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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20화 (320/342)

Chapter 320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完)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쁜 소식이 하나 있었다.

뭐, 다른 소식을 알릴 필요도 없었지만ㅡ

그래, 한 마디로 하자면 기억이 돌아왔다.

물론 전부 떠오른게 아닌 일부만 떠오른 것이었지만 뭐랄까.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이라고나 할까.

"우욱, 윽, 콜록... 켁..."

헛구역질을 하며 몇 번이고 마른 기침을 토해내자 오늘 아침에 먹었던 내용물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런, 치우려면 고생 좀 하겠구나.

덜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몸을 웅크린다.

도망치려고 하지마.

이대로 도망치면, 앞으로 더 떠올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ㅡ

'이런 기억을, 떠올리는게 맞는 걸까?'

순간 떠오른 생각에 한숨을 내뱉는다.

나를 내려다 보며 목을 조르는 손길.

그리고 그 증오에 찬 눈동자까지.

그래, 그랬지. 동족의 손에 용사ㅡ 아서의 가족과 소꿉친구, 마을의 모두가 죽었지.

...이런 일을 당해도 쌌어.

...이런 일을 당해도 쌀 정도였나?

"아서..."

너를 떠올릴 때마다 솟아나는 애틋함은 절대 거짓말이 아닐 텐데도, 동시에 퍼져나가는 증오심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내 목을 졸랐던 손을 부숴버리고 싶어.

나를 범했던 그 거대한 물건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스럽고, 보고 싶고, 참을 수가 없어서ㅡ

"아리엘."

"...마신."

"괜찮으세요?"

"...엘."

둘도 없는 원수였던 엘보다 아서가 더 싫어졌다면 조금 우스운 이야기려나.

사람의 기억이란 참으로 우스워서, 겨우 이 정도의 흔들림에도 마음대로 흩날려댔다.

그렇기 때문에 원망하고 싶지 않아.

손발이 덜덜 떨려올 정도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참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만, 이리 와다오."

"..."

"내가 기억을 되찾지 않기를 바란게, 이것 때문이었느냐?"

"..."

자신을 껴안는 손길에서 퍼져나가는 격한 떨림을 느꼈는지, 엘이 천천히 내 등 위에 손을 올렸다.

자그마한 손을 움직여 만드는 토닥거림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다행히 최대한 참아낸 덕분에 그런 꼴사나운 모습은 보여주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계속 지내거나, 아니면 기억을 되찾거나.

하지만 겨우 기억 따위 때문에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서를 만나야겠어."

"안 돼요. 지금은, 안 돼요."

"왜, 내가 그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느냐?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 하거라."

"...제가 걱정하는 건 그 녀석이 아니라 당신이에요."

그런가.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까지도 별로 체감이 되지 않았다.

고작 기억ㅡ 이라고 하기에는 과하게 생생했지만, 그렇다고 직접 겪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아니었으니까.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모른다.

전부 떠올리지 않으면, 몰라.

"괜찮을 거다. 나는 마왕이니까, 그렇지?"

"..."

불안감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엘을 두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겨우 기억 따위에 질까 보냐.

아무리 패배했다고 한들, 나는 마왕이었다. 모든 마족들의 왕.

겨우 이런 것 따위에 두려움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랬을 지언데.

***

"...아리엘?"

마왕성의 정원을 둘러보고 있던 도중, 근처에 보이는 흑색의 머리카락에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 며칠 동안은 그녀를 보는 것이 힘들었지만, 기억을 잃은 그녀 또한 아리엘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조금이나마 마음 놓고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도적으로 마나는 건 절대 아니었지만.

그 이유라고 한다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애초부터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시작한 만남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솔직히 말하자면 겁을 먹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과의 안 좋은 기억부터 떠올리게 되었다면 서로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그래, 너무 방심하고 있었어.

"아리엘?"

"흐, 흐악, 흑..."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리엘에게 다가가자, 그 가녀린 몸이 덜덜 떨려왔다.

마치 무척 공포스러운 무언가를 보았다는 듯한 얼굴.

그래, 아리엘을 가장 처음 만났을 때 봤던 표정과 똑같았다.

"다, 다가오지 말아다오... 내가, 내가 잘못했다... 큿... 흐아..."

"..."

이 광경을 다시 보게 되는 건 나의 과오를 잊지 말라는 뜻인 걸까.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이렇게나 정면으로 봤음에도 불구하고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 안에 더더욱 담아두기 위해 더더욱 눈을 부릅떴다.

봐, 아서. 이게 바로 네가 잊고 있던, 잊고 싶었던 과오야.

도망치지 말고 받아들여, 받아들임과 동시에 인정해.

"미안해, 아리엘."

"...아, 아아아... 으아, 흑..."

"내가, 잘못했어."

발걸음을 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으로 움직였다.

몸을 굽히고 천천히 낮춰, 그대로 그 가녀린 몸을 꽉 껴안았다.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

나는 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이런 내가, 행복해질 가치가 있을까.

