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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16화 (316/342)

Chapter 316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10)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무채색의 천장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ㅡ 골목 안의 사창가에서나 보았던 단순한 천장.

멍청히 그 회색빛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음껏 헛웃음을 토해냈더랬다.

설마, 전부 다 꿈이었나?

"...마왕님."

천장을 향해 손을 뻗어봤지만, 내가 그리도 그리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것들이 환상이라는 것처럼,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 사실이 너무도 끔찍해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목을 조여오는 적막으로 인해 꽉 막힌 목구멍에서는 어떠한 소리도 흘러나오지 못했다.

사실 전부 약에 취해서 보았던 환각이었던 거라고?

...하지만, 그렇게나 생생했는걸.

"할리벨, 오늘도 돈 벌 시간이다."

"자, 잠깐... 오늘은, 조금만 봐줘..."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남자에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약에 취해 색욕에 몸을 맡길 뿐인 일.

언제나 자신이 해오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마음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팔을 쓸어내리자, 남자가 코웃음을 치고는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지마, 빌어먹을 음마가. 네 뿔을 자르지 않는 대신으로 몸을 쓰는 거잖아, 안 그래?"

"..."

"아아, 그래. 뿔을 자르는 대신 오늘 하루 정도는 봐주는 걸로 하는 건 어때? 그 정도면 충분히 수지가 맞을지도 모르지."

마족의 뿔이 인간들에게 어떤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겨우 하루 몸을 파는 일 따위보다 저렴할 리는 없는데.

아니, 어쩌면 뿔보다 이 몸뚱이가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한 걸지도...

마족의 영혼이나 다름 없는 것이, 하찮은 몸뚱이보다 값어치 없어질 줄이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사실에 미친듯이 웃다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마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해. 뿔을 자르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은 쉬고 싶으니까."

"하, 언제는 절대 안 된다면서 울며 불며 매달리더니."

"울며 불며 매달린 적은 없거든?!"

"어쨌든, 한 쪽씩 천천히 자를 테니까 죽지 마라. 네 몸뚱이는 죽기 아까울 정도의 물건이라서 말이지."

"......콱 죽어버려야지, 쯧."

뿔을 자를 도구를 가져오겠다며 문 밖으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목에 걸려있는 개목걸이의 감촉이 너무도 생생해서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마왕님, 아무리 상상 속이라고는 하지만 뿔이 잘린 채로 어떻게 버티셨나요?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었지만ㅡ 뭐, 이제부터 직접 겪을 거니까 너무 무서워할 필요도 없나.

'차라리 뿔을 자를 때의 충격으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네.'

마족의 몸뚱이는 너무도 강인해서, 겨우 혀를 깨무는 것 정도로는 죽을 수조차 없었다.

아니, 애초에 목에 걸린 노예 목걸이 때문에 죽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하겠지만서도.

그것을 떠올리니 스스로가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아오고 있는지 체감이 됐다.

진짜로 겪은 일인지, 환각인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행복했던 일상에서 여기까지 떨어져 내리니 절망감이 제곱으로 변해버렸달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냥 죽고 싶었다.

"할리벨~ 진짜 안 죽는거 맞지? 아닌거 같으면 지금 말해. 어제도 옆 골목 찰스네도 뿔 자르다가 하나 죽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내가 아까우면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거 아니야? 하루 정도는 쉬게 둘 수 있잖아."

"아아, 뭐랄까. 너 아니어도 몸 대줄 마족 노예들은 얼마든지 있거든. 뿔 자르려고 한 녀석들 중 아무거나 하나 가져다 두면 되겠지."

역시 구제 할 수 없는 쓰레기 자식이구나.

손에 들린 줄톱이 거대한 단두대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려나.

차라리 한 번에 목을 잘라준다면 또 몰라, 저 악의가 가득 담긴 도구로 뿔이 갈아내질 것을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아아, 그래. 그냥 내가 말을 무르기를 바라는거구나.

지레 겁을 먹고, 그냥 몸을 내어주어 제 밑에 깔려서 앙앙거려, 결국 원래대로 돌아가라고.

"그냥 잘라. 왜, 그렇게나 내가 아까워?"

"...네가 자르라고 했다."

"이대로 죽어버리면 차라리 더 좋겠네."

더 이상 눈앞의 남자와 할 이야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화의 종료의 의미로 눈을 꾹 감고는, 앞으로 찾아올 끔찍한 고통을 맞이하기 위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얼마나 아플까. 말 그대로 죽을 만큼 아프려나? 분명 자신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종류의 고통이겠지.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고통 같은 것이 느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미 잘랐다던지?

