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1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5)
백 번 찍어ㅡ 아니, 천 번 찍어 넘어가지 않는 나무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매일마다 찾아와서 이름을 부르고, 매일매일 밥을 먹여주는 두 사람에 결국 잔뜩 세워두었던 가시가 차츰차츰 무뎌지기 시작했다.
나한테 가까워지지마. 싫어, 다가오지마. 너와 가까워지기 싫어.
어린아이 같은 투정을 부리며 계속해서 고집을 부렸더랬다.
"내가, 내가 졌다. 앞으로는 엘리라고 부를 테니까ㅡ"
"정말요? 해냈다!"
"...그렇게나 기뻐할 일이었느냐."
겨우 이름으로 부르겠다는 건데, 저 정도로 기뻐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구나.
심지어 덩실덩실 춤까지 추고 있고.
조금 오랫동안 튕기기는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내가 이름을 불러주길 바랄 줄은 몰랐달까.
...이제는 내가 이상한 건지 성녀가 이상한 건지도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올게요!"
"아니, 잠깐ㅡ"
쿵!
"ㅡ만..."
순식간에 뛰쳐나간 엘리와, 손을 뻗은 채로 굳어버린 나.
이 정도로 정신 없던 순간이 있었던가?
아니, 없던 것 같은데.
정적만이 맴도는 방 안에서, 결국에는 한숨을 토해내고 마는 것이었다.
마족 중에서도 저리 활발한 자는 존재하지 않건만.
"그ㅡ 러ㅡ 니ㅡ 까ㅡ 진짜래도요?!"
"그럴 리가 없잖아? 매일마다 식사를 준비하는 나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인데."
"흐응, 이번에도 제가 먼저인걸 인정하시지 못하다니, 역시 어리네요~"
복도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과 함께 문이 열렸다.
나갈 때는 혼자더니 들어올 때는 또 둘이구나.
마법사의 팔짱을 붙잡고 나타난 성녀에 속으로 깊은 숨을 뱉어냈다.
정말이지,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하나 같이 요란한 녀석이었다.
"아리엘 씨, 아리엘 씨! 다시 한 번 말씀해주세요! 에밀리 씨의 앞에서! 정확하게!"
"...그게 그리도 중요한 일이었던 게냐?"
"중요해요! 엄청 중요하죠! 이번에도 제가 에밀리 씨를 이겼다는 증거가 될 테니까요!"
"......"
이번에도 이겼다는 건, 그 전에 따로 내기를 했다던지 그런 걸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 궁금증이 생기기는 했다.
...나도 참, 여유가 생기기는 한 모양이구나. 이런 것까지 궁금해지고.
"엘리."
"! 봐, 봤죠?! 아리엘 씨가 이름으로 불러주셨다니까요?! 흐응, 역시 이번에도 저의 승리네요, 에밀리 씨!"
"그, 그럴 수가..."
마치 신생아를 앞에 둔 부모가 누구를 먼저 엄머나 아빠라고 부르는지 내기를 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물론 이쪽은 신생아가 아니라 마왕이고, 저쪽은 부모가 아니라 마법사과 성녀였지만서도.
그보다, 겨우 이름을 먼저 불러준 걸로 왜 저렇게 충격 받은 얼굴을 하는 건지...
이미 성녀ㅡ 엘리의 이름을 불러준 이상 다른 이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그러니까 마법사의 이름이ㅡ
"너무 상심하지 마라. 음, 에밀리ㅡ 였나?"
"...읏."
"이름으로 부른게 싫었다면 사과하마. 하지만, 누가 먼저 이름으로 불리는지로 내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본인이 불러달라고 해서 불러준게 아니라, 내 마음대로 불렀으니 기분이 나쁠 법도 했다.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마법사ㅡ 에밀리의 모습에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뭐랄까, 잘못하지 않은 것 같은데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대체 뭐 때문에 그런 거지?
그리고 저 표정. 저 표정은 왜 마음대로 자신의 이름을 불렀냐고 말하는 것 같은게 아니라, 왜 이제서야 자기 이름을 불러줬다냐고 말하는 듯한ㅡ
...아니, 억측이겠지.
"...괜찮아. 마음대로 불러도 돼.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분명, 억측이어야만 할 텐데. 대체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왜 그렇게 아프다는 듯이, 심장이 미어져 죽어버릴 것 같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에밀리가 슬퍼하는 얼굴을 보니 가슴이 욱신거려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에, 당황하는 건 나 뿐만이 아니었다.
"...아리엘 씨?"
"...아. 미안, 미안하구나. 그냥,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냥ㅡ 윽..."
시야가 뿌옇게 변하고, 그 사이에서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닦아냈지만, 한 번 터져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스스로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의 슬픔, 괴로움, 그리고 그리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새도 없이, 뜨거운 온기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울지 마세요, 아리엘 씨. 제발, 울지 마세요."
"미안, 미안하구나..."
"...아리엘."
나를 껴안는 엘리와 그런 우리 위로 덮어지는 에밀리의 손길까지.
