 어떻게 만족을 못해.

"물론, 그 정도로 아리엘을 사랑한 너니까 그럴 수도 있어. 그렇지만, 이게 현실이야 아서. 아리엘을 잊고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겠어? 아니, 아리엘을 잊을 수나 있겠어?"

"..."

"봐, 지금도 대답하지 못하고 있잖아. 너는 그냥 도망치고 있을 뿐이야. 어린애처럼, 다른 누군가가 너를 찾아주기를 원하지."

그 말대로였다.

아리엘이 관련된 일이라면 자신은 언제나 아이가 되고는 했더랬다.

고집을 피우고,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불리해지면 그냥 도망치고 마는 어린 아이.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에게 아리엘과의 재회는, 심지어 기억이 없는 아리엘과 만나는 것은 아직 일렀으니까.

"조금만, 조금만 시간을 줘."

아직은,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오래걸릴지도 모르는 그 시간이.

***

내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땋는 손길이 참 익숙했다.

정작 이쪽은 어색해 죽을 것 같은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간간이 내 뿔이 신기하다는 듯 조금씩 만져보는데, 느낌이 이상해서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부수거나 하지 않는 이상 별도로 감각이 느껴질 리가 없건만, 대체 왜 이러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성녀. 혹시 계속 만지고 있을 생각인 건가?"

"앗,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아니, 크게 불편한 건 아니지만..."

어색하다.

나만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색해서, 날이 갈수록 편해지기는 커녕 불편해지기만 했다.

분명 상대는 훨씬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내 쪽의 거리감은 거의 그대로라고나 할까.

적대적이라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는게 맞겠지.

'...나는, 이들을 별로 증오하지 않는구나.'

어쩌면 죽음을 미리 받아들이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나에게 찾아오는 당연한 운명.

죽음, 고통, 혹은 그것보다 더한 것들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그 모든 것들을 인지하고, 체념하고, 결국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더랬다.

"마왕 씨,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렇게 계속 마왕이니 성녀니 호칭만으로 부를 수 없잖아요."

"...음, 나는 이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포기한 몸이다만. 마왕이 된 순간부터, 나는 언제나 마왕이었다. 이름은, 별로 중요치 않지."

그렇다고 스스로의 이름을 하찮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야, 어머니가 직접 지어주신 이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름 그 이상으로 어머니가ㅡ 전대의 마왕이 다른 이들에게 불렸던 '마왕'이라는 칭호가 훨씬 더 소중했다.

어머니와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

그리고, 어머니의 모든 것이었던ㅡ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인 호칭이었기에.

"하지만, 그래... 지금 이런 꼴로는 스스로를 마왕이라고 칭할 수도 없겠구나."

"그러면...!"

"...다른 이에게, 하물며 인간에게 내 이름을 소개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말을 하려니 뭔가 낯이 뜨거워졌다.

겨우 이름을 알려주는 것 뿐인데도 대체 왜 이러는 거람.

처음 친구를 사귀어보는 사람처럼 부끄러움을 타다니, 이래서야 마왕으로써의 체면이 살지 않았다.

그래, 그냥 이름을 말해주는 것 뿐이야.

심호흡하고, 천천히ㅡ

"ㅡ아리엘."

"..."

"내 이름은, 아리엘이라고 한다. 그, 인간들에게는 괜찮게 들리는 이름인가? 내 이름을 말하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조금 어색하구나..."

머리카락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살살 꼬아대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부끄러워, 부끄러워, 부끄러워...

...왜 이렇게 부끄럽지? 대체 왜?

뭔가 망치에 얻어맞은 듯이 나를 바라보는 성녀의 시선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역시 마족식 이름은 인간들에게 별로였으려나.

"저, 저는 엘리라고 해요! 아리엘 씨!"

"..."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으시는 건가요?"

"...읏."

이름으로 부르라니, 갑자기?

그야, 우리는 그렇게 서로 이름으로 부를 사이가 아니지 않느냐.

이렇게 통성명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인제 말이지.

"...엘리."

하지만 결국 상대의 반짝거리는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름을 불러버리고 말았다.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준다면 조금 잦아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한 행동이었지만ㅡ

다시 보니까 잘못된 생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야, 지금 성녀의 눈이 빛나다 못해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이 변해버렸으니 말이야.

"아리엘 씨, 아리엘 씨, 엄청 귀여워요ㅡ!!"

"우앗ㅡ 으, 넘어질 뻔 하지 않았느냐!"

균형이 무너지기 전에 몸을 제대로 가눠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대체 뭐가 그리 좋아서, 그리고 대체 뭐가 그리 귀엽다고 이렇게나 호들갑을 떠는 걸까.

나 스스로는 별로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성녀에게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었다.

인간들은 아무리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하더라도 서로 이름을 나누고 상대가 귀엽다고 생각되면 이토록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달라붙을 수 있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에 대한 지식이 또 하나 늘어날지도 몰랐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게 네가 나에게 내릴 명령이더냐?"

철천지 원수인 존재를 죽이지 않고 살려뒀다는 건, 분명 죽음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겠다는 뜻일 터였다.

처음에는 친밀감을 조성하기 위한 이름 부르기려나.

무의식으로는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지만, 이 상황을 뇌가 이해하지 못해 결국 이렇게 물어버리는 것이었다.

이름을 부르게 하는 건, 명령이냐고.

"아니, 아니예요. 저는 그냥, 아리엘 씨랑 친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라구요? 절대 명령 같은게 아니니까요!"

"그래도, 나는 네 말을 믿을 수가 없다. 얼마 전까지 목숨을 두고 싸우던 이들이, 하루 아침에 이름을 나누고 하하호호 웃으며 지낸다고? 최소한 내 상식 선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아리엘, 씨."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조차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이렇게 슬픈 표정을 지어보이는 걸까.

마치 오랜 친구를 잃은 사람처럼, 대체 왜.

최근 들어 생각하는 일이지만, 역시 용사 일행들은 하나 같이 전부 이상한 녀석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눈앞의 인간ㅡ 성녀는 특히 더.

"이런 말을 해도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희들에게 그 어떠한 증오도 품고 있지 않아. 하지만 내가 너희를 증오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너희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적이니까."

"..."

"실망 했다면 미안하지만, 일단 오늘 만큼은 네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터다."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고,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제스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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