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8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12)
내가 알고 지낸 이들이 용사 일행과 동족 빼고 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에밀리도 할리벨도 모두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돌아오지 않고 내게 잔뜩 어리광을 피우고, 엘리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일상.
분명 그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더랬다.
'...과거의 나는 지금 이것보다 훨씬 더 행복했었다고?'
얼마나 축복 받은 녀석이었던 걸까, 나란 녀석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최고의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이었는데, 이토록 행복감에 젖어있는 채라고?
스스로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과거의 나라는 인간에게 잔뜩 질투를 한다.
배가 잔뜩 부른 투정이라는 것 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하루에 한 번은 꼭 하게 되는 버릇 같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죽은 동족들과 인간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구나."
아니면 숨겨왔던 자기 혐오라던지, 그런 것들.
하지만 그런 것조차 오래 가지 않았다.
이를 테면, 하루 하루가 정신 없이 흘러간다고나 할까.
엘리, 에밀리, 할리벨, 가끔씩 레이나까지 정신 없이 몰아치니 우울해 있을 틈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ㅡ
"아리엘 씨! 반가운 손님들이 왔어요!"
"이번에도 나를 기억하고 있는 자들인가?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나를 알고 있다고 하니 반갑구나."
어디서 이렇게 데려오는 건지 모르겠지만, 손님'들'이라면 여러 사람이 왔다는 뜻일 터였다.
그런 내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엘리의 등 뒤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둘은 작고, 하나는 크구나.
...많기도 하고.
"하룻밤 사이의 호접지몽인줄 알았는데, 덕분에 정신을 차리게 되어서 다행이구나."
"...안녕하세요, 아리엘 씨."
"흐응, 진짜로 기억이 없는거 맞냥? 다들 짜고 우리 속이려고 하는 건 아니지냥?"
여우 하나에 고양이 둘.
금방이라도 털이 풀풀 날릴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지금 내 관심은 털 같은게 아니었다.
아니, 일단 털은 털이지만 뭐랄까... 더 푹신푹신하고ㅡ 더 부드러워 보이는ㅡ
아홉 개의 꼬리.
...
대체 뭘까, 저건.
보통 하나만 달려있을 법한게 아홉이나 달려있으면 이상하게 보이거나 징그럽거나 할 텐데, 저 꼬리 만큼은 달랐다.
껴안고 싶어.
마구 쓰다듬고 싶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결을 따라서 빗질하고 싶어!
"큿..."
"아리엘 씨?! 뭔가 떠오르시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호, 혹시... 이름을 물어봐도 되겠느냐?"
"흐응... 이 셋 중에서는 그나마 내 이름을 가장 먼저 묻는구나. 내가 기억에 없다니 슬프지만, 그 슬픔 속에서도 그나마 기뻐할 법한 일이로구나."
꼬리 아홉 달린 여우ㅡ 수인은 내 질문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웃고 있던걸 보면 뭔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상대의 탐스런 꼬리들에 반쯤 홀린 상태로 다가가자, 꼬리 중 하나가 슬쩍 내 손을 휘감아왔다.
...꼬리가 살아있는 것 같구나. 아니, 애초에 살아있는게 맞지는 하지만서도ㅡ 으응...
"...부드러워."
"흐응, 이 감촉을 맛보여주고 싶었다! 작았을 때의 감촉도 상당했지만, 다 큰 뒤의 감촉에 비할 바는 아니지!"
"뭔가, 빠져드는 것 같은... 으으으응... 후앗..."
꼬리가 하나, 꼬리가 둘, 꼬리가 셋, 넷, 다섯... 일곱... 아홉...
푹신푹신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게 팔에, 다리에, 머리에, 허리에 꾹꾹 달라붙는다.
하늘을 나는 것 같아...
마계에는 이런게 없으니 뭔가 더 자극적으로 다가온달까 뭐랄까...
"아리엘 씨, 정신 차리세요!"
"...그치만, 기분이 좋은걸 어떻게 하느냐."
"후흣, 그렇지, 그렇지. 너는 그저 내 꼬리에 빠져서 행복하면 될 뿐이다. 이제서야 진정한 내 힘을 보여줄 수 있어서 참 기쁘구나."
비명 같은 고함을 지르는 엘리의 목소리보다는 속삭이듯 홀리는 여우의 목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리는 건 대체 왜일까.
아무튼,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건 이 꼬리들의 감촉을 전신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자, 이리 오거라 꼬리들아. 조금 더 나를 감싸주려무나.
우후후, 웃으며 꼬리들에 몸을 맡기자 용케도 나를 들어올린 꼬리들이 천천히 여우의 앞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래, 이름이 궁금하다고 했었지. 내 이름은 미코다. 앞으로 많이 보게 될 사이이니 이름 정도는 꼭 외워두도록."
"...나도 이런 꼬리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그런 거라면 에밀리에게 부탁하면 되지 않느냐? 머리 위에 뿔 대신 귀가 자라게 할 수도 있을 텐데."
