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29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3)
"침공이다! 마족들이 온다!! 전부 무기 챙겨서 정렬해! 어서, 빨리!!"
잠시간의 평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나갔다.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나, 싶으면 갑자기 나타나서 난리를 피우니 하루라도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 내가 있는 곳을 따라다니는 걸지도 모르지.
"용사님은 쉬고 계세요."
"하지만, 제가 가지 않으면ㅡ"
"북부의 전사들은 강하다구요? 왕국의 샌님들과는 인종부터 다른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하지만ㅡ
몇 번이고 방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사용인에게 밀려서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나 작은데도 북부인이라는 거구나.
생각보다 강한 힘에 당황을 하면서도, 밖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물론 시도하는 족족 들켜서 방 안으로 끌려가듯 들어갔지만서도.
"...정말 괜찮을까."
만약 누군가가 죽으면 어떻게 하지?
여왕님이ㅡ 에반젤린이 나를 탓하면 어떻게 하지?
물론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만약의 경우라는게 있으니까.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 악담을 한 것도 있었고.
"안 되겠어, 지금이라도 가지 않으면ㅡ"
"여기 있었구나, 엘리."
"...에반젤린?"
그렇게 노파심을 이기지 못하고 성검을 집어드는 순간, 문이 열리고 에반젤린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전부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런 에반젤린의 모습에 순간 기겁했지만, 강철과도 같이 단단한 눈동자에 겨우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크게 다친 줄 알고 걱정했었는데.
"이겼다. 사람들이 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북부의 전사들보다 마족들이 훨씬 더 많이 죽었으니 우리들의 승리라고 볼 수 있겠지."
"..."
"자, 이래도 우리가 용사의 도움이 필요한 건가? 우리들은, 우리들의 손으로 우리들의 고향의 지킬 수 없는 건가?"
"...아니, 요."
북부의 사람들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그 어떤 이들보다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왕국의 사람들은 어땠더라?
아아, 그래. 마족이 나타나면 도망가거나 비명을 지르고, 맞서 싸우는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대부분이 마족을 죽이는 쪽이 아니라 마족에게 죽임 당하는 쪽이었더랬다.
"도와달라고 말하기만 하고 스스로가 행동하지 않는 자는 도움 받을 자격이 없다. 살려달라고 말하면서도 그 상황을 타개하려고 하지 않는 자는 살 자격이 없지."
"그건ㅡ"
"북부는 용사의 도움 같은 건 바라지 않아. 그러니, 이곳에서만큼은 마음 편히 쉬었으면 좋겠구나."
두근, 하고 심장이 뛰었다.
분명 먼지투성이에 피투성이인 모습일 텐데도, 그런 그녀의 소탈한 미소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줬던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 전혀라고 할 정도로 없었지.
"자, 승전의 날이다. 북부에서는 승전을 했을 때 전사들의 몸을 따뜻한 물로 씻기는 행사가 있지. 그러니 같이 가자꾸나."
"저는 괜찮, 읏ㅡ"
"이렇게나 지저분하지 않느냐. 원래 전투를 하기 전에는 마음가짐과 함께 몸가짐을 해야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가자, 엘리."
"...네."
이 정도로 고집을 부린다면 나로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에반젤린에게 팔을 붙잡혀서 달랑달랑 방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욕탕.
평소에는 따뜻한 물을 채워놓지 않는다고 했던 장소였데, 지금 만큼은 따뜻한 수증기로 가득 차있는 상태였다.
"왕국의 욕탕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는 모르겠다만, 이곳의 욕탕도 꽤 그럴듯하지 않느냐?"
"...엄청 좋은 것 같은데요."
"크기는 작지만 말이지."
자, 가자. 살짝 잡아당기는 힘에 맞춰서 욕탕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에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걸까.
몸을 깨끗하게 하는 곳에, 나 같이 더러운 인간이 들어간다고?
...이 예쁜 욕탕이 나 때문에 더러워지면 어떻게 하지.
"자, 벗거라."
"..."
"설마 다른 사람 앞에서 벗는 걸 부끄러워하는 성향이었던 건가?"
"그건, 아니지만..."
에반젤린의 몸은 자잘한 상처가 있을지언정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내 몸은 크고 작은 상처투성이에, 울퉁불퉁 올라 온 흉터, 그리고 굳은살까지 해서 아주 흉측할 터였다.
굳이 내 흉한 모습을 에반젤린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에게는 내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
"어떤 몸을 하고 있더라도 놀리지 않을 테니 벗거라. 애초에 여기까지 오면서 제대로 씻지도 못한 것 같던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도 계속 그런 꼴로 지낼 터인데?"
"...저, 정말 놀리시면 안 돼요?"
만약 놀림 당한다면 정말 울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내 몸 상태는 정상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말이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천천히 벗겨지는 옷과, 그 옷이 내 몸을 떠나가는 감촉 이상할 정도로 생소했다.
