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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35화 (335/342)

Chapter 335 - IF : 만약 그녀가 용사였더라면. (9)

아무리 다른 인간들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혐오가 생겼다고 한들 완전히 잘라낼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있을 리가 없겠지.

만약 그녀가 눈앞의 불행을 그대로 지나치는 인성의 인간이었다면 여신에게서 용사의 자리를 받지 못했을 터였다.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선택 받은 자리.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여정.

본성이 선하기 때문에 걸려들 수밖에 없는 함정.

"도와주세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 누구 없나요?!"

"...아."

그날도 언제나와 마찬가지였다.

언제나와 같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숲을 돌아다니던 도중 들려온 비명 소리.

그 소리를 향해 홀리듯이 걸어, 마침내 비명의 근원으로 향하면 어느 남자 하나가 다리에 피를 흘린 채로 쓰러져 있었다.

저대로 계속 쓰러져 있다가는 분명 들짐승에게 잡아먹히거나 하겠지.

'구하지 않으면 안 돼.'

구하지 않으면, 저 사람이 죽어.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손을 뻗어서, 부축을 하고, 마을로 데려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야.

전혀 두려워 할 필요 없어.

그냥 사람이야. 그냥, 다친 사람이야.

나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고, 끼치지 않을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ㅡ

"싫어요."

"...뭐?"

싫어. 더 이상은 싫어. 나를 이용하려는 인간들 전부 밉고 또 미워서, 더 이상은 구해주고 싶지 않아.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저 남자의 표정, 희미하지만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는 것이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자 특유의 얼굴이었다.

스스로의 눈치가 빠르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다른 사람의 악의를 판별하는 능력은 상당했다.

그 이유라고 한다면 지금까지 겪어왔던 경험 덕분이라고나 할까.

"당신,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거죠? 대체 저에게 뭘 원해서 접근하신 건가요."

"노리다니, 대체 뭘ㅡ"

"다리가 다친 것처럼 하고 있지만 움직이잖아요, 다리."

"..."

피투성이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남자의 다리가 미세히 움직이는 모습이 조금씩이지만 눈에 비쳤다.

거짓말쟁이.

대부분의 인간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본인의 부상을 꾸며내서까지 속이려고 할 줄이야.

그 역겨움에 구역질이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눈치가 빠르네~ 솔직히 절대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일부러 이렇게 피까지 묻혔는데."

"..."

"뭐, 일단 내 역할은 시간을 끄는 거였으니까 상관 없나."

단순한 중얼거림이었음에도, 이 남자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예상이 갔다.

나. 그리고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는 두 사람.

그냥 애초에, 내가 오두막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당신을 죽여버리겠어요."

"살벌하네."

마음 같아서는 무슨 일을 꾸미고 있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두 사람의 안부가 훨씬 더 중요했다.

에반젤린 씨, 수녀님. 제발 무사해 주세요.

부디 내가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에게 그 어떠한 일도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두막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

"...아무래도 손님이 온 것 같구나."

"손님이요?"

수녀는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이 오두막 주변에 인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하나도, 둘도 아닌 여럿.

심지어 인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이ㅡ 아니, 숨기기는 커녕 존재감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는 자들 투성이였다.

따갑구나. 이런 악의는 전장에서조차 느껴본 적이 없었거늘.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수녀의 팔을 붙잡고는 느리게 숨을 토해냈다.

"아무래도 좋은 목적으로 온 건 아닌 모양이야. 혹시, 몰래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

"...나갈수 있는 곳은 앞쪽의 문 하나가 다예요."

이 상황을 바로 외통수라고 해야 하는 걸까.

몸 상태라도 멀쩡했다면 저들을 뚫고 도망쳤게지만, 지금 상태로는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엘리, 그 아이가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움직여, 그대로 침대보를 짚었다.

"잠깐, 그 상태로 움직이시면 안 돼요!"

"움직이지 않으면 둘 다 죽어. 너는 하지 못할 테니, 내가 하려는 것 뿐이다."

덜덜 떨리는 다리와 덜덜 떨리는 몸.

상처는 이미 다 사라졌지만, 후유증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떨림은 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스릉ㅡ

"적을 상대할 때는 언제나 장검을 들었는데, 지금은 식칼을 들고 있구나."

"...에반젤린 여왕."

"바깥에 있는 자들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화로 해결할 수 없다면 몸으로 상대하는 수밖에 없겠지."