줄톱으로 마족의 뿔을 두부 자르듯이 자를 수 있는 존재가 과연 평범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혹시 또 몰라, 내가 궁금해서 눈을 뜨자마자 뿔을 잘라버릴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검은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건 내 심장 뿐이었다.

쿵쿵거리며 내달리는 박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느려지고, 마침내 완전한 안정으로 접어들 무렵ㅡ

"계속 그러고 있을 건가?"

"에."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슬쩍 눈을 뜨자, 익숙한 녹색잉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라, 어라, 어라라?

설마 뿔이 잘린 나머지 미쳐서 환각을 또 보고 있는 건가?

느릿느릿 손을 움직여서 머리쪽으로 가져다 댔지만, 머리에 달린 뿔은 그대로였다.

...뭐지, 그러면 이게 진짜라는 이야기인데.

"...레이나?"

"그렇다만."

"아, 아니. 내가 알던 레이나는 키가 요만큼 작고 꼬맹이에 마왕님 앞에서 가식을 떨면서 '마마~'라고 하는 음흉 꼬마 엘프ㅡ"

"호오, 평소에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군."

"ㅡ라고 할 뻔~ 알지? 응, 그렇지?"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기세가 흉흉해졌다.

우와, 설마 나 내 무덤을 알아서 판 거야?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돌리니 그제서야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살았다.

아니, 그보다 환각이나 환청이 아니라 전부 겪었던 일이었구나...

"흐, 흐아아아..."

"...괜찮은 건가?"

"자, 잠깐 힘이 풀린 것 뿐이야..."

다리에 힘이 쭉 풀려서 스르르 주저앉으니, 옆에서 레이나가 부축해줬다.

큰 레이나는 또 새롭네.

흐으, 하고 숨을 내뱉으며 몸을 가누자 뭔가 엄청나게 따뜻한 시선이 쏟아졌다.

저기 말이지, 지금의 나는 옛날에 봤던 내가 아니거든?

누가 봐도 다 큰 몸뚱이잖아!

"그래도, 우리 가족 중에서 네가 제일 막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만."

"큿..."

"세계수 위에 올라가고 싶다고 떼를 쓰다가 막상 올려주니 무섭다며 엉엉 운 건 기억에 없나 보지? 참 편리한 기억이로구나."

"그, 그건! 그건 불가항력이었어!"

갑자기 튀어나오는 흑역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니, 매일마다 그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길래 궁금했던 것 뿐이거든?!

그렇게 높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그보다, 어린애가 그 정도 높이에 올라가면 우는게 당연한거 아니야?!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은 몸이 커다란 채여서 꼴사납게만 보이겠지.

"뭐, 그래도... 때에 맞춰서 잘 온 것 같으니 다행이군."

"...그건, 고마워."

"그러면, 이만 가지. 아리엘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내 앞으로 뻗어진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컸지만, 그만큼 더 믿음직스러운 손이었다.

***

"아리엘 씨!"

"음, 불렀느냐?"

식사를 마치고 한참 정원을 둘러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동무라도 되어줄 생각인 걸까.

그런 생각에 몸을 돌리니,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사람이 조금 더 많았다.

엘리에, 레이나에, 마족이 하나.

...마족이라고?

"마왕님! 사, 살아계셨네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으, 음...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정말 기억이 없으신 것 같네요."

"......미안하구나."

내 품에 뛰어드는 동족에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반쯤 굳어있자, 물기로 축축해진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감정.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점에서 상당한 부채감이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이름 모를 나의 동족이여.

"혹시, 이름을 물어도 되겠느냐?"

"할리벨, 할리벨이라고 해요."

"...할리벨, 이라."

처음 듣는 이름임이 분명한데,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이 그냥 기분 탓인 건지, 진짜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ㅡ

'마왕님, 그거 알고 계세요? 몽마는 사랑하는 사람의 꿈 속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사실을요.'

'아직 뿔이 하나 더 남았잖아요.'

'마마, 정말 죠아!'

"...윽?!"

"마왕님?!"

순간적이지만,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가는 광경이 어찌나 슬프던지.

무언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을 듯, 그 미묘한 감각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여기서 그냥 넘기면 안 돼. 사라지기 직전의 그 광경을 끝까지 잡아채, 그 이후를 떠올려야만 해.

그래야, 그래야ㅡ

"...이 온기의 근원을, 알고 싶어."

ㅡ갑자기 찾아온 평온을, 마음 편히 만끽할 수 있을 테니까.

"...마왕님."

"윽, 흐윽... 흐악..."

흩어지려는 기억을 붙잡아 억지로 머릿속에 새겨넣는다.

뇌 세포 하나하나가 혹사하는 듯한 감각이 나를 괴롭혔지만, 이대로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어. 어리석다고, 미련하다고 할 수 있지만, 나는ㅡ 나는ㅡ

ㅡ기억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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