"...귀?"
생각해보니까 꼬리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귀도 있었구나.
멍하니 미코의 머리 위에 쫑긋거리는 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니, 아니지. 마족들의 뿔처럼 수인들의 귀도 민감한 곳일지도 모르잖아.
닿기 직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아내고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손을 뒤로 물렸다.
그런 나를 보며 미코는 귀엽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서도.
"언제는 매일마다 만지더니, 기억을 잃으니 더 조심스러워졌구나."
"...내가 그랬나?"
"그래, 언제나 나를 네 무릎 위에 눕혀두고는 귀를 마구 만져댔지."
"..."
"아쉽다는 표정을 보건데, 아직 미련이 가시지 않았나 보구나. 자, 그러면 오랜만에 한 번 귀를 맡겨볼까?"
진짜? 그렇게나 쉽게 내줘도 되는 부위라고?
살짝 고개를 숙여오는 미코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털이 복슬복슬 난 귀.
뭐, 뭔가 만지면 마구 움직일 것 같아서 겁이 나는데 말이지...
귀를 붙잡기 전까지의 과정조차 하나의 행복이라는 것처럼 느릿느릿 손을 뻗었다.
'다, 닿는다...'
미코의 귀에, 내 손이 닿ㅡ
"후앗..."
부드러워. 그리고 귀여워.
귀여움이란 것이 촉감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력으로 귀여움이 느껴졌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하찮은 비명은 둘째로 치더라도, 귀의 감촉이 너무 대단했다.
심지어 내가 붙잡기 좋으라고 살짝 눕혀져 있는 모양이 너무 상냥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나라는 마왕은 참 축복받은 마왕이구나, 응.
"...아리엘 씨."
"미, 미안하구나... 하지만, 감촉이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어..."
기억을 잃기 전에는 미코가 이렇게 크지 않고 작았단 말이지...
뭔가 어렴풋이 상상이 될 것 같으면서도, 지금의 모습을 보니 막 떠오르지는 않았다.
미코는 어렸을 때도 풍만했을 것 같아서 잘 상상이 안 가네.
"그나저나, 엘은 어떻게 됐느냐? 분명 가장 먼저 소환했을 거라고 생각했다만."
"..."
"..."
태연하게 엘의 이름을 꺼내는 미코에 잠시 굳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미코는 여신ㅡ 엘의 무녀라고 했었지.
그런데도 엘이 죽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걸까?
침울해진 엘리를 보며 엘의 상태를 짐작했는지, 미코의 표정이 살풋 찌푸려졌다.
"죽은 건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 죽었다면 몸 안에서 그 어떠한 신성력도 느껴지지 않아야 정상이거늘."
"그 뜻은ㅡ"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마신ㅡ 엘이 죽은 것은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녀가 살아있다고 확신하는 미코의 말에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
아무리 기억을 잃기 전에는 친근하게 지냈다고 하지만, 마신이라는 존재는 우리 마족들에게ㅡ 아니, 마족이라는 커다란 틀을 제외하더라도 나에게 있어서 끔찍한 존재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다들 이토록 마신의 죽음에 슬퍼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생각을 달리 하는 수밖에.
"엘의 시체는 어디에 있지? 일단은 상태를 확인 해봐야겠다만."
"제가 안내 해드릴게요."
"...나도 따라가지."
마신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직접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일단은 피가 이어진 가족이었으니까.
...나와 똑같이 생긴 것도 한몫했고.
"정말 죽어있구나."
"심장이 멈춘 것까지 확인했어요."
"그래, 지금은 심장이 멈춰있겠지. 하지만, 회생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차갑게 식어있는 마신을 되살릴 방법이 있다고, 미코가 말했다.
죽어있는 자를 되살리는 술법은 사악한 흑마법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건만...
미코가 그런 사술을 쓸 존재로 보이지는 않았기에, 결국 또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일 터였다.
...물론 내 미천한 머리로는 떠올릴 수 없었지만서도.
"하지만..."
"내 눈치는 보지 말거라. 나는, 마신ㅡ 엘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아리엘 씨."
이런 괴리감을 느낄 때마다 기억을 되찾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해진다.
나는, 마신에게 겪었던 모든 일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를 용서한 걸까.
만약 용서했다면, 대체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지?
아무리 용서했다고 해도, 어떻게 평범한 가족처럼 지낼 수 있었지?
"아무래도 나는, 이 녀석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직접 듣고 싶어."
"그렇구나. 뭐, 그런 이유라면 내가 힘을 써주지 못할 이유도 없지."
이미 죽어있는 마신을 되살리는 것이 참 쉬운 일이라는 것처럼 미코가 코를 울렸다.
죽은 자를 살리는 건ㅡ 심지어 그 죽인 이가 신이라면 소생이 불가능할 텐데, 어찌 이렇게 되살린다는 말을 쉬이 하는 것인지.
물론 그건 엘리도 마찬가지였는지, 조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얼굴이기는 했다.
둘 중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