패배 따위는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위대한 북부의 핏줄이 겨우 팔다리의 경련에 물러선다면 비웃음만 살 뿐일 테니까.

옆쪽에 선 수녀는 상당히 걱정하고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최소한 그녀 만큼은 다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약자를 지키는 건 언제나 강자의 역할이었으니 말이다.

쾅! 쾅! 쾅!

"아가씨들, 밖으로 나오지? 그렇게 말을 두런두런 하면서 아무런 반응도 안 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그래, 확실히 예의가 아니구나."

우리들을 노리고 온 건 아니야.

아마ㅡ 아니, 분명 노리고 있는 건 엘리일 터.

지금까지 들어본 이야기를 토대로 추측하자면, 그들은 엘리가 구하지 못한 인간들의 지인이나 친구, 가족들일 터였다.

용사가 지키지 못한 자들과 그들을 잃은 채, 죽지 못해 겨우 살아 이 세상에 남겨진 자들.

단어만 나열하면 한 편의 신파극을 찍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너희들의 가족이나 친구들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그 아이에게 복수라도 하러 온 건가?"

"..."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하군. 왜 너희는 너희들의 가족이나 친구를 지키지 못했지? 아니, 지키려는 노력을 하기는 한 건가? 만약 했다면, 그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인지 알았을 텐데도 대체 왜 그 아이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고 하는 거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약자들을 지켜주는 것이 바로 용사의 역할이었고.

하지만 그건 절대가 아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본인의 손으로 지키는 것이 옳다.

모든 것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길 생각이라면, 대체 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한심한 종자들이구나. 너희와 내가 같은 종족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혀를 깨물고 싶을 정도구나."

북부에 마족들이 침공했을 때, 죽은 전사들의 가족들 중 그 누구도 엘리를 원망하지 않았더랬다.

명예로운 전투 끝에 명예롭게 죽었기에 원망하지 않는다.

애초에, 북부의 전사들에게 보호받는다는 가정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본인이 죽는다면 그건 그저 자신이 약했기 때문이지, 절대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지 않아서가 아니었으니까.

쾅!!!!

"...죽여버린다, 빌어먹을 년이."

"마족에게서 제 소중한 것도 지키지 못해 아무런 잘못도 없는 이를 원망하는 주제에 입은 거칠구나. 아니, 그 더러운 인성이 반영된 것이라고 본다면 어울리지 못할 것도 없군."

계속해서 도발의 말을 내뱉는 내 모습에 수녀가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로 내 옷자락을 붙잡아 왔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도발하시는 건가요?

입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에 입꼬리를 비죽 끌어올렸다.

"이런 말을 듣고도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저들은 그런 자들일 뿐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애초에 제 분을 참지 못해 이곳까지 온 것만으로도 수준이 보이지만서도."

"...에반젤린 여왕."

"너는 안쪽에 있거라. 괜히 여기에 있다가 못볼 꼴 보지 말고."

"...네."

죽이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저들을 살려둔다면 또 다른 위협을 불러올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에 조절이 힘들다는 것도 있었고.

아랫입술을 꾹 깨문 채로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오는 건가.

그렇다면ㅡ

'들어오기 전에 먼저 간다.'

덜컥ㅡ

"나왔ㅡ!?"

"많이도 데려왔구나."

쿵ㅡ!!

기습적으로 문을 열고는 바로 앞에 서있던 남자를 그대로 오두막 안으로 끌어들였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남자의 멱살을 부여잡고는 전투적으로 웃어보이자, 남자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미안하지만, 몸 상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이 정도는 이해 해주거라.

식칼도 나름 칼이라고, 날붙이를 붙잡으니 조금이나마 잦아든 경련이 어찌나 반갑던지.

푸욱ㅡ

"켁, 케헥..."

"마음 같아서는 살려주고 싶지만, 몸 상태가 이래서 누구를 살리거나 하지는 못할 것 같아서 말이야."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순식간에 절명했다.

이제 겨우 하나인가.

울컥울컥 튀어나오는 핏줄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팔을 움직여 남자의 옷자락에 식칼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원래라면 휘두르는 것 정도로 충분했을 터인데, 이건 조금 불편하구나.

"그래서, 다음 들어올 녀석은 없는 건가?"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쪽으로 끌려들어간 남자가 어떤 꼴이 되었는지를 상상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상상을 끝낸 뒤 충격에 빠져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내 발로 직접 나가줄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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