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34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8)
단 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무너질 세상이, 과연 존재해서 되는 것일까.
용사의 실종 이후, 인간들의 왕국은 느린 속도로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갑자기 시작된 마족들의 총공세와 그런 총공세를 막을 용사의 부재.
그런 두 가지의 변화만으로도 이 정도로 밀려나다니.
"아직까지도 설득을 할 생각인 건가?"
"해야죠. 이런 상황인데."
입이 셋으로 늘었기 때문에, 마을에 나가야 하는 경우가 평소보다는 더욱 잦아졌다.
그리고 그 잦아진 방문 속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피폐함에, 결국은 포기를 택할 수가 없었다.
나라는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이기적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어도 됐을까.
어째서 저 작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맡기려고 하는 걸까.
여신께서는 어째서ㅡ
"비록 교단에서 쫒겨난 몸이지만, 제 믿음은 언제나 여신님을 향해있답니다. 목숨을 구원 받았으니, 이 생이 끝날 때까지 여신님을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렇구나. 나와는 의견이 다르군."
모두가 포기할 법한 상황에서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엘리를 설득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물론, 그것이 오래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서도.
"마을 사람들이 그 아이를 욕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
"용사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이란 혜택은 다 누려놓고는 멋대로 도망친 겁쟁이라고 하더군요."
"..."
"그 아이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사람이 아니에요."
인간의 악의란 너무도 지독해서, 잠시 마주했을 뿐이었는데도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당분간은 마을에 가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다른 이들을 불신하는 건 아니지만, 충동적인 행동이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법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몸만 멀쩡했다면 뭐라도 도울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괜찮아요. 당신은 그저 몸을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니까요."
지금은 에반젤린 여왕의 몸을 회복시키는 것과 엘리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우선이었다.
몸이 건강하더라도, 마음이 꺾였다면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법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에반젤린 여왕의 정신은 평범한 인간의 것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었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자신의 상황을 비관해 포기할 수 있을 정도의 몸 상태였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포기하지 않는 정신 덕분인지 그녀의 몸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는 상태였다.
"어째서 나와 엘리를 죽이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찝찝한 느낌은 지울 수 없구나. 분명 무언가 노리는 바가 있을 터인데."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게 아닐까요?"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금 미안한 말이었지만, 성검이 없는 용사는 반쪽짜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왕을 처단할 수 있는 여신의 칼날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인간들이 마족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용사를 살려둔 건 또 이상했다.
마지막의 순간에서 전력으로 휘두른 성검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혔다고 했었나.
그 정도의 전력 차이라면 분명 엘리를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마왕은 어째서 그녀들을 살려뒀나.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었다.
"에반젤린 씨, 수녀님. 근처 숲에서 먹을 것들을 조금 찾아왔어요."
"대단하네요, 엘리."
오두막을 문을 열고 들어온 엘리의 품에는 여러 과일이나 풀들이 들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교단에 오기 전까지는 길바닥을 전전했었다고 했었지.
아무래도 그런 경험을 이용해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구해온 것 같았다.
"맛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탈이 나거나 하지는 않을 거에요."
멋쩍은 듯 말하기는 했지만, 식량 사정을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꽤나 커다란 일이었다.
마을로 내려가는 것의 빈도를 줄이려고 한 이상, 자체적으로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다는 건 일단 희소식이라고 부를 수 있을 터였다.
"에반젤린 씨, 몸은 괜찮으세요?"
"돌봐준 덕분에 많이 괜찮아진 것 같구나. 조금만 더 지나면 걸어다닐 수도 있겠어."
제 무릎을 통통 두들기는 에반젤린 여왕의 모습에 엘리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교단에 있을 적에는 본 적 없는 미소.
마치 첫사랑을 마주한 소녀와도 같은 미소라고나 할까.
푹 빠졌구나, 정말.
"너무 무리하시면 안 돼요. 필요한게 있으면 전부 제가 가져다 드릴 테니까요!"
그래도 뭐, 처음 봤을 때보다는 훨씬 밝아진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이런 평화로운 일상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얇은 줄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한 평화가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바랬지만, 그것이 욕심이라는 것 정도는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만큼은ㅡ
"아."
ㅡ행복했으면, 좋았을 텐데.
