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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23화 (323/342)

Chapter 323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 - 후일담. (3)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시원하다.

엘 씨의 몸은 그랬다.

분명 잔뜩 흥분해서 몸이 뜨거워진 상태일 텐데도 불구하고, 내가 껴안고 있는 몸은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이건 마족의 신체로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그리고, 그녀가 흥분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흥분했기 때문이고.

질척ㅡ

"흣, 아... ♡"

"음..."

천천히 음미하듯, 허리를 움직인다.

여성끼리 나누는 관계는 삽입을 한다는 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전희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야만 했다.

만약 엘 씨의 감도가 좋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동안 애무를 했었어야 했겠지.

처음에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한 생각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녀 또한 쌓인게 많은 듯 싶었다.

"어때요, 괜찮나요?"

"기분, 죠아효...♡"

한 가지 궁금한 건, 정말 이런 걸로 아이가 생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만약 생긴다고 하더라도 어디를 어떻게 해야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고.

목구멍 안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뜨거운 숨을 뱉어내며 그대로 엘 씨의 자그마한 몸체를 꼭 껴안았다.

허벅지와 허벅지가 얽히고, 서로의 균열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액체가 하나로 모여 섞인다.

격한 움직임 따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 위로 닿는 공기에 심장이 선득선득 했다.

"에, 엘리... 읏, 머, 먼거 왓ㅡ 으흐으으으응ㅡ♡♡"

자그마한 입을 힘 없이 벌린 채 헐떡거리던 엘 씨가 힘 없는 비명을 토해내며 그대로 자지러졌다.

정말이지, 이 정도로 가버릴 정도면 너무 약한게 아닐까 싶기도 한데.

잔뜩 가버린 사람을 계속 괴롭히는 취미 따위는 없었기에,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절정의 여운을 이기지 못하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그래도, 제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리엘 씨니까 키스는 안 된다구요?"

"..."

"아, 안 들리시려나."

엘 씨의 입가를 물들인 침을 슥슥 닦아주고는, 침대 아래에 떨어져 있는 이불을 주워서 그 위에 덮어줬다.

즐겼다기보다는 즐기게 해준 것에 가까운 행위.

자신의 몸 안에도 약간의 열기가 남아있었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엘 씨를 깨워서 마구 괴롭히고 싶다는게 진심이었지만ㅡ

한 번 정도는 참는걸로.

"그런데, 아리엘 씨라면 분명 본인이 낳았던 아이들은 본인이 다시 낳고 싶어할 것 같은데, 엘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

"...잠드셨네."

확실히, 갈비뼈를 만지작거릴 때부터 잔뜩 가버리고 있었으니 지치기는 꽤나 지쳤을 터였다.

그나저나, 자고 있는 모습이 진짜 아리엘 씨랑 똑같네.

식은땀에 젖어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슬쩍 떼어내고는 천천히 그 얼굴을 감상했다.

조금 전까지 반쯤 풀린 눈동자로 헐떡이던게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지금의 엘 씨는 평온한 얼굴로 곤히 잠든 채였다.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기는 했지만서도.

"...내일 아침이 불안하네요."

엘 씨의 배가 불러있는걸 본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어떻게 보자면 자신이 임신 시킨거니,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ㅡ 하는 것도 조금 궁금하기는 했다.

케이 씨 같은 경우는 엘 씨한테 태어나는 걸 싫어할 것 같은데.

"뭐, 오래 생각해도 별로 의미는 없을 테니까ㅡ"

쪽ㅡ

마지막으로, 엘 씨의 뺨에 자그마한 키스를 하곤 느릿느릿 자리를 잡았다.

그런 고민은 그때가 닥치면 하는 걸로 하자.

그러니까 지금은, 안녕히 주무세요.

***

"꺄아아아아아악?!!?!?!!?"

"...으응, 무슨 소리야아..."

귓가에 들려오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에 밍기적거리며 눈을 떴다.

전혀 익숙하지 않는 천장이 자신을 맞이하는건 둘째로 치더라도, 옷이 다 벗겨져 있다는 사실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어라, 내가 왜 다 벗고 있지?

그런 의문이 들어서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면, 자신과 똑같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엘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맞다. 어제 당신이랑 관계를 나눴었죠..."

그 황금색 머리카락을 보자마자 겨우겨우 기억이 났다.

분명 내 쪽에서 리드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이리저리 욍설수설하다가 엉망으로 가버렸지.

하필이면 아리엘의 약점과 똑같은 부분이 약해서 공략 당하는 것도 상상 이상으로 빨랐더랬다.

...기억이 날아갈 정도로 가버릴 줄은 생각도 못했지만서도.

"그나저나, 방금 소리 지른게 당신ㅡ"

"엘 씨."

"ㅡ네?"

"이, 이게 어떻게 될 일인지... 설명 한 번만, 해주실래요?"

제 몸 위에 덮어진 이불을 살짝 들춰내고는 그 안 쪽을 바라보고 있는 엘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리 충격 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가요, 당신은.

