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1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 - 후일담. (1)
"..."
"왜 그렇게 보고만 있죠?"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눈앞에 보이는 황금빛 눈동자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여신의 성녀였고, 그 뒤에는 원수가 됐고, 그 뒤에는 좋아하는 사람의 지인? 혹은 가족과 같은 존재가 되었더랬지.
하지만,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벗지 않고 하는 편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아,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 정말 저와 함께해도 괜찮은 건가요?"
당황해서 그런지 형편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 상황이 절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 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만둬야하지 않을까.
정말 이런 일까지 해야하는 걸까.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생각과 함께 몸이 움츠러들었다.
지금 방 안에서 당당한 건 상대ㅡ 엘 밖에 없었다.
"처음이라서 그러는 거라면 제가 잘 지도 해줄 테니까요. 아니, 아니지. 애초에 교단에 있었으면 대충 알 건 다 알지 않나요? 같은 여자끼리 어떻게 하는지도요."
"그건, 그렇지만..."
"아니면, 자신을 속인 신과 함께 몸을 섞는 건 싫다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처녀를 빼앗길까봐? 아서라, 딱히 당신의 처녀를 빼앗을 생각은 없다구요?"
지금도 뭐가 문제인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의 모습이 누구와 똑같은지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이 여신은.
누가 봐도 아리엘 씨가 작아졌을 때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아, 그렇다면 그건가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벗지 않는다던지? 뭐, 좋아요. 그러면 저부터 벗을 테니까 마음의 준비가 되면 벗으시던지요."
"아니, 그게 아니ㅡ 읏?!"
훌렁, 하고 옷을 벗어버리는 상대에 서둘러 얼굴을 가렸다.
벗더라도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벗을 줄 알았는데 설마 이렇게나 한 번에 벗어버릴 줄이야!
하마터면 위험한 모습을 볼 뻔 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제 마음속에 있는 검은 욕망이 마구 솟아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숫처녀 같은 반응을 하시기는... 당신, 제 성녀 아니었나요?"
"..."
"눈 뜨세요. 이대로라면 당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그 도적도 되살릴 수 없을 테니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워내자, 가장 먼저 투명한 피부가 눈에 띄었다.
...예쁘다.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한 몸이었다.
비록 크기는 작았지만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이 잠들어 있다고 해야 할까.
그건 사람의 신체가 아닌 무언가 예술품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잘록한 허리에, 목에서부터 골반까지 흘러내리는 유려한 곡선.
아직 완벽하게 익지 않은 자그마한 과실과 흘긋흘긋 보이는 작은 틈새까지.
"...그렇게 보고만 있으실 생각인가요?"
"..."
자신의 시선이 부끄럽다는 듯, 엘의 손이 슬쩍 제 국부를 가렸다.
가리니까 더 야릇하다고 느끼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 어쩌면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그런 걸지도.
...괜히 뜨거워졌어.
"아아, 저도 이제는 몰라요!"
"꺄아?!"
"아리엘 씨랑 똑같은 얼굴로 그렇게나 유혹을 해대면, 저도 못 참는다구요?! 네에!?"
"자, 잠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다가가자, 잔뜩 당황한 표정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원래라면 본인이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겠지만ㅡ 안타깝게도 밑에 깔리는 취미 따위는 없었다.
상대가 아리엘 씨라면 또 몰라, 아리엘 씨 쁘띠 버전이라면야...
응, 더 생각할게 있나? 나는 몇 번이고 그만두려고 했고, 부추긴 건 엘이니까!
"잠깐!"
"네?"
그렇게 본격적인 정사를 시작하려는 찰나, 엘이 비명을 지르듯이 소리를 쳤다.
설마 거절당하는 걸까. 본인이 그렇게나 유혹하고는?
당황을 이기지 못하고 한심한 목소리를 토해내자, 얼굴을 붉힌 엘이 슬쩍 고개를 틀었다.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고 있네.
...아리엘 씨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이, 이 모습으로 하는 건 처음이니까 조심스럽게 해주세요."
"..."
"...엘리?"
시선을 가만히 두지 못한 채로 격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아아, 정말. 설마 모시던 신과 동침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사실상 허락의 표현에 입꼬리를 비죽 치켜올리며 다가가자, 엘이 그 자그마한 몸을 더더욱 작아보이도록 웅크렸다.
그렇게나 겁 먹은 표정으로 있으면 뭐랄까... 더 타오른다고나 할까...
"엘 씨도, 아리엘 씨와 비슷하신가요?"
"흣?!"
"처음부터 너무 자극이 강했으려나요..."
특별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천천히 쓸어내렸을 뿐.
숨을 들이키며 몸을 움츠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아리엘 씨와 같은 부분이 약한 듯 싶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빨랐다.
