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5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9)
처음부터 엘을 소환하지 않은 건,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그런 것이었기 때문일 터였다.
아리엘의 시체를 찢고, 부수고, 먹어치우는 그런 장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엘이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걸지도 몰랐다.
누구라도 그런 장면을 봤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진심으로 사랑했다, 인가."
엘의 숨이 끊어짐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황금빛의 반지.
그녀는 어째서 이 반지를 가지고 있던 걸까.
그리고, 어떻게 이 반지를 가지고 있던 걸까.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들에 깊은 숨을 토내낸다.
무엇 하나 알 수가 없었다.
무엇 하나ㅡ
"아서, 또 여기에 있구나."
"...아리엘."
아리엘은 기억을 되찾지 못했지만, 나를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반지를 본 뒤로부터 뭔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나 뭐라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끝난 다음부터는, 종종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는 했었지.
과거의 아리엘이 살아난 것 같은 환상에 제대로 잠을 못 이룬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더랬다.
'...내가 알던 아리엘의 모습을 볼 때마다, 계속해서 떠올라.'
조용히 잠든 듯이 죽어버린 아리엘과, 그런 아리엘을 먹어치우는 엘의 모습이 계속해서 꿈 속에 나왔었지.
그렇기에 더더욱 괴리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존재가 아리엘임이 틀림 없는데, 내 인식으로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버리니까.
하지만, 차마 모진 말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는 것에서 결국 깨닫고 말아버린다.
'내 앞에 있는 건, 아리엘이야.'
천천히 손을 뻗어오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가, 결국은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나는 흔들려도 되는 걸까.
이대로 흔들리다가 무너져서, 저 미소에 파묻혀도 되는 걸까.
이미 죽은 너를 잊고, 과거의 너를 사랑해도 되는 걸까?
"아서, 생각이 많아 보이는구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최근 그래서 계속 그랬지. 네가 기억하고 있는 아리엘과 내가 달라서 그런 건가?"
"..."
눈치가 없어 보이지만, 묘한 곳에서 예리하다는 점은 똑같았다.
...동일 인물이니 똑같은 걸까.
아무튼, 눈앞의 아리엘은 조금 슬퍼보이는 눈빛을 하고 있으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라도 웃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정말이지, 네가 알던 아리엘을 상상 이상으로 소중하게 여긴 모양이로구나. 분에 넘치는 말이지만, 이쪽에서는 질투가 날 정도로."
"..."
"그 빈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아. 그래도, 내가 기억을 되찾을 때까지는 곁에 있어다오."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너는 내가 아는 그 아리엘이 되는 걸까.
아니면 기억만 가지고 있는 타인이 되는 걸까.
스스로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쉽사리 고칠 수가 없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아리엘은 이미 죽은 존재였으니 말이다.
'...차라리 다시 태어났다면 또 모르지만.'
시간을 되감는다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생소한 일이었다.
다른 이의 배에서 죽었던 이들이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훨씬 더.
동료들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이야기 했지만, 역으로 아리엘에 대한 일이었기에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온다는 확신도 없었으니 더더욱 그러했고.
"너는, 내가 아는 아리엘은 아니지만..."
"..."
"...아리엘인 건 같으니까, 기꺼이 그렇게 하겠어."
"고맙구나, 아서."
말갛게 웃어보이는 미소가 어찌나 예쁘던지.
반사적으로 그 얼굴에 입술을 맞출 뻔 했지만, 필사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존재 자체가 내 심장을 잡아채오는 상대를 과연, 못본 척 무심하게 대할 수 있을까.
***
용사ㅡ 아서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 웃음이 비져나왔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너 또한 마찬가지로구나.
아서가 내민 반지를 본 뒤로부터 이상해진 스스로의 상태에 어찌나 혼란스럽던지.
확실히, 무언가가 있기는 있구나.
친구가 아닌 연인, 혹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관계였겠지.
"아리엘 씨, 오늘은 일찍 일어나셨네요?"
"음, 나는 원래 잠이 적은 편이다만. 최근 잠을 많이 잔 건 전투로 인한 피로가 전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가요?"
뭔가 슬픔 가득한 눈동자가 되어버린 엘리에 살짝 시선을 피했다.
기억이 없으니 내가 무얼 잘못 말 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사소한 것에서 그들이 기억하는 나와 다를지도 몰랐다.
본인들의 말로는 시간을 되돌렸다고 하지만ㅡ 만약이라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지.
물론, 그렇다고 이들을 적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엘리, 언제나 나에게 상냥하게 대해줘서 고맙구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지만, 일단은 너에게 먼저 인사를 하고 싶구나."
"...아리엘 씨."