마족에 비해 뜨겁기 그지없는 온기가 그대로 내 심장을 녹여냈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야.
내가 어째서 이들에게 이 정도로 격한 감정을 느끼는 거지?
그리고 어째서 이들은 나에게 이 정도로 애뜻한 감정을 보내오는 걸까.
"너희를,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
"...!"
"..."
마지막으로 튀어나온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은, 조금 쉬고 싶어.
이 감정의 격류에 더 이상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
기억을 아무리 잃었어도 본능은 남았다는 걸까.
조용히 제 무릎 위에 누워있는 아리엘을 내려다보며, 에밀리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처음 봤을 때는 놀랐더랬다.
뿔이 잘려 매일매일 골골대던 아리엘이 뿔이 잘리지 않은 모습으로 건강하게 서있었으니까.
그 다음에는 조금 고생했었지.
마왕이라는 말은 허명이 아니었고, 만약 처음 만났을 때의 아리엘이 순순히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누구 하나는 죽었을 터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고.'
만약 그녀의 마음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마왕의 것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웠다면, 제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갔을 터였다.
하지만 아리엘은 기억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머릿속에 들어있는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영혼에 새겨진 기억은 존재하는ㅡ
머리가 어지러웠다.
포기하고 있던 사실이 갑자기 눈앞으로 떨어져 내리니, 흥분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리엘, 아리엘ㅡ 엄마..."
마지막으로 봤을 때, 엄마라고 불러주지 않은 것이 한이었다.
그렇게 아리엘을 떠나보낼 줄 알았다면 마지막 만큼은 그녀가 원하는 호칭으로 불러줬을 텐데.
아무리 지금 아리엘의 얼굴에 대고 엄마라며 부른들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스스로가 죽었다는 사실 따위는 영원히 잊고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그런 기억 따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은게 더 나을지도 몰라."
강제로 범해지고, 아이를 낳고, 납치당하고, 맞고, 짓밟히고ㅡ
그런 온갖 기억을 가지고 있던 너를, 내 욕심 때문에 다시금 불러오는게 맞는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겠지.
지금만 해도 그래.
언제나 꾸던 악몽을 꾸지 않는 너.
편안한 얼굴로 잠든 모습을 보는게 대체 얼마만인 걸까.
'사라진 추억은, 얼마든지 다시 쌓으면 되는 거야.'
하지만, 가지고 있던 기억이 사라지는 기적은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일지도 모르지.
너에게 아픈 기억을 다시금 안겨주느니, 처음부터 관계를 다시 쌓아올리고야 말겠다.
그런 결심이었다.
그런 결심이었는데ㅡ
"ㅡ우는 너를 보니까,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나를 상냥하게 어루만져주는 손길과 따스한 미소.
온갖 애정이 들어찬 눈길과 천천히 속삭이는 목소리까지.
이대로 쌓아올린 관계에는 분명 그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겠지.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 쯤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 분명 알고 있는데도 이토록이나 원하게 되는 건ㅡ
"너를 사랑해, 아리엘."
ㅡ너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
"...아리엘 씨, 혹시 일어나셨나요?"
"..."
"아리엘 씨ㅡ"
아침이 되고, 아리엘 씨가 계신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텅 빈 방 안이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방.
자그마한 온기조차 존재하지 않는ㅡ
"ㅡ아리엘 씨!!"
쿵, 하고 싶장이 뛰었다.
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아리엘 씨를 보다 보니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들의 관계는 마왕과 용사 일행에 불과할 뿐이었지, 그 이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모두가 안심하고 있는 밤에 도망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겠지.
"왜 부르느냐?"
"히얏?!"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처럼, 등 뒤에서 아리엘 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쪽팔렸을 법한 비명을 내지르며 천천히 몸을 돌리자, 언제나와 같은 아리엘 씨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수치람. 아리엘 씨가, 나를 떠나갈 리가 없는데.
아니, 그나저나ㅡ
"...아리엘 씨, 설마 그 복장은ㅡ"
"아, 이것 말이냐? 음, 매일마다 식사를 얻어먹고 있으니 한 번 정도는 내가 대접할까 싶어서 말이다."
앞치마 차림의 아리엘 씨.
아무래도 에밀리 씨가 쓰던 것이었는지, 강렬한 흉부의 압박에 가운데 그려진 분홍색 하트가 엉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용케도 저걸 두를 생각을 하셨구나.
그보다, 방금 뭐라고 말씀하셨지? 매일마다 식사를 얻어먹고 있으니 한 번 정도는 본인이 대접하고 싶으시다고ㅡ
"...설마, 요리 하셨어요?"
"으음, 믿지 못한다면 미안하지만 어느 정도는 할 줄 안다. 물론 독이 들었을까 의심하는건 당연ㅡ"
"의심 안 해요!!"
"...으응, 그렇구나. 그렇다면 다행이고."
시무룩, 하고 풀이 죽어가기에 서둘러 답했다.
물론 본인의 반응이 너무 과했다는 걸 깨달은 건 그 다음의 일이었고.
으, 부끄러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