아리엘 씨와 같은 곳이 약하니, 그곳을 중점적으로 공략한다.
처음에는 귀. 귀 끄트머리를 살며시 쥐고, 귓바퀴를 중심으로 천천히 숨을 불어넣으면ㅡ
"히약...?!"
"헤에... 반응이 똑같네요?"
"...그, 그게 무슨ㅡ"
"솔직히 이런 곳에서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리엘 씨랑 같은 핏줄이 맞으셨네요."
키득키득 웃는 내 모습에 엘이 바들바들 떨어댔다.
귀여워라, 귀여워.
이런 사람이 나보다 수십 배, 수백 배는 더 나이가 많다니.
앙, 하고 귓볼을 깨무니 마치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바르작거린다.
"괴, 괴롭히기만 하면 그만 둘거니까요?!"
"이것도 일족의 준비랍니다, 엘. 전희의 중요성은 교단의 교리에도 나와있는 신성한 행위라구요?"
"..."
"아니면, 여신께서 본인을 모시는 교단의 교리가 전부 잘못 됐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ㅡ"
무어라 변명을 하려는 입술을 검지 손가락으로 꾹 짓누른다.
처음에는 당황이었지만, 지금 와서는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버리게 되었다면 기분 탓일까.
사실 말이죠, 엘. 저는 제가 사랑을 하게 될 줄 몰랐답니다.
그리고 그게 같은 여자일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
흐드러지는 검정색 머리카락과 보석보다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
거기에 그 희미한 미소까지 전부.
"당신이 아리엘 씨를 조금이라도 닮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거절했겠죠. 당신이 무슨 유혹을 해오더라도 말이에요."
"..."
"하지만, 당신은 너무도 아리엘 씨를 닮았어요. 아니, 아리엘 씨의 어릴 적 모습이라고 할 정도로 닮았죠. 그 사실이 어찌나 감사하고, 또 사랑스럽던지. 계속, 계속, 계속ㅡ"
뚝, 하고 말을 끊었다.
아리엘 씨가 돌아가셨을 때는 영혼이 깨져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엘이 죽은 것을 목격했을 때도 상당히 슬펐더랬다.
...아니, 겨우 이 정도의 말로 끝마칠 수준이 아니었는데.
"제 사랑은 오직 아리엘 씨를 향할 거지만,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제가 당신 또한 애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랍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해도 실감은 안 나는데요."
"사실 외모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까 실감이 안 날 법도 하지 않나요?"
"뻔뻔하네요, 당신."
"뻔뻔한 것도 매력이에요."
"..."
떨떠름한 표정이 꽤 자극적이라 반사적으로 손을 뻗고 말았다.
물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던지, 은밀한 곳을 스친다던지 하지는 않았다.
그냥 뭐어... 정수리를 쓰다듬었다고나 할까.
그런 단순한 접촉에도 움찔움찔 반응하는게 너무 귀여웠다.
아리엘 씨랑 비슷하지만 다른 반응.
"어때요,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이라도 그만 두실래요?"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냥 해요. 어차피 다른 이들을 태어나게 하려면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아리엘 씨에게 맡길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아리엘 씨는 당신만 고통 받기를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물론 내 쪽도 아리엘 씨가 고통 받기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뭐랄까, 지금의 엘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안으려는 것 같아서 조금 위태로워 보였다.
본인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서도.
"할 수 있어요. 애초에 몇 번이고 낳아본 적도 있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야..."
어깨에 손을 올려서, 그 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 쇄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각오는 들었으니 이제 남은 건 그것에 부응하는 것 뿐.
교단에 있던 시간이 꽤 길어서인지, 상대방을 만족시키는 기술 정도는 손쉽게 발휘할 자신이 있었다.
설령 그것이 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나저나, 꽤 민감한 몸이네요."
"...몰라."
슬쩍 닿은 둔덕 위에 투명한 액체가 끈적하게 묻어나왔다.
겨우 몸을 만지고, 약간의 자극만 했는데도 이 정도라...
설마 욕구 불만이라던지?
합리적인 의심이었기에 굳이 생각으로만 남겨두지는 않았다.
"엘 씨, 혹시 욕구 불만이세요?"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당신."
단번에 혐오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봐졌다.
"그렇지만, 그런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빨리 젖을 리가 없잖아요?"
"..."
"아니면, 기대하고 있었다거나?"
실실 웃으며 도발하자 고개를 푹 숙인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 꽤 가상했지만, 이미 귀가 빨갛게 변해서야 굳이 보지 않아도 어떤 표정인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말, 귀여우셔라.
"같은 여자끼리 어떻게 아이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ㅡ 뭐, 한 번 해보죠."
쪽ㅡ 하고, 내 것보다 작은 입술에 그대로 입을 맞췄다.
물론, 상대는 거절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