꽤 오랫동안 이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피부가 공기 중에 노출되는 느낌이어색하기 그지없었다.
"그... 흉하죠? 역시."
"멋진 몸이다. 북부의 전사들이 본다면 다들 놀라겠어. 이 여린 몸에 본인들이 평생 살아도 경험하지 못할 전투가 전부 담겨있으니 말이야."
"..."
역시 북부 사람들은 이상해.
이 괴상한 몸을 보고 칭찬을 하다니.
심지어 빈말이 아니라서 더 이상했다. 원래 이 정도의 상처나 흉터를 보면 칭찬보다 비명을 지르지 않나? 아니면 표정을 찌푸리거나.
하지만 에반젤린의 얼굴은 내 몸을 보기 전과 같았다.
아니, 오히려 눈동자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조금 부담스러웠다.
"저, 그렇게 뚫어져라 보시면 부끄러워서..."
"원래 부끄러워서 가릴 수록 더 보고 싶은 법이다만."
"그, 그래도 가리는 건 어쩔 수 없어요..."
국부와 가슴을 가린 팔을 꾹 붙이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이 사람,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움이라던지 수치심 같은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이 행동하잖아.
"그렇게 가리고만 있으면 하루 종일 제대로 씻지 못할 것 같구나. 물이 뜨거운 순간은 잠시 뿐이니 지금 만끽하지 않는다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북부에서 따뜻한 물이란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거든."
금방 사라지는 환상 같은 존재지.
여전히 내 나체를 보여주는 건 부끄러웠지만, 시야가 수증기로 가득 차니 조금 나아진 것 같기도 했다.
...과연 에반젤린처럼 당당해지려면 얼마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어야 하는 걸까.
"자, 여기 앉거라. 일단 머리부터 감아야 할 것 같으니까."
"잠ㅡ"
촤아아악ㅡ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머리 위로 따뜻한 물이 쏟아졌다.
따, 따뜻해... 그것도, 엄청...
물이라고 한다면 언제나 미지근한 것이나 혹은 차가운 것 밖에 모르던 내가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처음에는 떨떠름했지만, 막상 전신을 덮는 따스함을 느끼니 몸에서 긴장이 쭉쭉 풀려버렸다.
"후아아아아......"
"푸흐, 꽤 귀여운 소리도 낼 줄 아는구나."
"그,그건...!"
"그나저나, 머리카락이 아주 거친 개털 같구나. 태어나서 평생 관리 같은 걸 하지 않은 듯 싶은데."
관리할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노력 따위가 필요치 않은 인생이었으니까.
뒷골목을 전전하고, 교단에서 부품처럼 다뤄지다가 결국 용사까지.
스물스물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들에 어깨에 힘이 쭉쭉 빠졌다.
"그래도 뭐, 정상을 들여서 감겨준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터다.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거든."
"...그런가요?"
"그런 거지. 이런 나도 머리카락 정도는 최소한의 관리를 하거든."
아, 머리에 세정제를 바를 테니 눈 감고 있거라.
덧붙여지는 말에 눈을 꼭 감자, 정수리부터 시작해 머리카락 곳곳에서 에반젤린의 손길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 뭔가 느낌이 이상해...
"앗, 흐앗, 흣..."
"음? 다른 사람에게 머리가 만져지는 건 처음이었더냐?"
"후, 후앗, 자, 잠시만요...!"
"아서라, 이제 씻어내야 하니까 조금만 더 눈을 감고 있거라."
촤아아악ㅡ
머리를 꾹꾹 어루만지는 에반젤린의 손길에 이상한 비명을 내뱉다가도, 다시금 쏟아지는 따스함에 입을 꾹 다물었다.
따뜻한 건, 이렇게나 좋은 거였구나.
느물느물 풀어지는 몸에 깊은 숨을 토해내자 에반젤린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머리카락이 머금은 물을 쭉쭉 짜냈다.
이 정도 정성이라니, 너무 과한게 아닐까.
이러면 내가 북부의 여왕에게 내 머리카락을 씻기는 일을 시킨 것 같잖아.
"흐음, 잘 행궈진 것 같구나. 자, 처음보다 훨씬 예뻐진게 느껴지느냐?"
"...이게, 나?"
떡지고, 엉겨있고, 지저분하게 뻗쳐있던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흘러내려 있었다.
물기를 머금었음에도 느껴질 정도의 부드러움.
멍청한 얼굴로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거울을 만져서는 내 머리카락을 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다시금 손을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살짝.
"머, 머리카락이 원래랑 너무 달라졌는데요...?!"
"어쩌면 원래 상태로 돌아간 것일지도 모르지 않느냐."
에반젤린의 손이 내 정수리를 톡톡 두드렸다.
마치 아이를 다루는 듯한 태도였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친절함과 관심이 진짜여서 그런지 차마 불평을 할 수조차 없었다.
...정말, 당신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