차라리 죽은 그대로였던 편이 더 나았던 건 아닐까.

"...네가, 나에게 주는 가장 큰 벌이라고 생각했어."

너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때까지 애정해, 그 극한에 이른 순간 나에게서 떠나가는 것.

그것이 네가 나에게 하는 최고의 복수라고 언제나 생각했더랬다.

...그래, 분명 그랬었지. 실제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 받았으니.

받아들이려고 했다.

내가 지었던 모든 죄를 그제서야 정산 받는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ㅡ

"...너를, 너무 사랑해서, 안심해버리고 말았어. 나 같은 건 너에게 있어서 그 어떠한 도움도 되지 않을 놈일 텐데도, 너를 다시 보게 되어서ㅡ"

"...아."

"ㅡ어찌나, 기쁘던지."

죽은 이는 살아돌아올 수 없다.

그 당연한 이치를 깨부순 것이 바로 너였다.

그런 네가 죽었을 때, 그리고 다시 되살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내가 과연 무슨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돼?

어째서 너는 네가 저지르지 않은 죄의 대가로 다른 이들을 낳고, 다른 이의 손에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는가.

어째서 마지막의 모습이 공포나 고통이 아닌 눈물로 젖은 것이었는가.

너는 그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는가.

그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 휘몰아치다가 결국은 한 곳으로 뭉쳐 응어리졌다.

"기억을 되찾아도, 기억을 되찾지 않아도, 너는 너야.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했으면 좋겠어, 아리엘."

"..."

아리엘은 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부끄러웠던 모양이이었다.

아니, 내가 아는 그녀라면 분명 자신이 나를 보며 그런 반응을 했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아서."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을 전부 비웃는 것처럼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분명 같은 아리엘의 목소리였지만, 마왕으로써 말하는 것이 아닌 아리엘로써 말하는 그런ㅡ

ㅡ부드럽고 상냥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리엘의 것과 똑같은 목소리였다.

"...왜 그렇게 울고 있어?"

"아..."

울고 있다고? 내가?

흐릿해진 시야를 거둬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아리엘을 껴안았다.

이 세상 전부가 엉망진창이라도, 너 하나만 선명하면 충분해.

숨이 막히다며 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저 계속 이렇게 있고 싶었다.

***

"그러면, 다른 아이들이 문제로구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리엘은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의 기억을 되찾게 되었다.

중간 중간 비어져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 정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방 떠오르게 될 터.

지금 그녀가 걱정하고 있는 건 시간이 되돌아가며 사라진 아이들이었다.

이를테면, 그녀가 낳았을 아이들.

지금은 죽어있지만, 미래에는 다시금 태어날 아이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한 번 아리엘에게 그 역할을 맡길 생각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이쪽의 욕심으로 시간을 되돌린 것이니, 책임도 이쪽이 지는 편이 맞겠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아리엘이 퍽이나 귀엽게 보였지만, 지금은 내가 내뱉은 말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뭐, 설명이 많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지만서도.

"제가 낳을 테니까."

"..."

"..."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 다른 이들이 침묵했다.

뭐죠, 그 침묵은. 여기에서 아리엘 말고 아이를 낳아본 건 저 밖에 없을 텐데요.

혀를 쯧쯧 차며 다른 이들을 타박하자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여댄다.

...뭔가 반응이 이상한데.

"그렇지만, 아이를 낳으려면 그... 그런 짓을 해야 하지 않니? 그것도, 아서랑."

"딱히 저 녀석을 빼앗을 생각은 없어요. 아니, 애초에 저 녀석이랑 몸을 섞고 싶지도 않고!"

"...그러면 어떻게ㅡ"

독점욕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겨우 그런 일 때문에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니.

누구 핏줄인지는 몰라도 생각하는 것부터 귀여워 죽을 노릇이었다.

"엘리, 당신이 도와주세요."

"...저요?"

"애초에 신에게 있어서 남성의 씨냐 여성의 씨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잉태를 하게 만드는 그 근원만이 필요할 뿐이지."

"...그 뜻은 설마ㅡ"

그 설마가 설마였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서도.

"따라오세요."

"아니, 저는ㅡ"

"말꼬리 잡지 말고 따라오시라니까요?"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엘리의 팔을 잡아당기며 다른 이들을 슬쩍 훑어냈다.

아리엘은 안절부절 못하고, 아서는 시선을 피하고, 에밀리는 표정을 찡그리고, 할리벨은 꼬리를 하트 모양으로 구겨ㅡ ...이건 못본 걸로 하자.

아무튼, 별로 마음에 드는 반응은 아니었다.

이럴 때는 감사 인사만 해줘도 힘이 나는데 말이지.

"엘, 힘들면 말하렴. 나도 도울 테니까."

"됐네요."

그나마 입을 연게 아리엘이었지만, 내가 원했던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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