설마 잠결에 처녀를 가져갔다던지 그런 건 아니겠지?

저 말만 듣고 딱히 확 떠오르는게 없기는 했다. 아니, 지금 보면 딱히 무언가를 떠올릴 필요도 없던 것 같지만.

"......"

"이, 이런 건 말씀 해주신 적 없잖아요?!!?!"

엘리의 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걷어지고, 그 안 쪽의 모습이 드러났다.

정확히는, 만삭의 임산부처럼 불룩 튀어나온 배가.

...

어라.

"...임신 하셨네요?"

"그건 저도 보면 알아요! 제 배, 뱃속에 아기가 움직이는게 느껴질 정도니까요?!"

"...왜?"

"그걸 저한테 물으면 어떻게 하자는 건데요!!!"

아니,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충격과 공포와 얼떨떨함을 이기지 못하고 앞머리를 만지작거리자, 엘리의 눈에 울망울망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건 확실히 내가 잘못한게 맞지. 설마 엘리가 임신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수습할 수 없는 상황에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죄송해요. 이렇게 된 건 제 잘못이니까, 책임지고 지워드리ㅡ"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절대 안 지워요! 소리를 지른 건 그냥, 갑작스러워서 그런 거라구요?!"

"...죄송해요."

할 수 있는 말이 사과 밖에 없었다.

신의 감성은 인간의 것과는 조금 달라서, 제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어차피 죽어도 다시 낳을 수 있는 이상, 엘리의 뱃속에 있는 생명을 지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물론 말하자마자 곧바로 혼나버렸지만.

"책임 지세요. 아리엘 씨랑 똑같은 얼굴로 순진한 저를 꼬시고는 아이까지 가지게 만드시다니...!"

"딱히 순진하지는ㅡ"

"어쨌든! 제대로 책임 지라구요! 당신이 이 아이의 엄마ㅡ 아니, 임신을 시켰으니 아빠인가? 아무튼, 그거니까요!"

억지였지만 억지가 아닌 억지였다.

자신이 실수한 것도 있고, 결국 엘리의 뱃속에 아기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 현실이었으니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슬금슬금 다가가자 한숨을 폭 내쉬면서도 손을 뻗어왔다.

그러고는 손목을 붙잡아서는 제 배 위에 두는데,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뜨거워서 순간 놀라버렸다.

"어때요?"

"...뜨겁네요. 부드럽고. 안에 뭔가 있는게 느껴질 정도예요."

"본인이 만든 아이인데, 조금 더 성의 있는 감상을 들려주는 건 어때요?"

여기서 더 얼마나 대단한 감상을 남겨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했다가는 엉망진창으로 잔소리를 들을게 뻔했으니까.

우선 지금은 당황한 마음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리는게 우선이었다.

그래, 그게 우선이었는데ㅡ

끼익ㅡ

"...걱정이 되어서 왔더니, 이건 또 재미있는 상황이로구나."

"미, 미코 씨? 이건 그러니까ㅡ"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무언가 잘못 되어도 단단히 잘못 됐다는 사실은 충분히 알겠다."

열린 문 안으로 들어온 미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걸어왔다.

분명 피투성이였던 것이 어제 같았는데, 지금은 얼굴의 흰 것 빼고는 꽤 괜찮아 보였다.

이런 모습을 갑작스럽게 들킨 우리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뭐, 좋은 경험인 셈 치고 넘어가거라. 아이를 낳는다는 건 여자에게 있어서 아주 값지고 좋은 경험일 테니까."

"미코 씨도 그렇게 말하면서 막상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으시잖아요?"

"그냥 위로 해주려고 아무렇게나 한 말이었다만."

"미코 씨?!"

제 머리 위에 솟아오른 귀를 몇 번 긁적인 미코가 결국 한숨을 폭, 하고 내쉬고는 우리를 향해 총총 걸어왔다.

아무래도 본인이 생각했던 상황과 다른 상황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꽤나 당황한 듯 싶었다.

하긴, 당사자인 우리도 이 정도로 당황했는데 미코는 얼마나 더 당황했을까.

"뭐, 아기를 가진 김에 잘 키워보면 좋지 않겠느냐."

"그건 당연하죠! 지금은 그냥, 뭐랄까.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라서 당황 했다고나 할까요..."

엘리가 볼을 긁적이며 아하하, 하고 웃어보였다.

확실히, 배가 평평하던 엘리만 보다가 만삭이 되어버린 엘리를 보니까 느낌이 이상하기는 했다.

"책임은 확실히 지거라, 엘."

"...말 안해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아리엘에게는 제대로 설명하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할ㅡ"

쨍그랑!

"...엘리, 지금 그게 무슨ㅡ"

일단 지금 상황을 정리하고 아리엘에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상황의 정리보다 당사자의 등장이 훨씬 빨랐다.

엘리의 배를 보고 충격을 받은 아리엘의 손에서 물컵이 곤두박질 치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퍼졌다.

아무래도, 가볍게 넘어가기에는 그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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