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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24화 (324/342)

Chapter 324 - IF : 마왕님만 기억이 없는 리트라이 - 후일담. (4)

내 기억이 돌아온 것도 좋았고, 엘이 다시 살아난 것도 좋았다.

엘이 엘리와 관계를 가져서 아이를 낳는다고 했을 때는 조금 당황했지만, 엘의 눈동자에 서려있는 진심이 너무도 무거워서 결국은 고개를 끄덕였더랬다.

하지만, 이런 건 예상도 하지 못했는데.

"엘리, 이게 대체..."

"아, 아하하..."

어색하게 제 뺨을 긁적이는 엘리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두 눈으로 보니까 당황 했다고나 할까.

우리들 중 누구라도 엘리의 배가 저렇게 불러 있는 걸 본다면 깜짝 놀랐을 터였다.

엘리의 얼굴에서도 당황감이 사라지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엘리 또한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기는 하지만.

"몸은, 괜찮아? 어디 불편한 곳은 없고? 다른 것 때문에 그런게 아니라, 나도 처음 아이를 가졌을 때는 꽤 불편했던 점이 많아서 그래."

"아리엘 씨, 말투가..."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호들갑이라면 호들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이를 가진다는 건 그 정도로 엄청난 일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물론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지는 고통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렇다고 엘에게 무어라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서도.

"엘,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요. 성녀ㅡ 엘리의 몸 안에 있는 신성력 때문에 작용이 이상하게 됐다고나 할까."

"그러게, 내가 낳는다고 하지 않았더냐. 지금의 나라면 아무런 무리도 없을 테니 말이다."

잘려진 뿔이 돌아오고, 마왕으로써의 기억도 있는 이상 아이를 낳는 정도로는 쇠약해지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시간이 되돌아가기 전보다 훨씬 좋은 상황이라고 볼 수 있겠지.

다른 이들은 내가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고통이나 인내의 시간마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를 가지고, 낳는다는 행복은 쉽게 느낄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쩔 수 없구나."

"아리엘?"

"도와주마. 이 중에서 경험이 가장 풍부한 건 나고, 다른 아이들을 낳은 것도 나니까 온 힘을 다해서 도우마."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서 쪽이 욕구 불만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아무튼, 그런 나의 선언에 엘의 표정이 곧잘 떨떠름하게 변해버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낳겠다고 선언한 상태에서 하루만에 그 역할을 내가 나눠갖게 되어서 그런 거겠지.

"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나는 네 핏줄이니,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이럴 때만 그러지 말라구요, 진짜."

"왜, 싫으냐?"

"너무 좋아서 문제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서! 그래서, 그래서... 당신을 먹어치워서라도 살려내고 싶었으니까...!!"

진심이 전해진다.

지금껏 투덜거리듯 투정을 부리던 마음이, 내 심장을 향해 곧잘 전해졌다.

나를 향한 애증,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애정, 그 애정을 짓누르는 무거운 사랑까지.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대체로 하는 만들어진 사랑이 아니었다.

오직 나, 아리엘만을 바라보는 순수한 사랑.

그렇게 순수한 사랑이었기 때문에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거겠지.

사랑이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좋아요. 대신, 무리 한다고 생각되면 절대로 말릴 거니까요!"

"고맙구나, 엘. 역시 너 밖에 없어."

"이, 이럴 때만 그러지 말라구요?! 어, 어차피 린ㅡ 그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한테만 꼭 달라붙어 있을 거면서!"

이번에는 질투였다.

확실히, 모든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였지만 그 중에서 가장 의지하고 있는 존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다름 아닌 린이었다.

린. 가장 먼저 내 편이 되어준 아이.

내 상처를 돌봐주고, 나를 이해해준 아이.

인간과 마족,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고통 받았지만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아이.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할 정도로 길고 깊게 이어진 관계였으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사랑을 쌓으면 되지 않겠느냐."

"..."

"내가 린을 사랑하는 만큼 너를 사랑하게 되면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린이 나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게 되면 되고."

"...읏."

천천히 손을 뻗어, 엘의 정수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사랑을 주는 법만 알지, 받는 법을 모르는 이였기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을 터였다.

엘, 내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은 모르겠지.

내가 죽어갈 때, 가장 먼저 누구를 걱정했는지도 너는 알 수 없을 터였다.

아아, 그래. 내가 차가운 칼날에 찔려 싸늘하게 식어가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바로 네 얼굴이었다.

'...또 가족이 죽으면, 안 되는데. 나까지 죽어버리면, 안, 되는데...'

벌써 몇 번이고 자신이 낳은 자식들을 잃어온 그녀였다.