***
세상 어디를 가나, 과도하게 의심이 많은 이들은 존재하는 법이었다.
가령, 가끔씩 마을에 찾아오는 수녀가 갑자기 많은 물자를 사간다던지, 마을에 찾아오는 빈도가 늘어난다던지 하면 조금 생각이 깊어지는 이들도 있는 법이었고.
남자 또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그의 본성이 악한 쪽에 가까웠다는 점일까.
"수녀님 말이지, 요즘 기분 좋아보이시지 않아?"
"...그런 것 같네."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은 검은 채.
자신이 어제 보았던 광경을 떠올린 남자가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해야, 그 고결한 얼굴에 절망감을 띄워올릴 수 있을까.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서 본인만 고귀한 척 살아가는 그 여자ㅡ
ㅡ그리고, 그 여자의 오두막에서 지내는 빌어먹을 용사년의 면상을 구겨줄 수 있을까.
"잠시 가야할 곳이 있어서 말이야, 오늘은 이만 가볼게."
"뭐야, 벌써 가냐? 싱거운 녀석이구만... 그보다, 돌아갈 때 조심해서 가. 요즘 이쪽 방면에서 마족들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더라고."
"걱정해줘서 고마워."
마족이라. 분명 용사년을 찾으러 온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런 변방에까지 그 녀석들이 찾아올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죽이고 싶은 녀석들 둘을 서로 붙여서 둘 다 죽게 만든다면 기분이 꽤 좋을 것 같았다.
용사가 죽인 가족들의 얼굴과 마족이 죽인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 보면, 그 년을 증오하는 녀석들이 꽤 있었지."
용사가 죽인 사람. 용사가 구하지 못한 사람. 용사가 구하지 않은 사람.
이 세상에는 그 세 가지 종류의 인간들만이 있었다.
자신이 품은 증오가 정당하지 않나, 하는 의문을 가져봤던 적도 있었지만ㅡ
ㅡ그런 의문을 가진다고 뭐가 달라지지?
"이봐, 내가 좋은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야ㅡ"
남자의 증오는 이어진다.
남자에서 다른 남자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또 다른 이들에게.
용사가 마족과 싸우는 것의 여파에 휩쓸려 죽은 이.
마족이 인질로 붙잡혀 있으면서도 끝까지 용사에 대한 믿을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 죽어버린 이.
그리고 마족을 죽이는 것에 정신이 팔려 충분히 살 수 있었음에도 살지 못한 이까지.
그들의 증오는 합당한 것이었다.
아니, 합당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티지 못했을 테니까.
이 분노와 증오가 합당하지 않다면, 대체 누구에게 분노하고 대체 누구에게 증오해야 한단 말인다.
"ㅡ어때, 조금 생각이 있어?"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꿈에서나 보던 기회를 이렇게 현실에서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좋아, 일단 계획을 짜보도록 하자. 분명 쉽게 죽어주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어떻게 해야 깔끔하고, 가장 통쾌하게 죽일 수 있을까.
나의ㅡ 우리들의 원수들을.
***
오두막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다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에반젤린 씨와 수녀님, 그리고 나.
혼자 길바닥을 전전하며 지낼 때보다는 따뜻했고, 교단에서 지낼 때보다는 덜 외로웠으며, 용사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지 않았다.
내가 이 정도로 행복해도 될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 정도면 행복해도 돼.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이미 한참이나 되었으니 말이다.
"생각은 해보셨나요?"
"네, 수녀님."
"...아무래도, 긍정의 대답은 아닌 것 같네요."
"...네. 사람들을 구하는 일이 정말 좋은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제는 지쳤어요. 성검도 없고, 돌보고 싶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수녀님은 계속해서 나를 설득하려고 하셨지만, 내 생각이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죄송해요, 수녀님. 저에게 용사라는 자리는 너무 과분했던 것 같아요.
차라리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더 오래 견딜 수 있었을까.
아니, 견뎌내는 것 뿐만 아니라 마왕 처단이라는 업을 완수할 수 있었을까?
"그렇군요."
"...저한테, 실망하셨나요?"
"그럴 리가요. 제가 당신에게 실망할 일은 없을 거랍니다."
내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수녀님이 얼마나 안심했던지.
혹시라도 실망시켰을까 두근거리던 가슴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