"이런 나라서 믿음이 안 갈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은 너희를 적대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말이다."
애초에 마족들을 소환한 것은 인간들 전체의 의지가 아니라 몇몇 사악한 이들의 의지였다.
심지어 용사 일행은 그 범인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는 상태.
뭐,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마신ㅡ 엘에게 있었지만, 이미 죽은 이에게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그건 넘겨두고.
"일어나니 시장하군. 자, 같이 식당으로 가자꾸나."
"아리엘 씨는 역시, 아리엘 씨네요..."
"무얼, 나는 언제나 나였다."
엘리의 팔을 부드럽게 감싸자, 엘리가 내 몸에 기대듯 몸을 밀착해왔다.
역시 인간의 몸은 따뜻하구나.
인간에 비해 차가운 피부로 스며드는 온기가 너무도 따스했다.
설마 이 온기에 홀려서 친해졌다던지 그런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겠지만서도.
"어서 와. 배고프지? 설마 그 아리엘이 이렇게나 대식가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야."
"음, 마족은 상당히 연비가 안 좋으니 말이다. 마기를 이용한다면 더더욱 그렇고. 오히려 과거의 내가 적게 먹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만."
"...그래?"
떨떠름한 반응의 에밀리를 놓아두고는 자리에 앉았다.
역시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포션을 휘적거리거나 이상한 단어들을 읊조리는 녀석들 뿐인 줄 알았건만, 이토록 환상적인 요리를 만들 줄이야.
아직 입 안에 넣지도 않았는데 군침이 돌 정도라니, 이건 대체...
"아침 일찍부터 준비했으니까, 다들 맛있게 먹어."
"레이나랑 아서는 같이 먹지 않는 건가?"
"조금 있다가 올 거야."
이런 아침 일찍 무얼 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ㅡ 분명 중요한 일이겠지.
두 사람의 강함은 따로 걱정이 필요 없을 정도였기에 안심하고 식사를 해도 괜찮을 터였다.
그렇게 나와 엘리가 먼저 앉고, 그 뒤에는 앞치마를 벗은 에밀리가 자리를 잡았다.
식기를 들어올리기 전에 서로 시선을 맞춘 다음, 짧게 식전 인사까지.
"""잘 먹겠습니다."""
셋 모두 닮은 점이 전혀 없었지만, 마치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식전 인사를 했더랬다.
과거 자신이 어린 아이였던 시절 어머니와 함께 했던 순간이 떠올라서 눈물이 찔끔거리기는 했지만, 최대한 음식에 집중한 끝에 다행히 두 사람 앞에서 꼴사납게 우는 꼴은 면할 수 있었다.
...조금 정도는 눈치 채졌을지도 모르지만서도.
"그나저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너희들 뿐인 건가?"
"...그건."
"확신할 수 없어."
애초에 본인들이 정신을 차린 곳이 마왕성이었기에 확신할 수 없다고, 에밀리가 말했다.
만약 본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기억을 되찾았다면, 앞으로의 일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부연 설명도 이어졌고.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다른 누군가 또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과거의 나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사람 입장에서 들어보면 기억이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두 사람은 나에 대해 기억하는 이들을 찾으러 간 건가?"
"...이상하게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마왕으로 있으면서 늘어난 건 눈치 뿐이라서 말이다. 동족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빠르게 알아내는 것 또한 곧 왕이 할 일이다."
포크에 찍힌 고기를 입 안에 넣고는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맛있구나, 정말로.
동족이 해준 음식들은 절대 이 정도가 아니었거늘, 이렇게 보면 이들과 내가 정말 아는 사이였다는 것이 실감 날 정도였다.
이 음식,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입맛에 맞춰서 연구된 거 같은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몇 개월ㅡ 혹은 몇 년에 걸쳐서.
"그보다, 대체 얼마나 나에게 요리를 해준 것이냐. 이 정도면 꽤나 고생했을 것 같은데."
"고생은 무슨, 즐겁게 만들었지."
"...그렇구나."
진심으로 즐거웠다는 듯이 미소 짓는 에밀리에, 결국 마음 깊숙히 깨닫고야 마는 것이었다.
이들이 한 말은 전부 다 사실이었노라고.
불쌍하구나, 아리엘. 이런 이들을 기억하지 못하다니, 정말로 불쌍해.
하지만, 잊어버린 것은 다시 떠올리면 될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쌓아가면 되는 것이고.
"엘리, 에밀리."
"응."
"네, 아리엘 씨."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자 엘리와 에밀리가 나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억지로 꾸며낸 미소가 아닌, 진심이 담긴 미소.
소중한 이를 바라보는 순간이 아니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하마."
그러니 부디, 나 뿐만 아니라 이들 또한 행복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