자식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알고 있었기에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걱정을 멈추지 않았더랬지.

혹여 나쁜 선택을 하면 어쩌지, 하고.

물론 나쁜 선택 비슷한 걸 하기는 했지만ㅡ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 되었으니까.

"일단, 배고프지? 다들."

"딱히 배는 안 고프ㅡ"

꼬르륵ㅡ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의 배에서 소리가 울려퍼졌다.

엘 같은 경우에는 뭐, 신이니까 그렇다고 쳐도... 어제 얼마나 격하게 관계를 나눴길래 저 정도의 소리가 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니 엘리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럴 수 있어. 원래 배에 아기가 들어있으면 많이 먹는 법이니까.

"식사 준비는 에밀리가 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은 씻으러 가자꾸나."

"...네에."

엘리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오랜만인 것 같은데.

옷장에서 펑퍼짐한 가운을 꺼내서는 엘리의 몸에 둘러주었다.

원래 입고 있던 옷도 품이 꽤 넓은 편이기는 했지만, 만식인 임산부가 입기에는 조금 작아보였으니까.

내가 엘리를 부축하고 있는 동안 엘도 옷을 입었고, 미코는 근처의 옷장을 뒤져 속옷이나 다른 옷가지들을 챙기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게 있구나.

아무리 생각해도 미코는 돌봄에 최적화 된게 틀림 없었다.

"몸이 무거워요... 허리도 아프고."

"갑작스럽게 아이를 가지니까 몸이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 거다."

"끄응... 아리엘 씨는 이걸 대체 어떻게 버티신 건가요?"

그러게, 어떻게 버틴 걸까.

당시의 일을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버렸다.

어쩌면, 아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겪었던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나쁜 기억이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생각했을 정도로 끔찍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더랬지.

전부 지난 일이었으니 미련을 가질 생각 따위는 없었지만.

"자, 이리로 오거라."

"네엣..."

낑낑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엘리를 욕실로 안내해, 근처에 자리를 잡아 앉혔다.

여기에 오는 것도 또 오랜만이구나.

천천히 채워지는 수증기를 바라보다가, 엘리의 몸에 덮여진 가운을 걷어냈다.

언제나 내 배가 커다란 것만 봤는데 말이지... 이렇게 보니까 또 신기하구나.

"...만져봐도 되겠느냐? 다른 사람이 아이를 가진 모습은 또 처음 봐서 말이다."

"네, 마음껏 만지세요."

"그러면 잠시만ㅡ"

천천히 손을 뻗어, 둥글게 솟아오른 배 위에 살짝 올려두었다.

부드럽고, 뜨겁고, 쿵쿵 뛰어대는 복부.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다는 듯 생명으로 맥동치는 것이 느껴져서, 순간 깜짝 놀라버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이 내 배를 만질 때 이런 느낌이었구나.

다른 이들이 느꼈던 감각을 직접 느껴본다는 건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툭ㅡ

"앗..."

"읏?!"

...찼다.

손이 올라가마자마 발길질을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성깔이 꽤 있는 아기인 듯 싶었다.

누구려나. 내가 기억하기로도 이 정도로 활발한 아기는 몇 없던 걸로 아는데.

예를 들자면 케이라던지.

"엘리, 뱃속에 들어있는 아기가 누구인지 내기 하겠느냐?"

"에, 그걸 맞출 수가 있나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는 하구나."

솔직히 내기라고 해봤자 무슨 거창한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밥 한 번 해주는 정도라면 충분하겠지.

"그러면 저는 케이 씨로 할래요."

"에."

"...아리엘 씨도 설마 케이 씨 생각하셨어요?"

"으응, 그렇다만..."

"뭐, 그러면 둘 다 맞으면 서로 밥 해주는 걸로 하죠. 만약 아니라면 케이 씨에게 밥 해주는 걸로 하고."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만약 케이가 아니라면 또 케이에게 미안해지기는 하겠지만서도.

아무튼, 그렇게 한참 동안 엘리의 배를 만지작거리다가 언제쯤 나올 거냐는 에밀리의 타박에 서둘러 씻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엘리를 씻겨주는 거였지만, 아무튼.

쏴아아ㅡ

"후아아... 설마 아리엘 씨에게 씻겨질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으면 좋지 않느냐."

"그건 그렇죠? 아아, 매일매일 이렇게 아리엘 씨가 씻겨줬으면 좋겠다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마."

"제 양심이 찔려서 조금 무리예요..."

황금빛의 머리카락을 슥슥 쓸어내리자, 엘리가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에, 부드러운 손길까지.

내가 이런 말을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극락도 이런 극락이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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